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법 유감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법안이 쏟아진다.
장그래법, 김부선법, 작명 실력도 그럴듯하다.
하루아침에 대량 생산되어 패스트푸드점의 햄버거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배달되는 법들,
문제는 없는 걸까?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하루아침에 새로운 법안이 생겨난다. 패스트푸드점의 햄버거만큼이나 빠른 속도다. 어린이집 아동 학대 사건만 해도 그렇다. 네 살짜리 여자아이가 보육 교사로부터 폭행당하는 장면을 담은 CCTV 영상은 끔찍했다. 모두가 분노했다. 다음 날부터 관련 법안이 쏟아져 나왔다. 어린이집 CCTV 설치 의무화, 개인 자격 어린이집 신규 설립 금지, 아동 학대 발생 어린이집 영구 퇴출 등 그렇게 하루가 멀다고 생겨난 법안이 무려 스물네 개다. 뒤늦은 외양간 수리다.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겠다는 뜻일까? 국회의 법 공장은 요즘 2교대, 3교대를 돌리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중이다. 어린이집 사건뿐만이 아니다. <미생>의 장그래가 “열심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안 해서인 걸로 생각하겠다.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세상으로 나온 거다”라고 독백하자 정부는 비정규직 사용 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늘리겠다는 장그래법을 뚝딱 내놓았다. 장그래의 의견 따윈 물론 중요치 않았다. 요즘은 모든 게 그런 식이다. 신해철 사망 사건 후엔 의료법 개정안이 등장했고, 김부선 폭행 사건은 주택법 개정안을 탄생시켰다. 웬만한 초등학교 학급 회의도 이보다 빠르게 진행되긴 힘들 것이다. 이쯤 되면 평소 사회, 정치 문제에 관심 없던 사람이라도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누구를 위한 ‘1일 1법’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은 죄다 ‘추진할 예정이다’, ‘제도적 틀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본격 논의된다’ 등의 표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다. 아직 법전에 오르지 못한 대기 법안이란 뜻이다. 그 양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19대 의원들이 발의한 법률안은 2년 만에 8,041건을 기록했다. 16대 1,912건, 17대 6,387건, 18대 1만2,220건과 비교하면 상당한 숫자다. <당신을 위한 법은 없다>의 저자 박영규와 류여해는 국회의원들이 법안 발의에 열을 올리는 이유를 “의정 활동 평가 항목에서 법안 발의 실적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국회는 법안 발의 숫자와 가결 건수에 따라 우수의원상을 지정하고 있다. 법제실에 근무했던 저자는 청소년 범죄가 증가해 형사상 미성년자 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던 시절에 있었던 일을 예로 들었다. A의원실에서 미성년자 연령을 13세 미만으로 하자는 법률 개정안 의뢰가 들어오자 같은 날 B의원실에서도 동일한 내용의 법안이 들어왔다. 이미 해당 내용이 들어왔다고 말하자 B의원실에서는 즉석에서 12세로 나이를 수정했다. 일종의 쇼다. 이미 폐기된 법안을 재활용하는 경우도 흔하다.

햄버거 패티 굽는 시간보다 빠르게 만들어진 패스트 법안은 상임위 심사를 거친 후, 국회를 통해 찬반 투표를 거쳐야만 진짜 법으로 탄생할 수 있다. 하지만 빨리빨리 만들어진 법안은 폐기율도 동시에 높였다. 지난 18대 국회의 법안 폐기율은 자그마치 82.2%에 달한다. 50%에 불과하던 90년대와 비교하면 엄청난 상승률이다. 19대 의원이 내놓은 법안 중 가결되거나 수정된 사례는 약 10%에 불과하다. 넘쳐나는 질 낮은 법안 중에서 실제 법으로 통과되는 비율이 낮다는 점을 가리켜 불행 중 다행이라 말할 수 있을까?

여론의 질타에 후다닥 내놓은 패스트 법안은 배고플 때 적당히 한 끼 때우기 좋은 패스트푸드만큼의 역할을 하고 사라진다. 당연히 영양가는 떨어진다. 때로는 부작용도 발생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청소년보호법 개정안’, 이른바 ‘강제적 셧다운제’다. 2010년 인터넷 게임에 중독돼 생후 3개월 된 딸을 굶겨 죽인 사건이 발생하자, 게임 중독을 막기 위한 법안이 우수수 발의되었다. 국회는 자정부터 오전 6시까지 만 16세 미만 청소년의 게임 접속을 강제 차단하는 ‘셧다운제’를 재빨리 통과시켰다. 그러자 성인 주민등록번호 도용 등 새로운 범죄가 생겨났다. 청소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법안이라는 목소리도 높았다. 자녀의 교육권을 부모로부터 빼앗고 있다는 청원까지 줄을 이었다. 결국 정부는 지난해 9월 셧다운제를 사실상 폐지했다. 다행히 국회를 통과하진 못했지만 최진실이 세상을 떠난 후 등장한 ‘사이버 모욕죄’도 단군 이래 가장 부끄러운 법안으로 꼽힌다. 수백 년 전, 세종대왕도 세금 부과 여부를 두고 국민투표를 실시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국회의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는 듯하다.

물론 좋은 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사회적 이슈가 터지고,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이에 국회의원과 정부가 순식간에 법안을 발의하는 사후 약방문식 일련의 과정은 여야의 의견 차이나 관련 단체의 압박으로 공중에 붕 떠 있던 법안에 종지부를 찍게 하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 원동력은 대중의 지지와 공감대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사건의 해결 방안으로 법안을 발의하는 것은 공론의 장에서 논의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긍정적 측면도 있어요.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에 관한 법, 일명 ‘김우중법’이 좋은 예죠. 국민적 여론이 비등해지자 만들어진 경우인데, 잘 성안되었다고 봅니다.” 이름을 밝히길 원치 않는 한 국회의원의 보좌관이 말했다.

하지만 패스트푸드의 황홀한 맛이 재료의 본질을 숨기듯,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재빨리 던진 법안은 문제의 핵심을 흐린다는 불편함이 여전히 남는다. 2월 2일부터 한 달 간 열리고 있는 이번 임시국회에선 어린이집 아동 학대 근절 대책을 CCTV 의무 설치로 굳힐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이건 이미 2013년에 발의된 법안이다. 당시 보육 교사의 인권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해 유보되었다. CCTV 의무 설치가 임기응변처럼 보이는 이유다. 이번에도 국회가 보육 교사의 근로 환경 개선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할 시간은 한참 모자라 보인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뉴스가 전달되는 시간은 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반응도 즉각적이다. 법안이 그에 속도를 맞추는 건 당연한 흐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속력을 높인다고 해서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단 올바른 방향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순식간에 쏟아지던 그 많은 예비 법안은 다 어디로 갔을까? 당장의 허기를 달래주는 햄버거보다 정성 들인 한끼 식사가 그리운 건 밥 먹을 때만이 아니다. 생존의 문제를 넘어 인간다운 삶을 위해선 영양가 높은 제대로 된 법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