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스스로 빛을 내는 다섯 모델 이야기

2016.03.17

by VOGUE

    스스로 빛을 내는 다섯 모델 이야기

    화려한 조명 아래 멋진 포즈로 빛을 발하는 패션모델.
    그 조명이 꺼진 후에도 스스로 빛을 내는 모델들이 있다. 자신들의 재능과 노력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는 다섯 명의 모델 이야기.

    파리 카페에서 만난 정혜선. 데님 재킷과 타조 깃털 베스트는 루이 비통(Louis Vuitton). 장소 / 르 까보 뒤 팔레(Le Caveau du Palais)

    Jeong Hye Seon

    정혜선은 파리 생활을 이렇게 표현했다. “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임시 거주지에 머무는 기분이에요.” 파리3대학에서 영화미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녀는 오늘도 영화 이론가이자 프로그래머인 니콜 브레네즈(Nicole Brenez)의 영화 프로그래밍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4년 전만 해도 서울의 스튜디오에서 셔터 소리에 맞춰 포즈를 바꾸던 모델이었다. 2007년 겨울 <보그>의 신인 모델 화보로 데뷔한 그녀는 중성적인 마스크에 강렬한 포즈가 잘 어울리는 모델이었다. 그런 그녀가 모델 일을 그만두고 파리로 떠난 건 갑작스러운 결정이 아니었다. “원래 불어불문을 전공했어요. 그래서 영화든 패션이든 파리 유학을 떠나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죠. 소문내지 않고 유학을 준비해 떠나기 3개월 전 통보했어요. 다들 농담으로 여겼죠.” 그런 무덤덤한 성격 덕분에 파리 적응도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시골에서 살다가 서울에 올라와 화려한 패션계로 뛰어든 모델 시절이 더 낯설었던 것 같아요.” 다행히 그녀는 비슷한 관심사와 열정적인 친구들을 찾았고, 새로운 사고 방식과 환경에 금방 익숙해졌다. 공부하고, 글을 읽고, 이미지를 접하고, 또 이 경험을 해석하는 일이 잘 맞았던 것이다. 물론 또래 친구들이 한국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는 것을 보면 부러울 때도 있지만, 아직은 유학생이자 국외자로서의 불안함이 더 마음에 든다. 현재 <보그> 파리 통신원으로도 일하는 그녀는 아주 바쁜 1월을 보냈다. 파리에서 진행된 <보그> 3월호 화보 촬영을 위한 프로덕션 일에다 <보그 리빙> 취재, 파리 공방 취재, 디자이너 인터뷰 등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섰다. 3월호 패션 화보 ‘A Romantic Wonderer’의 모델로 직접 나선 것. “카메라 앞에선 촬영을 즐길 겨를이 없었는데, 호텔로 돌아와 스태프들과 함께 결과를 보니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가발을 쓰고 메이크업한 모습을 사진으로 본 현지 친구들의 반응도 재밌었죠!” <보그> 통신원이라는 명함은 학생 신분인 그녀에겐 작은 이벤트 같았다고 그녀는 전한다. “모델로 일하면서 친분을 쌓은 사람들과 여전히 공유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가장 즐거워요.”

    화이트 레이스 톱과 가죽 패치워크 미니 드레스는 루이 비통(Louis Vuitton), 카푸치노 컬러 바이커 재킷은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앵클부츠는 이자벨 마랑(Isabel Marant).

