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위한 최고의 색상, 레드

봄부터 무슨 레드냐고? 천만의 말씀! 이번 시즌은 무조건 레드다.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떤 레드를 어디에 어떻게 바를 것인가 뿐.

이번 시즌 레드는 무조건 주목해야 할 컬러가 됐다. 2015 S/S 백스테이지에서는 모델들의 눈, 입, 손끝이 온통 빨갛게 물들었다. “폭발하는 듯한 컬러, 피의 컬러, 스페인 투우장이 연상되는 컬러, 카네이션 컬러, 레드.” 스타일닷컴의 팀 블랭크는 돌체앤가바나 쇼를 보고 나서 이렇게 표현했다. 붉은 장미를 수놓은 의상을 입은 모델들은 머리에 붉은 장미를 꽂고, 버건디, 클래식 레드 립스틱을 바른 채 런웨이를 활보했다. 장 폴 고티에 쇼에서는 80년대식 과장된 레드 립을 만날 수 있었다. 섹시함과 대범한 붉은 입술과 부풀린 헤어스타일의 모델들은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를 떠올리게 했다. CH 캐롤리나 헤레나 쇼를 담당한 올란도는 좀더 현대적인 선택을 했다. “‘매혹적’이란 단어로 이 룩을 묘사하고 싶군요. 단 파라 포셋과 같은 과거의 글래머가 아니에요. 이건 새롭고 쿨하고 강인한 느낌이죠.” 버버리 쇼를 담당한 웬디 로웨는 강렬한 레드 립을 만들기 위해 ‘루비’라 불리는 버버리 뷰티 ‘립 디파이너 브릭 레드’를 엄청나게 사용했다고 말했다. “마치 모델들이 스스로 메이크업을 한 것처럼 보이길 원했어요. 아름답게 빛나는 ‘꿀피부’ , 그리고 단숨에 바른 듯한 레드 립. 짙은 붉은 장미를 연상시키는 꽤 진한 레드요. 그것이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듯한 피부와 무척 대비되도록 말이죠.” 반면 탑샵 쇼 케이트 펠란의 레드 립은 한층 발랄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소녀가 남친에게 키스하기 위해 머리를 옆으로 넘기는 컨셉이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소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그런 느낌 말이죠. 우린 바로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고자 했어요. 아주 쿨하지 않아요? 젊고 힙하죠.” 엠마뉴엘 웅가로 쇼에서는 매트한 오렌지 레드 립을 선택했고, 패션 이스트 에드 말러 쇼에서는 글로시한 버건디 립을 매치했다. 이렇듯 별다른 테크닉이 없어도, 여기저기 사용하지 않아도 레드는 컬러 그 자체로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래서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레드에 대해 물으면 봇물 터지듯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그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뮤즈는 단연 마릴린 먼로다. “레드 립에서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뛰어넘을 수 있는 아이콘은 없을 겁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박태윤이 말했다. 손대식도 맞장구를 쳤다.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등 레드 립과 마릴린 먼로는 떼놓고 말할 수 없죠. 80년대에 마돈나가 60년대 먼로 스타일을 따라 했을 때도 전혀 촌스럽지 않았어요. 당시 <트루 블루>라는 앨범으로 한창 활동 중이던 마돈나는 곱슬거리는 금발에 헤어밴드를 하고 레드 립을 바른 입가에 점을 찍은 채 수많은 곡을 히트시켰죠. 비슷한 시기에 영화 <스트리트 오브 파이어>에서 레드 립에 과감한 튜브톱을 입고 머리를 돌리며 춤추고 노래하던 다이안 레인의 모습도 엄청 충격적이었어요. TV 시리즈 <다이너스티>의 조안 콜린스도 잊을 수 없죠. 파워 숄더 의상에 볼드한 액세서리, 붉은 입술과 볼륨 헤어는 당시 미국적인 부의 상징이었죠.”

