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돌아온 히피 시크

2015년에 돌아온 히피 시크. 70년대를 풍미한 이 스타일의 핵심은 보헤미안 드레스다.
자유로운 영혼의 유니폼, 봄바람처럼 나른하고 로맨틱한 드레스가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납작한 그릭 샌들을 신은 모델들이 가볍게 ‘딸깍’대는 소리와 함께 발렌티노 나무바닥 무대에 줄지어 등장했을 때, 보헤미안 룩의 귀환에 대한 한 가지 단서를 찾았다. 나풀거리는 투명 시폰 실크와 그리스풍의 긴 칼럼 드레스, 빈티지풍의 프릴, 복잡한 프린트와 레이스, 정교한 자수와 비즈 장식 등등. 대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스풍? 로코코? 보다 가까운 시기에서 힌트를 얻어 ‘정제된 히피’나 ‘화려한 보헤미안’이라고 설명하는 쪽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와 피엘파올로 피촐리가 뉴 발렌티노 스타일을 정립한 2011년부터, 로맨틱한 디테일의 기나긴 발렌티노 드레스 차림의 모던 히피들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탤리언 듀오가 발굴한 유행 아이템은 올봄 70년대의 거센 열풍에 동참한 디자이너(히피 시크를 반복하는 안나 수이, 로베르토 카발리, 에밀리오 푸치를 제외하고)들이 각자의 스타일대로 보헤미안 드레스를 선보이며 확산되고 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루이 비통에 포함된 짧고 하얀 페전트 드레스, 셀린 컬렉션에 영화 속 반전처럼 등장한 노골적인 꽃무늬의 할머니 드레스, 페전트 드레스를 섹시하게 버전 업한 리카르도 티시의 지방시 미니 드레스까지. 또 뉴욕 소호의 엘리자베스 스트리트 조각 정원에서 진행된 스텔라 맥카트니 크루즈 컬렉션에는 선명한 프린트를 콜라주한 행커치프 드레스 덕분에 활기로 가득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 색깔과 무늬를 당신의 삶 속에 가져온다는 발상! 멋지지 않나요?”라고 맥카트니는 설명했다. “부모님, 그들과 동시대를 보낸 느슨하고 자유로운 영혼들로부터 영감을 얻었어요.” 모델들이 나른하게 풀밭 위에 몸을 뉘었던 드리스 반 노튼 쇼는 19세기의 대표적 보헤미안파인 라파엘 전파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에서 힌트를 얻었다. 멜랑콜리한 모델들의 몸을 감싼(거미줄로 짠 듯 섬세한 옷감 위에 이국적인 무늬와 반짝이는 금박이 가로지르는) 드레스들이란!

보헤미안 감성으로 충만한 드레스는 감상적으로 보이는 만큼 우리일상과 다소 괴리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실용성은 머 지않은 과거에 증명된 바 있다. 2000년대 초 패셔니스타로 이름을 날린 시에나 밀러를 떠올려보라. 흰색 맥시 드레스에 양털 조끼나 크롭트 재킷을 입고 동전 모양의 커다란 벨트를 엉덩이에 걸친 채 카우보이 부츠를 신은 그녀 말이다. 특유의 스타일은 워낙 크게 유행한 나머지 ‘시에나스러운’이라는 표현까지 만들어냈다. 커다란 플로피 햇과 선글라스, 기다란 스커트 자락과 카디건을 질질 끌고 다니며 먼지를 폴폴 일으키던 메리 케이트 올슨은 또 어땠나(물론 한 손에는 스타벅스 커피, 다른 쪽 손엔 명품 가방)? 이젠 ‘더 로우’ 디자이너로서 더 이상 극단적 스타일을 추구하지 않지만, 그녀야말로 ‘홈리스 시크’라는 새로운 패션 개념을 정의하고 ‘버사이즈 룩을 입은 마른 여자’가 쿨해 보이게 만든 주인공. 가장 최근 디자이너들 사이에 각광받은 보헤미안 룩의 뮤즈는 플로렌스 웰치다. 빨강 머리에 모델처럼 길쭉한 몸매를 지닌 신비로운 뮤지션 역시 패션 마니아로 소문났다. “그래미상 후보가 됐을 때 아주 멋진 밝은 핑크빛 빈티지 라크로와 드레스를 입었어요. 큼지막한 어깨 패드도 달려 있었죠. 가끔 여동생이 만든 깃털 머리 장식도 함께 쓰곤 했어요.” 늘 로맨틱한 빈티지 옷에 마음을 뺏기는 웰치 스타일은 런던의 수많은 빈티지숍을 돌아다니면서 완성한 것이다.



기모노 스타일 재킷은 폴앤조(Paul&Joe), 크림색 랩 드레스는 이자벨 마랑(Isabel Marant), 디스트레스드 진은 쓰리섬 바이 제임스 진(3Sum by James Jeans), 어깨에 걸친 스카프는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 샌들은 셀린(Céline), 장소는 비슬로우 가로수길.