    Jang Su Im

    지난해 9월 1일부터 장수임은 ‘프로듀서’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출근한 지 이제 5개월 7일째예요”라며 장수임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모델 일만 알고 지내던 그녀가 비로소 회사원이 된 것이다. 사실 모델 이후의 삶을 고민한 건 그전부터였다. 그림을 그리거나 구두 디자인을 배운 것도 모델 이후의 삶을 찾는 과정이었다. “사진을 배워보라는 조언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1년 전 우연히 친구 부탁으로 뮤직비디오를 감독한 적이 있었어요.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더군요.” 모델을 캐스팅하고 스태프들을 구성하고 컨셉을 정하고 또 음악에 맞는 장면을 구성하는 일은 그녀에게 꼭 맞았다. 하지만 당장 새로운 일에 뛰어들 용기는 없었다. 일단 1년을 예상하고 친구 정혜선이 있는 파리로 떠났다. 파리에서의 삶에 익숙해질 때쯤 자신이 소속된 모델 에이전시 에스팀으로부터 최후통첩이 날아왔다. “당장 서울에 와서 출근하라는 내용이었죠. 그 명령이 마지막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4개월 만에 돌아오고 말았어요.” 8월 31일 서울에 도착한 그녀는 바로 다음 날부터 에스팀 영상 팀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처음 맡은 프로젝트는 아디다스 오리지널스와 에스팀 모델들이 함께 만든 영상. 모델들을 정하고 장소를 헌팅하고 콘티를 정하고 스토리를 구성하는 일이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모델 경험이 많아서 진행은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물론 중간중간 ‘멘붕’에 빠지는 일은 있었지만요. 결과는 만족스러웠어요!” 대부분의 직장인이 그렇듯,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나면 곧장 다음 프로젝트가 등장하기 마련. 지금도 브랜드와 함께 만드는 영상과 ‘에스팀TV’를 위한 영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오전 10시 30분까지 출근해 오후 7시 30분까지 일하는 저를 보면 다들 놀라워해요. 사실 저 스스로도 신기해요. 하지만 내일이면 5개월 8일째 직장인 장수임이에요.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진짜 ‘프로’가 되어 있겠죠?”

    제일기획의 AE로 일하는 이금영. 테일러드 재킷은 김서룡(Kimseoryong), 크리스털 장식 스웨터는 펜디(Fendi), 플레어 팬츠는 셀린(Céline), 키튼힐은 프라다(Prada).

    Lee Geum Young

    요즘도 패션 기자들은 모델 이금영을 자주 떠올린다. 흠잡을 데 없는 비율, 까무잡잡한 피부에 소녀의 순수한 마스크를 지닌 그녀는 기자들이 유난히 아끼던 모델이었다. 하지만 이태원의 제일기획 로비에서 만난 이금영은 더이상 앳된 소녀가 아니었다. 코스 회색 헤링본 코트를 입고, 스키니진에 싸이하이 부츠를 신은 채 셀린 백을 든 모습은 커리어 우먼 그 자체였으니까. “제일기획 AE로 일한 지 이제 만 2년이 지났네요.”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여대생 이금영은 우연한 기회에 모델이 됐다. “평범한 직업을 가질 거라 여기던 부모님은 당황하셨지만 딸의 결정을 존중해주셨죠.” 그녀 스스로도 만족스러웠다. “화보를 찍고 패션쇼 무대에 서는 일이 아주 즐거웠어요. 매일매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신선했죠.” 하지만 갑자기 불안이 엄습한 건 모델 일을 잠시 쉬고 파리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직후였다. “친구들과 대학 동기들은 어느새 취업을 준비하고 새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어요. 저도 빨리 다음 단계를 찾아야 할 것 같았죠.” 그런 계기로 지원한 곳이 광고 회사의 인턴 자리였다. “신문방송학 중에서도 PR과 마케팅에 관심이 많았어요. 한번 해볼까 했는데, 저와 진짜 잘 맞았죠.” 광고주부터 함께 일하는 동료와 스태프 등 다양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고, 매일 터지는 사건을 긴박하게 해결하는 광고 대행사 AE가 그녀 안의 ‘해결사 본능’을 이끌어낸 것. “정말 다이내믹해요. 하루도 긴장을 풀 수가 없으니까요.” 물론 완전히 모델 일을 잊은 건 아니다. 친하게 지내는 모델 이현이나 강승현이 꾸준히 일하는 모습이나 패션 화보를 볼 때면 패션이 선사하는 짜릿한 판타지가 그립기도 하니까. “그래서 꼭 제가 필요하다면 패션쇼에 서기도 하고 촬영도 하고 싶어요. 물론 회사의 허락을 받아야 하죠. 예전에는 모델이 제 일상이었다면 이제 일탈이 된 셈이죠.”

    <매거진 B>의 에디터로 일하고 있는 남보라. 레이스 톱과 남색 스틸레토 펌프스는 디올(Dior), 검정 스모킹 재킷은 생로랑(Saint Laurent), 데님 팬츠는 A.P.C.