우리 모두 레드 립이 관능적인 이미지를 부여한다는 것엔 이의가 없을 것이다. 특히 마릴린 먼로와 마돈나는 당대 최고의 섹스 심벌이었다. 하지만 레드는 그렇게 심플하지 않다. 붉은 입술은 자신감, 강인함의 표상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사진가 헬무트 뉴튼의 사진 속 여성들은 하나같이 붉은 입술을 하고 있다. 패션 에로티시즘의 선두 주자인 헬무트 뉴튼은 섹시한 여성을 포르노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는데, 섹스 심벌로서가 아니라 남성보다 더 액티브하고 파워풀한 여성이 모티브였다. 그래서 그의 사진 속 여자들은 관능적인 동시에 자신만만하고 강하다.

그러나 레드가 강하고 섹시한 이미지만은 아니다. 클래식 레드, 특히 푸른빛이 섞인 차가운 레드는 지적이고 우아하다. “도회적이며 차갑고 냉소적이지만 지적인 레드의 양면성을 잘 표현하는 컬러죠. 만약 밝은 피부톤을 강조하면서 지적으로 보이고 싶다면 이만한 컬러도 없습니다. 특히 매트하게 바른 클래식 레드는 여성에게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와 자신감을 불어넣죠.” 손대식의 말에 메이크업 아티스트 홍현정은 “가장 보편적이면서 유행을 타지 않는, 격조 있는 상류사회의 컬러가 바로 레드”라고 덧붙였다. 영화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가 리처드 기어에게 선물 받은 붉은 드레스를 입고 루비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목에 걸며 활짝 웃었을 때, 붉은 입술의 그녀는 갈라 디너에도 어울리는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 <피에타>의 헤로인으로 레드 카펫을 걷던 조민수도 마찬가지. 당시 맥 ‘립스틱 루비우’를 바른 그녀의 레드 립은 클래식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아직까지도 베스트 룩으로 회자될 정도다.

그렇지만 가장 강렬한 레드 컬러는 역시 버건디 아닐까. “강하고 퇴폐적인 이미지죠. 19세기 프랑스 데카당스 같은 느낌이랄까요. 담배 연기 자욱한 살롱, 작은 입술 위에 버건디 레드를 바른 여자와 그녀의 연인인 또 다른 남장 여자. 상상만으로도 짜릿하네요!” 홍현정의 말에 손대식이 맞장구를 쳤다. “그냥 붉은 장미가 아니라 흑장미라고 할까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도발적인 컬러죠. 그래서 버건디 레드는 나보다 더 매력적인 누군가를 이기고 싶을 때, 혹은 과감해 보이고 싶은 날, 남들에게 존재감을 확실히 어필해주는 색상이죠. 과거 존 갈리아노가 디올 디자이너였을 때의 쇼를 떠올려보세요. 사교계 여왕처럼 보일 수도 있고, 치명적인 매력의 창녀처럼 보일 수도 있죠.”

브라운 레드는 또 다른 이야기다. “뉴욕의 겨울 아침, 무릎까지 오는 모직 스커트와 롱부츠를 신은 여자가 립스틱을 바르고 커피와 베이글을 사서 바삐 출근하는 이미지죠.” 홍현정은 브라운 레드는 성숙하고 지적이며 세련된 느낌이라고 강조했다. 한 가지 함정은 자칫 잘못 바르면 나이 들어 보인다는 것. 그렇다면 반대로 가장 발랄한 느낌의 레드는? 맥 수석 메이크업 아티스트 변명숙 팀장은 주저 없이 오렌지 레드를 꼽았다. “한국 여자들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컬러로, 동양인의 피부를 가장 환하게 밝혀줍니다. 동시에 트렌디한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죠. 지금 레드 트렌드를 주도하는 건 오렌지 레드니까요.” ‘롤리팝 캔디를 입에 물고 있는 틴에이저’란 홍현정의 비유처럼 발랄하고 경쾌한 느낌. 그래서 오렌지 레드는 쾌활하면서 활동적인 느낌을 연출하며 어두운 피부에도 잘 어울린다.

