핸드백의 속사정

그녀의 가방엔 뭐가 숨어 있을까? 지갑과 스마트폰, 향수와 파운데이션은 예상 가능.
하지만 손톱깎이와 손전등이 달려 있다면? 점점 더 흥미로워지는 핸드백의 속사정.



지난 10월 말 청담동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을 위해 서울을 찾은 프랑스 가방 디자이너 제롬 드레이퓌스가 자신의 핸드백을 소개하던 중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선언했다. “저는 여자들의 삶을 더 편하게 만들기 위해 가방을 디자인해요.” 당신의 아내인 이자벨 마랑도 포함되나요? “물론이죠. 가령 저의 핸드백에는 모두 자그마한 손전등이 달려 있어요. 그것도 아내 때문에 떠올린 아이디어예요.” 손전등이 달린 핸드백이라구요? “몇 년 전, 이자벨과 시골 별장에 갔는데,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한 그곳에서 이자벨이 가방 안에서 열쇠를 찾느라 고생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가방에 손전등이 있었다면 열쇠를 쉽게 찾았겠죠.”

사실 핸드백 쇼핑에 나선 여자들이 가방 속을 이 잡듯 뒤지며 여기저기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은 별로 없다. 샤넬 2.55 백을 구입하면서 스마트폰을 넣을 주머니가 없다고 불평하는 여자는 드물다. 또 겨우 손에 쥔 에르메스 버킨 백 앞에서 손전등이 달리지 않았다고 계산을 포기하는 여성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어두운 택시 안이나 아파트 문 앞에서 가방이라는 동굴 속에서 물건을 찾아 헤맨 적이 있다면 누구나 드레이퓌스의 아이디어에 혹할 만하다. 핸드백 속의 자그만 디테일이야말로 여자를 위한 진정한 배려니까. 11월 런던 리버티 백화점에서 열린 버킨 백 30주년 기념 전시에 다녀온 패션 블로거 수지 버블 역시 전설의 가방 속에서 숨은 이야기를 찾아냈다. “에르메스가 아닌, 파리 빈티지 전문 딜러인 캐서린 B(Les 3 Marches de Catherine)가 준비한 전시였어요.”

2000년 에이즈 자선 행사를 위해 제인 버킨이 경매에 팔았던 첫 번째 버킨도 자리를 빛냈다. 특이사항이라면 유일하게 어깨 끈이 달린 버킨 백이라는 것. 그녀의 딸 샬롯 갱스부르를 한 손에 안고 다니기 위해 제인 버킨이 에르메스 쪽에 어깨 끈을 부탁한 것이다. “또 제인은 손톱을 깔끔하게 관리하는 걸 좋아해 가방에 손톱깎이를 달아달라고 요청했죠.” 버킨 백과 손톱깎이라.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자신의 상황에 적합한 가방을 만들고 싶었던 제인 버킨에게는 더없이 완벽한 가방인 셈.





“고객의 특별 요청이 있을 경우 내부 디자인에 변화를 주기도 합니다.” 에르메스 하우스는 ‘커스텀 메이드’ 가방 제작 시 내부에 색다른 구조를 더할 때도 있다고 전한다. 버킨 백의 안감 컬러 교체는 물론, 건축가 고객이라면 자신이 쓰는 연필을 쉽게 꽂아둘 만한 수납 공간을 요구하는 것. “스페셜 오더 팀이 그 요청에 따라 작업을 수행합니다.” 이런 주문의 장점은, 역시 두말 할 것 없이 나만을 위한 모든 것을 갖춘 가방이라는 것. 반면 단점이라면? 프랑스 파리의 장인들 손에 의해 언제 완성될지 모른다는 것.

시간과 지갑 사정이 넉넉한 VVVIP들은 커스텀 메이드 백이 익숙하겠지만, 일반 여성들은 쉽게 에르메스 매장에서 내부에 손톱깎이나 연필꽂이를 부탁하긴 쉽지 않다. 그럴 땐 이미 핸드백 안에 자리 잡은 디자이너의 배려가 더없이 반갑고 고마울 수밖에. 발렌시아가 모터 백이 21세기 최고의 히트 백이 될 수 있었던 건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재능과 케이트 모스가 주야장천 그 가방을 들고 다녔던 파파라치 사진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가방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진 자그마한 거울도 큰 역할을 했다. 잇 백부터 클래식 백까지 모든 백을 섭렵한 <보그> 편집부의 어느 스타일 에디터는 이렇게 증언한다. “작은 거울이지만 메이크업 수정 때 더없이 편리했어요. 주변에 거울이 없을 때 정말 유용했죠. 요즘엔 스마트폰 ‘셀카 모드’를 주로 쓰긴 하지만.” 이렇듯 실용적인 아이디어를 담은 가방은 의외로 인기가 높다. A4 용지로 된 문서나 13인치 노트북을 담을 수 있는 포켓이 장착된 멀버리의 아룬델 토트백은 커리어우먼들 사이에 인기. 또 기저귀부터 젖병까지 수많은 아이템을 들고 다녀야 할 엄마들에겐 ‘Snack’과 ‘Mommy’s Stuff’라고 수 놓인 내부 포켓이 잘 정리된 레베카 밍코프의 마리사 백이 편리할 것이다.

