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복 편집숍 전성시대

전 세계적으로 남자들이 패션계의 새로운 소비층으로 떠오른 지금,
서울의 젊은 남자들은 어디서, 어떤 옷을, 어떻게 쇼핑할까?
전성기를 맞은 남성복 편집숍 열풍 가운데 특별한 공간들.

“요즘 쇼핑할 만한 곳 어디 있어요?” 패션 에디터들이 가장 자주 듣는 질문들 중 하나다. 상대가 여자라면 대답은 비교적 쉽다. 좋아하는 스타일과 지갑 사정을 추측해 몇 가지 브랜드를 추천해주면 되니까. 취향에 따라 멀티숍들을 나열해도 좋다. 하지만 질문자가 남자라면 대답은 조금 복잡해진다. 우선 쇼핑을 취미처럼 즐기지 않는 남자들에겐 한두 개의 매장을 꼭 짚어 알려줘야만 한다. 누구나 알만한 H&M, 유니클로, 코스 등은 패션 에디터에게 바라는 답이 아니다. 그럴듯한 답을 위해선 그들의 평소 취향을 파악하는 게 먼저다. 수트를 즐겨입는 사람이라면 질 좋은 수트 매장이나 디자이너를 추천해야 하고, 지방시와 후드 바이 에어를 입는 사람들(이들에겐 쇼핑 어드바이스가 필요 없겠지만)이라면 분더샵이나 무이, 10 꼬르소 꼬모 등이 적절하다.

만약 좀더 캐주얼하고 평범한 스타일을 원한다면(하이패션에 목 매는 타입이 아니라면)? 까다로운 취향의 젊은 남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쇼핑 공간이라면 요즘 서울을 들썩이게 하는 남성 멀티숍이다. 바버샵, 잼스토어, 네버 그린 스토어, 비슬로우, 언노운 피플, 블루스맨, 웨얼하우스, 맨하탄스, 노클레임, 배럴즈 등등. 어딘지 모르게 영국 록밴드 이름을 닮은 이 매장들은 요즘 서울의 멋쟁이 남자들에게 인기 절정인 편집숍이다. 여기에 지방 곳곳(수원의 아이엠샵, 부산의 포트빌 등)까지 더하면그 목록은 더 늘어난다. 9년 전 문을 연 샌프란시스코 마켓과 므스크를 잇는 남성복 독립 편집숍에 전성기가 도래한 것!

샌프란시스코 마켓으로 시작된 이탤리언 트래디셔널과 테일러드 수트 열풍은 패션 문외한이었던 한국 남자들을 패션의 낙원으로 초대했다. 그 유행은 일명 ‘아메카지(아메리칸 캐주얼의 일본식 표현)’와 워크웨어(미국이나 영국의 작업복 브랜드에서 비롯된)로 이어졌다. “아메카지라는 유행 아래 비슷한 브랜드와 아이템을 파는 매장들이 늘어났습니다.” 남성지 <에스콰이어> 패션 에디터 권지원이 이런 경향에 대해 설명했다. “아메리칸 캐주얼은 어떤 스타일보다 대중적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숍들이 비슷비슷한 아이템을 진열할 수밖에요.” 많은 독립 편집숍들이 잘 팔리는 아이템 위주로 바잉하다 보면 결국 개성이 실종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유행에는 장점도 있다. 패션이라는 단어에 겁내던 남자들이 익숙한 듯 부담 없는 스타일에 마음을 열게 된 것이다.



압구정에 새로이 자리 잡은 오쿠스의 허민호와 강지숙.