입술뿐만이 아니다. 이번 시즌 레드는 눈가와 손끝에서도 대활약을 펼쳤다. 아이 메이크업 컬러로서의 레드 역시 복잡 미묘하면서 강렬하다. 막스마라 쇼에서는 오렌지 레드 컬러로 캐츠아이 라이너를 선보였고, 미드햄 키르초프 쇼에서는 인디언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레드 아이라인을 선보였다. 피터 솜 쇼와 패션 이스트 에드 말러 쇼에선 눈 앞머리에 레드 포인트를 줬다. “눈에 붉은 색상을 바르면 <친절한 금자씨>?”라는 당신은 구세대. 지금 젊은이들 사이에선 눈가에 레드 포인트를 주는 것을 ‘도화살 메이크업’이라 부르며 인기 만발이다. <보그> 뷰티 어시스턴트도 그중 한 명. “눈에 레드 섀도를 바르면 좀 묘한 느낌이 들어요. 어쨌든 브라운 계열 컬러보다 훨씬 자극적이고 매력적이죠. 특히 버건디 컬러가 인기예요.” 그런데 남자들은 싫어하지 않을까. “엄청 좋아하던데요? 눈길이 간대요. 꾸밀 줄 안다는 느낌도 들고요. 물론 진하게 바르면 무서워하는데 눈 끝 삼각존에 살짝 바르면 예쁘다고 하더군요.”

레드 네일이야말로 확실한 선택이다. “여자를 여자답게 하는 최고의 컬러!” 네일 아티스트 최진순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이자 사진가인 나스와 ‘15X15’ 작업을 함께 했는데, 특히 레드 립과 레드 매니큐어를 바른 마크 제이콥스와의 작업에서 레드 컬러의 파워를 절감했다고 말했다. “레드만큼 여성성을 드라마틱하게 드러내는 색상이 또 있을까요? 촬영에 사용된 어떤 요소보다 반짝거리고 강렬한 레드 컬러는 순식간에 마크를 변신시켰죠.”

레드의 이미지와 쓰임새, 스펙트럼은 이처럼 넓다. 지난달 맥에서 출시한 톨레도 컬렉션은 여섯 가지 레드 립스틱으로만 구성돼 있는데, 콜라보 작업에 참가한 디자이너 이자벨 톨레도는 각각 다른 톤의 레드는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강조했다. “전 레드 립을 사랑해요. 자신감에 불을 붙이고 여자에게 힘을 주는 색상이니까요. 붉은 입술로 미소 지으면 한결 로맨틱해 보이고, 우아하면서도 유머 감각이 있는 여자처럼 보이죠. 톨레도 컬렉션 중 ‘테너 보이스’ 같은 선명한 클래식 레드는 순수한 섹시함, 사랑스러운 미소에 대한 찬사를 담고 있어요. 비비드한 오렌지 레드인 ‘바비큐’는 마치 여름철 토마토 같은 느낌이죠. 여름날의 피크닉을 떠올리게 한달까요? ‘빅토리아나’ 같은 푸른빛이 도는 레드는 왕족이죠. 이름 그대로 빅토리아 시대를 연상시키는 위풍당당함이 담겨 있죠. ‘오페라’ 같은 다크 레드는 올 봄과 여름 제가 매일 바르고 다닐 립스틱 컬러죠. 격식을 갖춘 장소에선 충분히 우아하고 나의 데이 룩을 환하게 밝혀줄 만큼 충분히 사랑스럽거든요. 여러 가지 레드를 그날그날 기분과 날씨에 따라 즐겨보세요. 만약 재미를 더하고 싶다면 두 가지 다른 톤의 레드 립스틱을 위아래 입술에 제각각 발라보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