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우아한 세계

2016.03.17

by VOGUE

    우아한 세계

    패션계만큼 스펙터클한 동네도 없다.
    롤러코스터 같은 우리네 일상에도 분노 호르몬 분비를 촉발시키는 ‘갑질’이 존재한다는 사실.
    갑질인 듯 갑질 아닌 갑질 같다 하여 ‘갑썸설’이라 불리는 패션계의 웃픈 에피소드.

    모두의 머리 꼭대기에 앉은 듯 거만하고 경우 없는 갑질은 패션계에도 존재한다. 복잡한 시퀸과 자수 장식의 이국적인 톱은 드리스 반 노튼(at Boon The Shop), 금색 스커트는 로샤(at Boon The Shop), 금색 스커트 안에 입은 메시 소재 플레어 스커트는 노케제이, 스타킹과 가터벨트, 손잡이에 스와로브스키 스톤이 장식된 채찍은 아장 프로보카퇴르, 장갑은 에르메스, 신발은 스튜어트 와이츠만. 

    현대백화점 VIP 사건, 땅콩 회항 사건 등 어찌나 ‘갑질’이 유행인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온라인 뉴스 제목도 내용과 상관없이 ‘갑질’은 필수 수식어(혹은 낚시성)다. 분야를 막론하고, 패션계에서 이토록 핫한 최신 유행을 못 본 척하는 건 극악무도한 범죄. 더 이상 상냥할 수 없고, 더 이상 매너 좋을 수 없는 패션계에는 어떤 갑질들이 존재할까? 모두가 서로 얽히고설킨 이 바닥에선 갑질도 먹이사슬처럼 돌고 돈다. 기자는 홍보 담당자에게 갑질, 홍보 담당자는 광고 팀에게 갑질, 매장 스태프는 협찬 받으러 온 어시스턴트들에게 갑질, 좀 떴다 하는 모델은 기자와 에이전시에 갑질, 잘나가는 연예인은 어디서든 갑질, 연예인의 스타일리스트는 자기가 연예인인 양 갑질. 우스갯소리로 패션계 을 중의 을은 강남 일대에 거미줄처럼 퍼진 쇼룸과 홍보 대행사, 스튜디오 위치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어리바리 신입 퀵 서비스 아저씨라는 말이 돌 정도다. 원래 갑을 관계란 계약서에서 계약 당사자를 순서대로 지칭한 것에서 유래했으나, 주종이나 우열, 권력 관계가 작용하면서 갑은 군림하고 을은 비위를 맞추는 ‘갑을 문화’로 자리 잡게 된 것.

    퀵 아저씨 다음으로 패션계 대표적 을이라 할 수 있는 건 외줄 타기 재주를 부리듯 광고주와 기자 사이에서 양쪽의 요구와 비위를 맞춰야 하는 홍보 대행사다. “사실 이제는 일상이라서, 딱히 갑질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죠.” 패션 홍보 대행사 팀장 S는 경험한 것 중 가장 자극적이고 강력한 갑질을 고백하라는 부추김에 더 이상 털릴 영혼조차 없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즘은 온라인 매체와 블로거들까지 상대해야 하니까요.” 이어질 사건 사고 내용들은 취재원 보호를 위해 익명을 유지하겠지만, 이 바닥에서는 누구나 듣고 겪은 공공연한 비밀임을 미리 밝히는 바다. 코스메틱 브랜드에서 가장 파다한 케이스는 ‘협박 및 갈취’. 모 일간지 기자는 천연 성분이나 독특한 원료를 사용하는 브랜드에 보이스피싱을 하는 걸로 유명하다. “저 외국에서 논문 발표한 적도 있는 전문가예요. 천연 성분, 천연 성분하는데 진짜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겠죠. 본사 발칵 뒤집는 기사 한번 써드려요?” 물론 성분에 따라 협박의 버전도 조금씩 다르다. “내 말은, 이 성분이 유전학적으로 안 좋을 수 있다고요. 내가 박사 학위가 있다니까 그러네.” 영문도 모르고 당한 PR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목적은 그렇다, 화장품이다. “그러니까 내가 한번 써봐야겠다고요. 회사로 한 박스, 집으로 한 박스 보내세요, 지금 당장!” 뷰티 홍보녀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인인 이 기자에게 대응하는 최선의 방법은 ‘옛다 먹고 떨어져라’는 심정으로 서둘러 시제품을 보내주는 것.

    그러나 누군가에겐 이조차도 징징대며 떼쓰는 아이처럼 귀엽게 봐줄 만한 수준이다. 과거 주얼리 브랜드를 담당한 적 있는 홍보녀는 방한한 본사 CEO 인터뷰를 취소당한 경험에 대해 털어 놨다. “우리나라에서 딱 두 매체만 인터뷰를 하기로 했어요. 물론 취재 방향을 달리했고, 사전에 두 매체에 모두 동의를 얻었죠. 그중 한 매체의 기자는 원래 이 분야에 대해 잘 모르는 분이라, 사전에 관련 자료들을 모두 정리해놓은 외장 하드까지 챙겨 들고 회사로 찾아가서 궁금해하는 건 전부 답해드렸어요. 그리고 인터뷰 당일이 됐죠. 인터뷰 시간이 10분 정도 지체될 것 같아서 미리 전화를 드렸더니, 그럼 30분을 더 내놓으라는 거예요. 다음 인터뷰 스케줄이 이어져 있어서 그건 어려울 것 같다고 하자, 갑자기 다른 매체 인터뷰에 대해 전혀 들은 바가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며 저를 몰아세우기 시작하더라고요.” 짐작 가는 바, 그 기자는 타 매체 인터뷰에 대해 미리 편집장에게 알리지 않은 거였다. 당일 그 사실을 알게 된 편집장이 노발대발하자, 어떻게든 다른 매체 인터뷰를 취소시키기 위해 수작을 부린 것. “00씨, 지금 뭐가 더 중요한지 감이 잘 안 오나 본데요.” 단독으로 취재하겠다, 다른 매체의 기사는 일주일 뒤에 나가게 해라, 그렇지 않으면 인터뷰 장소에 가지 않겠다는 등 말도 안 되는 요구에 패닉 상태에 빠진 홍보녀는 결국 상사와 의논해서 그 매체와의 인터뷰를 취소하는 걸로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으니, 편집장에게 입장이 곤란해진 기자가 모든 잘못을 홍보녀에게 뒤집어씌우며 본인 대신 편집장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회사로 찾아가서 편집장에게 사과하고, 그 기자분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죄했어요. 그제야 ‘00씨 그동안 한 게 있어서 이쯤에서 끝난 줄 아세요’라고 하더군요. 전 아직도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대체 제가 무슨 실수를 한 거죠, 네?” 