이런 분위기 속에 ‘오쿠스(Ohkoos)’는 남성복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9년 전 ‘행루즈’라는 인터넷 쇼핑몰을 시작한 허민호와 강지숙은 이렇게 기억한다. “행루즈에서 옷을 사 입던 고객들이 새로운 것을 찾는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했던 아이템과 브랜드를 적극적으로 소개할 수 있었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오쿠스다. 그들은 사무실이 있던 수유역 근처에 쇼룸 겸 매장을 마련하고 손님들을 기다렸다. “수유역 인근의 어느 건물 지하에 있는데도 손님들이 꾸준히 찾아왔습니다. 20대부터 50대까지 ‘우리만 아는 가게’라는 생각으로 들러주셨죠.” 이렇게 성장의 성장을 거듭한 오쿠스는 지난해 가을 압구정동에 진출했다. 로데오거리 한복판에 번듯하게 마련된 매장에는 리얼 맥코이를 비롯, 일본식 ‘아메카지’ 브랜드와 모스 그린, 레이버데이 등 한국 브랜드들이 사이좋게 진열돼 있다. 두 시즌 전부터는 여성복 판매도 시작했다. 남자 친구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여자들의 방문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아메카지나 워크웨어, 아웃도어, 클래식 등의 특정 색깔만 추종하고 싶진 않아요. 고객의 취향이 바뀌듯 오쿠스의 취향도 바뀔 겁니다.”



스컬프와 아카이브를 이끌고 있는 원성진.

세월에 따른 취향의 변화가 전혀 새로운 숍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합정역 근처의 ‘스컬프(Sculp)’가 대표적인 예다. 이곳을 운영하는 원성진은 한정판 나이키 스니커즈와 슈프림에 열광하던 법대생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해외에서 구한 스트리트 패션 아이템을 한국에 소개하던 온라인 숍이 스컬프의 시작이다. 그러나 2011년에 모든 게 달라졌다. 자신의 취향이 변하면서 스트리트 대신 캐주얼과 트래디셔널 사이의 접점을 찾은 것. 해외 트레이드쇼에서 눈여겨본 브랜드와 아이템을 수입하는가 하면, 펜들턴, 쏘로굿, 샌더스 등 미국 정통 브랜드들의 한국 판매 대행까지 맡았다. “예전엔 남자들이 여자들을 의식해 옷을 사 입었다면, 요즘은 자신의 취향대로 옷을 사 입는 남자들이 확실히 늘었습니다.” 지금도 매장은 나이젤 카본의 파카와 배튼 웨어의 재킷을 사기 위한 멋쟁이 남자들로 붐빈다. 덕분에 두 번째 매장을 여는데 이어, 롯데 백화점과 함께하는 편집숍 ‘아카이브’의 디렉팅도 맡게 됐다. 한편 이스트로그, 레이버데이, 블랭코브, 올어라운드 셔츠 등의 한국 디자이너들을 해외에 소개하기 위한 에이전시도 차렸다. “스컬프라는 이름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웹사이트를 기획 중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으니까요.”



서프 코드에서 서핑을 알리는 세 청년, 김인섭, 황은민, 김선홍.

이렇듯 요즘 독립 편집숍들이 늘어난 이유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 심리도 포함된다. 맥아더 동상이 있는 인천 자유공원 앞에 마련된 서핑숍 ‘서프 코드(Surf Code)’의 시작이 그렇다. 고등학교 동창인 김인섭, 황은민, 김선홍은 자신들이 푹 빠진 서핑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서프 코드를 시작했다. 함께 서핑을 배우고, 영상을 보고, 서핑보드 제작을 공부하며 꿈을 키운 것. 그런 뒤 2년 전 보드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위해 공방을 마련했다. 또 지난해 서핑과 관련이 있는 패션 브랜드와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매장과 카페를 열었다. “아직 한국에서 서핑은 생소한 스포츠입니다. 그렇기에 먼저 그와 관련된 아이템과 브랜드를 소개하고 싶었어요.” 인천 토박이답게 고향을 베이스로 한 그들의 결단 역시 요즘 세대답다. “모든 게 서울에 있을 필요는 없지 않나요? 오히려 우리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고객들이 찾아온다면 이곳이 아지트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들은 여전히 2층 작업실에서 서핑 영상을 보며 바다를 꿈꾼다. 또 나무 가루를 날리고 서핑보드를 제작하며 메이드 인 코리아 서핑 브랜드가 되기를 바란다. 그들의 꿈을 동경하고 동의하는 팬들은 인터넷을 통해 열렬한 응원을 보내고 있다.