    Nam Bora

    “매장 반납하고 오느라 좀 늦었어요.” 남보라는 촬영일 오전에 ‘매장 반납’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촬영용 샘플이 없을 경우, 기자들이 매장에 진열된 상품을 빌려와 촬영한 뒤 반납하는 것을 보통 ‘매장 반납’이라 부르곤 한다. 그것만 봐도 남색 트렌치 코트에 편안한 신발을 신고 나타난 그녀는 이미 잡지기자로서의 삶이 익숙해 보였다. 그녀가 <매거진 B> 기자로 일하기 시작한 건 1년 반 전부터. 그 소식에 놀라는 패션계 사람은 별로 없었다. 모델로 활동하던 시절에도 <오보이> 매거진의 객원 기자로 일했고, <맵스>의 스타일리스트로 가끔 활약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잡지 매체를 워낙 좋아했어요. 모델 일도 즐거웠지만, 그 뒤의 일이 더 궁금했죠. 주변에 패션지 어시스턴트로 시작해 현재 기자로 일하는 친구들도 있었고요.” 스무 살에 시작한 모델로서의 삶에 스스로 커튼을 내리고 ‘회사원’으로 변신한 셈이다. 물론 처음부터 모든 것이 쉽진 않았다. 10년을 프리랜서로 자유롭게 살던 그녀에게 매일 아침의 출근과 1년에 열두 번 돌아오는 마감이 익숙하진 않았을 테니까. “친구들끼리 장난으로 ‘모델 미생’이라고 말하곤 해요.” 하지만 그녀는 전직 덕분에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패션이라는 도시에서 모델로 살다가 이제 완전히 새로운 도시로 이사 온 기분이에요. 패션을 벗어나 다른 세상을 접하고, 예전과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다른 지식을 쌓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고 있어요.” 하나의 브랜드를 뿌리까지 탐색하고 소개하는 <매거진 B>의 특성상 업무 강도는 높지만, 그 안에서 자신의 가능성과 새로운 흥미 대상을 발견해가는 그녀다. “모델이 제 인생의 시즌 1이었고, 현재가 시즌 2라면 언젠가는 시즌 3도 오겠죠? 하지만 지금으로선 시즌 2가 그저 즐겁기만 해요.”

    지현정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는 멀티숍, 믹샵. 프린트 블라우스와 붉은 재킷은 해프닝(Happening at Mixop), 화이트 스커트와 부츠는 디올(Dior).

    Ji Hyun Jeong

    지난해 6월 멀티숍 ‘믹샵’의 오픈 파티에서 만난 지현정은 꽤 상기된 표정이었다. 에스팀의 새로운 프로젝트로인 ‘믹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변신한 그녀는 기대와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믹샵의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약 6개월이 지난 뒤 다시 만난 그녀는 차분하게 경험한 것을 이야기했다. “생각만큼 즐겁고 잘 맞는 게 있는가 하면, 생각처럼 잘 안 되는 것도 있더군요.” 2002년 모델로 데뷔한 뒤 12년이 넘도록 모델로 살아온 그녀에게 믹샵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모델들 가운데 유난히 패션 그 자체를 즐기던 그녀가 멀티숍 하나를 통째로 맡는 일은 새하얀 도화지에 색칠을 하는 것처럼 기대로 가득한 일이었다. 스스로를 어떻게 꾸미느냐가 아닌, 고객들에게 어떤 옷을 소개할지 결정하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었으니까. 믹샵이 직접 디자인한 ‘컴포트3’나 모델 조민호와 여혜원이 ‘참스’와 함께한 캡슐 컬렉션은 예상보다 훨씬 반응이 좋았어요.” 100% 한국 디자이너의 컬렉션을 소개하는 만큼 다양한 디자이너들을 만나는 것도 지현정의 몫이다. “지난 시즌에는 뉴욕 패션 위크를 참관했어요. 예전에 패션쇼를 볼 때는 모델들의 워킹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면, 이제는 디자이너들이 아이디어를 어떻게 전개하는지, 컬렉션의 전체 구성은 어떻게 이뤄졌는지 살펴보게 됐어요.” 생각보다 어려운 점은 회사원으로서의 책임감이었다. 그녀와 함께 일하는 팀을 꾸리는 동시에 상사들에게 보고해야 하는 중간 관리자로서의 일상이 익숙하지 않았던 것. “모델 일을 할 때면 저만 생각하면 됐어요. 제가 맡은 일만 잘해낸다면 누구도 제게 책임을 묻지 않았죠. 하지만 이제는 제 동료와 팀원, 그리고 회사 전체를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성장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요.” 그렇다고 모델이라는 타이틀을 완전히 내려놓고 싶진 않다고 고백한다. “패션의 경계 안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 일에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해요. 패션은 너무 빨리 변하니까요. 그 안에서 변화를 캐치하는 것도 분명 제 업무 중 하나죠.”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손기호
    포토그래퍼
    CHA HYE 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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