다시 돌아온 히피들의 행진 속에 <보그>는 ‘일상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히피 드레스 스타일링’을 기획했다. 이를 위해 모인 6명의 패션 피플 중 한 명인 정혜선 역시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를 시작한 후 빈티지숍이 유일한 쇼핑 장소가 됐다. 서울에서 모델로 일했던 그녀는 현재 파리에서 영화 미학을 공부하며 <보그 코리아> 파리 통신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복고풍의 화려한 프린트 드레스를 즐겨 입어요. 오늘은 이자벨 마랑의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고르긴 했지만요. 가장 좋아하는 건 옆에 길게 트임이 들어간 디자인으로 거칠고 큼지막한 가죽 봄버 재킷, 검정 스키니진, 워커 부츠와 함께 스타일링해요.” 이번 시즌엔 유럽 빈티지숍에서나 볼 듯한 보호 드레스들이(당신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줄!) 매장 곳곳에 걸릴 것이다. 하지만 출근하거나 친구를 만나러 나갈 때 당장 입을 만한 드레스를 찾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때론 실루엣이 지나치게 드라마틱하고 프린트가 너무 선명해 구식처럼 보이거나 시폰이 너무 얇아 속살이 비칠 정도니까. “히피들은 머리에 꽃을 꽂고 맨발로 다녔을 만큼 자유로웠죠. 일상에서 그들의 패션을 응용하려면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중화’가 필요해요. 거친 남성용 아이템을 매치하는 것도 그런 이유죠.” 그러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실내에서는 덥다는 핑계로 상의를 벗고 맘껏 즐길 수 있잖아요?”



페이즐리 무늬 드레스는 에트로(Etro), 바이커 재킷은 생로랑(Saint Laurent), 라이딩 부츠는 랄프 로렌(Ralph Lauren), 모자는 메종 미셸(Maison Michel at Rare Market), 장소는 클럽모나코 맨즈샵.

동시대 트렌드를 적절히 즐기는 <보그> 패션 에디터 손은영은 히피룩의 매력을 마음껏 즐기라고 조언한다. “오래전 밀라노에서 에스닉한 자수 장식 스모크 드레스에 롱부츠를 신은 여자를 본 적 있어요. 특별한 것 없이도 예뻐 보였죠. 그 후부터 히피 드레스를 입기 시작했어요. 저는 가리면서 살짝 보여주기보다, 가죽이나 모피, 데님 아이템을 매치해 텍스처를 다채롭게 연출하는 걸 좋아해요.” 그런데도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면적이 작은 것부터 시작하길 권한다. 페전트 블라우스, 미니 드레스, 맥시 드레스로 점점 넓혀가는 식. “흔히 야상이라고 부르는 필드 재킷과 함께 입으면 그야말로 70년대 반전운동에 참여한 히피족이 된 기분이 들죠. 주얼리는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간결한 디자인을 여러 개 겹치는 게 좀더 세련되고 동시대적으로 보입니다.”



주얼리는 모두 넘버링(Numbering), 레오파드 패턴 맥시 드레스는 이자벨 마랑(Isabel Marant), 그 위에 레이어드한 오버사이즈 자수 장식 톱, 꽃무늬 시폰 드레스는 모두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 장소는 빌라 수향.

요즘 SNS에서 가장 회자되고 있는 주얼리 브랜드 ‘넘버링’의 디자이너 김누리도 이에 동의한다. “길이가 서로 다른 가는 목걸이 여러 개를 겹치거나, 가늘고 심플한 반지를 열 손가락에 하나씩 껴보세요. 또 요즘은 귀도 여러 군데 뚫곤 하니까, 작은 귀고리를 여러 개 착용하면 모던 집시 분위기를 낼 수 있죠.” 이자벨 마랑과 드리스 반 노튼으로 변신한 그녀는 촬영을 위해 넘버링의 골드와 실버 주얼리를 섞어 보다 이국적이고 장식적인 느낌을 더했다.



맥시 드레스와 스웻셔츠는 모두 래비티(Rabbitti), 프린지 카디건은 쓰리섬 바이 제임스 진(3Sum by James Jeans), 슈즈는 본인 소장품, 장소는 메종 드 파팡.

반면 ‘래비티’ 디자이너 최은경의 옷차림 앞에선 고개를 갸웃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디자인한 래비티 의상은 ‘현대화된 보헤미안 룩’쯤으로 정의해도 될 것 같다. “직접적인 꽃무늬나 빈티지 분위기보다 현대적인 느낌이 가미된 디자인을 선호합니다.래비티 의상에서는 선명한 컬러 블록이 그런 역할을 하죠. 오늘 입은 맥시 드레스도 아이템 자체는 보호 스타일이지만, 검은색과 하늘색 조합이 동시대적이에요.” 그녀가 드라마틱한 드레스 위에 캐주얼한 스웨트셔츠(귀엽게도 네크라인에 해바라기가 수놓여 있다)를 입은 것도 같은 맥락. 서로 다른 요소들이 섞인 룩을 다양한 TPO에 두루두루 적용할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시폰 드레스는 럭키 슈에뜨(Lucky Chouette), 펠트 모자, 재킷, 데님 팬츠, 부츠는 모두 본인 소장품, 장소는 비슬로우 가로수길. 