슬로우 스테디 클럽으로 새로운 서울의 명물을 탄생시킨 원덕현.

서프 코드처럼, 인터넷과 SNS가 없었다면 이런 숍들은 문을 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인터넷과 SNS를 통해 가장 화제가 된 공간은 삼청동 거리에 자리한 ‘슬로우 스테디 클럽(Slow Steady Club)’이다. 민첩한 서울 멋쟁이들은 앞다퉈 새하얀 건물을 찾아가 사진을 찍어 그 흔적을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블로그에 남겼다. 이 포토제닉한 공간은 가방 브랜드 ‘블랭코브(Blankof)’의 원덕현이 마련했다. 그는 67년에 지은 적산가옥을 보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었다. “제 관심사는 가방과 패션을 포함하는 다양한 디자인 카테고리입니다. 가구와 라이프스타일, 건축도 그중 하나죠.” 그는 먼저 건축가 이동욱과 의기투합했고, 이동욱은 패션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건축으로 옮겨왔다. 덕분에 LED로 장식된 파사드와 짜임새 있게 나눈 공간은 기존 숍과 달랐다. “건축부터 인테리어, 제품 패키지와 디테일에 모두 제 아이디어를 담고 싶었어요.” 2층 카페에 쓰이는 가구는 물론, 협업으로 완성한 패션 브랜드 ‘WITHMNW’, 베이식한 디자인이 일품인 ‘네이더스(Neithers)’ 역시 그의 손을 거친 결과물. “올해에는 슬로우 스테디 클럽을 브랜드로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독학으로 디자인을 공부한 원덕현을 서울 패션의 새로운 멀티 플레이어라고 불러도 좋겠다.



8년 동안 남성복 바이어로 일했던 팩 랫의 진경모는 새로운 컨셉의 매장을 열었다.

한편 친밀한 방식으로 패션과 디자인의 재미를 나누는 매장도 있다. 방배동 재래시장인 남부종합시장 골목 코너에 자리한 ‘팩 랫(Pack Rat)’은 패션 스토어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 칫솔과 스펀지, 핫팩과 종이 장난감, 페르시안 카펫을 닮은 마우스 패드 등을 살펴보면 아주 세련된 취향으로 편집된 잡화점에 가까우니까.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거창하게 느껴집니다. 그냥 제가 쓰고 입고 읽고 들었던 것들을 검증하고 소개하는 공간이 더 적절할 듯합니다.” 8년 동안 샌프란시스코 마켓에서 일했던 진경모의 얘기다. 그가 꿈꾸던 팩 랫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이다. 주민들이 지나가다 들를 수 있는 ‘동네 가게’인 동시에, 새로운 아이템을 소개할 공간. “제가 바잉하는 브랜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와이의 친구들이 전개하는 ‘퀄리티 피플스’, LA의 친구들이 운영하는 ‘에코 파크’ 등 마음 맞는 친구들의 브랜드를 다루고 있죠.” 문신이 인상적인 청년의 가게는 곧 성북동으로 옮겨 간다(방배동 주민들에게는 아쉬운 일이지만). “그곳에서도 또 즐겁게 일하고 싶어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며 말이죠.”

이렇듯 지난 5년간 서울 남성 패션 지도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지방시와 발렌티노를 즐기는 패션 골수들, 김서룡과 준지를 아끼는 국내 디자이너 팬들, 유즈드 퓨처와 스펙테이터에 열광하는 젊은 고객들까지 다양한 취향으로 차고 넘친다. 또 87mm의 디자이너 겸 모델인 김원중은 ‘킹원중’으로 불리며 수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노앙의 시티 티셔츠는 ‘짝퉁’이 탄생할 만큼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남자들이 지금껏 어디에 숨어 있었나, 싶을 만큼 다양한 스타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인기인 지금. 그리고 덕분에 남성복 편집숍은 최초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다시 첫 질문을 떠올려보자. “요즘 쇼핑할 만한 곳 어디 있어요?” 이제 이렇게 답해도 될 것 같다. “골라! 골라! 취향대로 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