    그러나 브랜드 파워가 막강할 때는 아주 드물게 입장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손꼽히는 모 패션 하우스는 몇몇 매체에는 샘플 협찬을 하지 않는다. 이유는 이러하다. “우리 옷을 사 입는 고객들은 그런 잡지는 안 보거든요.” 혹은 자비를 베풀어 조건부 협찬을 하기도 한다. 전문 모델이 등장하는 패션 화보로, 한 페이지에 해당 브랜드의 컬렉션 룩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착장 그대로 입는 경우다. 모델이 등장하지 않는 페이지에 제품만 촬영하는 건 금기 사항이다. “기자님, 제가 재킷만 따로 촬영하는 식의 아이템 촬영은 안 된다고 몇 번 말했을 텐데요.” 그 기자는 유력한 매체로 옮기고 나면 그 브랜드 옷을 제 맘대로 찍겠노라 이를 갈았다고 전해진다. “제일 유명한 모델한테 입혀서, 항상 상체만 잘라서 촬영할 거야. 두고 보라지, 하하하!”

    그러나 패션 기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은 매장 스태프들이다. 우리들의 머릿속에 갑질이라는 단어와 동시에 떠오르는 건 매장 협찬을 하러 간 우리를 퀵 아저씨보다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그녀들의 냉소적인 눈빛이다. 그 눈빛! 개장 시간에 맞춰 협찬을 받으러 간, 요즘 한창 뜨는 일본 디자이너 브랜드의 백화점 매장에는 오전 10시 반부터 멋쟁이 중년 여자 손님 두 명이 정신없이 신상을 입어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손님인 줄 알고 살갑게 다가오던 매니저는 매장 픽업을 왔다는 말에 얼굴 표정이 싹 바뀌어 본체만체. “어머, 이건 안 돼요.” 옷을 고르자마자 태클이 들어왔다. “이건 한 피스밖에 안 남았는데.” 또 다른 옷을 고르자 대여섯 평 남짓한 매장 안에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건 지난달 잡지에 너무 많이 나왔는데. 또 찍게요?” 난감해하는 기자를 앞에 세워두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녀의 잔소리를 듣고 있자니, 백화점 카탈로그를 찍으려고 여기 온 건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잘 안 팔리는 걸 찍어줘야 우리도 파는 데 도움이 되죠. 이거랑 이거 재고 많이 남았는데 이거 가져가지 그러세요?”

    요즘 새롭게 떠오른 갑은 팬덤을 몰고 다니는 준연예인급 패션모델. 뜨고 나니 태도가 바뀌었다는 아이돌처럼, 언니 누나 하며 따르던 패션쇼 디렉터와 기자, 사진가들을 전부 아랫사람 취급한다며 다들 혀를 끌끌 찬다. “1년에 두 번 있는 서울 패션 위크 백스테이지에서 절실히 느끼곤 하죠.” 모 기자는 신인 시절, 병아리처럼 자신을 따르던 때를 떠올리며 그 모델이 이젠 너무 커버렸다고 씁쓸해했다. “예전에는 카메라만 들이대면 열심히 포즈를 취하곤 했어요. 요즘엔 카메라가 구름 떼처럼 몰려드니까, 귀찮아하더라고요. 지난 시즌엔 ‘어디서 나왔어요?’라며 직접 사진가의 표찰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포즈를 취하는 걸 보곤 경악하고 말았어요.” 촬영장에서의 태도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젠 직접 물 한 컵 갖다 마시기에도 귀하신 몸이 돼버렸다. 변심한 모델에게 상처받은 기자는 최근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경험해야 했다.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저 목말라요’라고 하는데, 나한테 물을 갖다달라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목이 마르다는 사실을 내게 알리고 싶은 건지 순간 너무 헷갈리는 거예요. 늘 직접 물을 갖다 마시던 아이였거든요. 대체 어떤 의미로 한 말이었을까요? 혹시 형이상학적인 숨겨진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요? 아아, 전 아직도 모르겠어요!”

    패션지의 광고 영업직 사원들도 고성과 욕설을 감내하며 광고주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줄 때도 있다. 몇몇 연예인들은 화보 촬영 중에 기분이 울적하다는 이유로 갑자기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이처럼 전형적인 갑질도 일어나지만, 입장에 따라 갑질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정당하다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한 크고 작은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 그러다가도 뒤돌아서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둘도 없이 친한 사이가 되는 곳 또한 이 바닥. 갑질인 듯 갑질 아닌 갑질이 패션계라는 우아한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송보라
    포토그래퍼
    CHA HYE KYUNG
    모델
    정호연
    스탭
    헤어 / 오종오 메이크업 / 강석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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