도회적인 스타일을 논할 때 스타일리스트 김지혜를 빼놓을 수 있을까? 고준희는 그녀의 손에서 패셔니스타로 다시 태어났고, 까다로운 ‘톱모델’ 한혜진도 그녀의 스타일링에 군말 없이 따르는 건 잘 알려진 사실. 오늘 시티 히피를 컨셉으로 정한 김지혜는 생로랑 쇼에서 본 펠트 모자와 셀린 더블 버튼 재킷을 준비했다. 물론 모두 블랙. “도회적이면서 야성적인 분위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보헤미안 드레스에 근사한 테일러드 재킷을 걸치거나 데님을 더하는 식이죠.” 그녀의 시그니처 룩인 보이프렌드 핏 데님과 말쑥한 검정 재킷이 럭키 슈에뜨의 히피 드레스와 묘하게 어우러졌다. 그녀는 고준희의 개인 블로그에서 꽃무늬 드레스와 스웨트셔츠, 프릴 장식 실크 드레스와 스니커즈를 매치하거나 체크 패턴을 레이어링한 히피 스타일을 볼 수 있다고 살짝 귀띔했다. “히피 드레스를 고를 땐 프린트와 목선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게 관건입니다. 모네 작품 같은 한 폭의 풍경화가 프린트된 드레스는 아주 낭만적이에요. 여기에 목선이 깊고 넓게 파여 오프숄더로 입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죠.”



테일러드 재킷은 테일러블 포 우먼(Tailorable for Women), 아라베스크 무늬 칼럼 드레스는 발렌티노(Valentino), 앵클 부츠는 지니 킴(Jinny Kim), 장소는 테일러블 포 우먼.

남성 맞춤복 매장 ‘테일러블’의 여성복 매니저 미카를 촬영한 곳은 1월 중순 오픈 예정인 ‘테일러블 포 우먼’ 매장이다. 마무리 공사 중인 매장 2층 벽과 천장은 터키에서 수입한 이국적인 타일로 장식돼 발렌티노 칼럼 드레스의 아라베스크무늬와 더없이 잘 어울렸다. 그녀가 준비한 여러 벌의 맞춤 재킷 중 가장 기본적인 검정 재킷을 걸치자 업무 시간에 입어도 전혀 손색없는 룩이 완성됐다. “이대로 아침에 출근한 뒤 격식을 갖춘 저녁 모임까지 참석할 수 있겠어요. 재킷은 어깨에 걸치고 신발만 하이힐로 갈아 신으면 되니까요.” 매장에서 늘 단정한 팬츠 수트 차림이었다는 그녀는 펄럭이는 드레스가 꽤 마음에 드는 눈치다. 자신의 모습을 스마트폰에 담고 재잘거리듯 덧붙였다. “여성복 매장이 오픈하면 이런 스타일로 도 입을 거예요. 손님들에게 매장에서 맞춘 테일러드 재킷 스타일링으로 제안해줄 수도 있고요. 게다가 훨씬 여성스러워진 기분이에요!”

재킷과 히피 드레스의 합은 가장 쉽고도 효과적인 스타일링 공식이다. 조셉 알투자라는 봄 컬렉션에서 턱시도 재킷과 바닥까지 끌리는 티어드 드레스의 포멀한 조화로 이브닝 룩을 제안했다. 다리가 예쁜 편이라 미니 드레스를 선호한다면, 이자벨 마랑 스타일로 짧은 튜닉 드레스에 청키한 오버사이즈 카디건을 걸치면 좋다. 패션을 사랑하는 용자들에겐 스텔라 맥카트니의 과감하고 경쾌한 패턴 온 패턴을 추천한다. 패션뿐 아니라 정신까지 평화와 박애로 무장한 진정한 히피족들에겐 에디 슬리먼의 생로랑 그 이상의 선택은 없다. 프린지가 너울거리는 스웨이드 웨스턴 재킷, 양털 베스트, 느슨하게 걸친 스터드 장식의 두툼한 벨트와 얇고 긴 스카프로 장식한 자잘한 꽃무늬 시폰 드레스와 크로셰 드레스는 70년대 히피 뮤지션 패션의 가장 좋은 예니까.

바로 얼마 전까지 유행했던 90년대식 미니멀리즘에 길들여져 있는가? 하지만 봄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 보헤미안 드레스로 연출한 히피 룩이야말로 여자로 사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