 

현대 여성의 가방을 논할 때 샤넬 백을 빼놓을 수 없다. 1929년 여성의 두 손에 자유를 선사하기 위해 숄더백을 선보인 마드무아젤 샤넬은 가방 안을 두 칸으로 나눴다. 그런 뒤 비밀의 안쪽 주머니도 따로 마련했다. 안쪽 주머니는 그녀가 ‘늘 편안함을 얻기 위해 투자하는 돈’이라고 말했던 팁을 위한 잔돈 보관 용도. 두 번째 칸의 안쪽은 세 가지 포켓으로 나뉘는데, 가운데 포켓은 립스틱 보관용이라고 그녀는 말하곤 했다. 이런 디자인은 1955년 2월 탄생했던 2.55 백부터 지금 선보이는 샤넬 백에 대부분 공통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참, 첫 번째 주머니의 또 다른 용도 역시 은밀하고 재치 넘친다. 그녀가 수많은 연인에게 보내는 러브 레터를 이곳에 숨겼던 것. 역시 연애의 고수다운 아이디어!





“가방의 외부 디자인이 주위에 보여지기 위한 거라면, 내부 디테일은 전적으로 사용자를 위한 라이프스타일의 일부입니다.” 최근 교통카드 홀더를 부착해 재키 백을 디자인한 ‘쿠론’ 디자이너 석정혜는 이렇게 설명한다. “핸드백은 사용자들의 삶을 생각하고 디자인합니다. 커다란 쇼퍼백의 경우, 상단이 열려 있어 귀중품을 보관할 내부 지퍼 포켓을 안쪽에 넣었고, 클러치는 신용카드처럼 자주 쓰는 것들을 쉽게 꺼낼 수 있게 디자인하기도 합니다.” 간단한 듯 복잡한 핸드백 안에서 메이크업 제품을 쉽게 찾도록 오픈 포켓을 부착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렇다면 자신만을 위한 핸드백을 만든다면? “스마트폰을 넣기만 해도 충전 가능한 포켓을 숨겨놓고 싶어요!” 이미 시중에 나와 있는 스마트폰 충전 가능한 가방(‘Everpurse’ ‘EmPowered Bag’ 등의 브랜드)에 디자인을 곁들인 쿠론 백이 등장한다면, 배터리 부족을 시시때때로 호소하는 한국 여성들에게 인기 만점일 듯하다.

“사실 모든 가방의 내부를 제각각 디자인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한국의 어느 가방 브랜드 디자이너는 대부분 매뉴얼에 따라 완성된 내부 디자인을 크기에 맞춰 외부 디자인에 적용한다고 설명했다. 인스타그램에서 자신의 가방 안을 소개하는 ‘#InMyBag’ 태그가 유행할 때도 가방 안을 직접 찍는 사람이 드물었던 것도 그런 이유다. 지방시 판도라 백이든 셀린의 러기지 백이든 내부는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 “물론 요즘엔 스마트폰 주머니나 지퍼 파우치 등은 기본입니다. 새로운 스마트폰이 나올 때마다 크기에 맞춰 내부 포켓도 달라지구요.” 요즘 내부 디자인의 대세는? “한국 고객들은 한 가지 아이템을 사면 두세 가지 활용 가능한 가방을 선호해요. 숄더백 안에 클러치가 들어 있거나 백팩을 접으면 토트백으로 변하거나. 내부에 이런 비밀이 숨어 있으면 굉장한 ‘셀링 포인트’가 됩니다.”





그런가 하면 실용성보다 디자인의 환상이 가방 안을 장식할 때도 있다. 샬롯 올림피아의 디자이너, 샬롯 데랄은 자랑스럽게 자신의 ‘신상’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그녀가 처음 선보이는 가죽 핸드백 시리즈가 그것. “저는 40년대를 아주 좋아해요. 당시 스타일과 배우, 영화까지 모두! 그래서 모든 가죽 가방에 40년대 남자 배우 이름을 붙였어요.” 험프리 보가트, 말론 브란도, 클라크 게이블 등의 이름을 단 가방에는 그녀만의 환상도 숨어있다. “보가트 백을 보세요. 안에는 작은 파우치와 거울이 달린 머리 빗이 숨어 있어요. 핸드백과 같은 소재의 장갑도 달려 있죠.” 물론 보가트의 연인이었던 로렌 바콜이 좋아할 만한 디자인이지만, 딱히 실용성을 목적으로 이런 장치를 추가한 건 아니다. 클래식 컨셉에 맞게 가방 인테리어를 완성하고 싶은 디자이너의 재치일 뿐.

그렇다면 전혀 새로운 발상으로 핸드백을 접근하면 어떤 내부 인테리어가 완성될까. 최근 반향을 일으킨 루이 비통 ‘셀러브레이팅 모노그램’ 프로젝트에도 저마다 속사정이 눈에 띄었다. 육각형 모양의 가방을 살짝 비튼 프랭크 게리의 디자인에는 포켓형 거울이 숨어 있고, 마크 뉴슨의 백팩에는 두 개의 펜 홀더를 비롯해 정리가 쉽도록 메시 포켓을 더했다. 또 신디 셔먼의 카메라 메신저백에는 카메라 배터리, 메모리 카드 등을 넣을 수납 공간이 마련됐으며, 복싱의 펀칭백을 닮은 라거펠트의 가방 밑에는 은밀한 공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 번도 핸드백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가방 안에 머물고 있다는 상상 아래, 뭐가 필요할지 고민했습니다.” 건축가인 프랭크 게리는 난생 처음 핸드백을 디자인하며 내부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가방 안은 좀더 개인적입니다. 제 생각엔 짙은 블루가 어울릴 것 같았어요. 그렇게 된다면 내부 물건이 더 선명하게 보일 것 같았죠.” 그렇다면 거울은 왜 필요했을까? “여자의 가방 안을 들여다보는 것에 대해 환상을 가졌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