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정욱준의 안식처

북서향으로 비치는 오후의 빛이 일품인 데크와 거실. 이곳에서 정욱준은 반려견 주니와 함께 느긋하게 휴식을 취한다. 연회색 페인트로 칠한 몰딩 장식의 벽, 뱅갈고무나무 등을 비롯한 초록 식물, 브랜드 이름으로 제작한 준지 향초, 그리고 필립 스탁과 톰 딕슨 등의 조명 등이 그의 안식처를 구성하고 있다.

북서향으로 비치는 오후의 빛이 일품인 데크와 거실. 이곳에서 정욱준은 반려견 주니와 함께 느긋하게 휴식을 취한다. 

향, 빛, 식물, 그리고 반려견… 자신만의 안식처에서 동고동락하기 위해 이만한 요소가 또 있을까.
디자이너 정욱준 이 까무잡잡한 말괄량이 주니와 함께 머무는 마당 넓은 집.

“맹모삼천지교 아시죠?” 두 살 반이 된 ‘주니’를 위해 이사했다고, 늘 그렇듯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상냥한 목소리로 정욱준이 농담처럼 얘기했다. “트랙을 맘껏 질주하듯 주니가 신나게 뛸 수 있도록 마당 있는 집을 원했어요.” 몸무게 3.5kg으로 성장한 주니는 정욱준이 3년째 동고동락하는 반려견이다. 2년 전 <보그 리빙>을 위해 우리가 들렀던 정욱준의 집은 한강이 내다보이는 전형적인 아파트였다. 당연히 정원은커녕 베란다도 없었다. 그로 인해 주니는 늘 거실과 방에 검은 털을 휘날리며 뛰어다닐 수밖에. 그때 주니는 태어난 지 반년이 막 지난 시기였지만, 이제 매력적인 ‘소녀’로 성장해 봄이 오길 누구보다 기대하는 눈치다. 파릇파릇한 정원에서 꽃과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기 위해(주니를 위해 정욱준은 데크를 길게 연장했다).

정욱준은 ‘감’이나 ‘촉’이 예민하게 발달한 디자이너다. 취재할 때마다 그가 현재 꽂히기 시작한 어떤 것에 관해 듣는 건 트렌드 예측에 도움이 된다. 15년쯤 전에 그는 공간 향에 대해 설파했고, 그 후로도 가든과 조명 예찬이 차례로 이어졌다. 게다가 얼마 후면 서울에서 그가 얘기한 것이 하나의 현상이 되는 걸 여러 번 경험했다. 그가 몇 년 전부터는 흙, 땅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정욱준이 드디어 1층 정원이 딸린 전망 좋은 집으로 옮겼다. “작년 11월 말쯤 이곳으로 옮겨 겨울을 보냈습니다. 이제 처음 맞이할 봄이 아주 기대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나무를 직접 심고 가꿀 수 있으니까요.” 사시사철 푸른 대나무, 여름의 향긋한 허브 등은 이미 그의 마음 한가운데 쑥쑥 자라는 중. “또 어디선가 이름 모를 씨앗이 날아와 이 정원에 꽃을 피우겠죠?”

다리아 워보위 화보 사진을 액자로 만들어 벽에 걸고 나니 몰딩 도어나 블랙 식탁 세트와 어우러져 모던한 조화를 이룬다.

다리아 워보위 화보 사진을 액자로 만들어 벽에 걸고 나니 몰딩 도어나 블랙 식탁 세트와 어우러져 모던한 조화를 이룬다.

사실 패션이든 예술이든 창의적인 일에 종사하는 인물들을 보면, 결정적 순간에 자연과 식물이 있는 곳으로 숨길 원한다. 그런 면에서 드리스 반 노튼은 앤트워프 외곽에 7만3,000평(24만1,322㎡)이 넘는 정원을 18년간 가꾸고 있다. 또 진태옥은 유엔빌리지에 있는 젠 스타일의 집 정원에서 오붓하게 수선화를 키우며 휴식을 취한다. 정욱준 역시 그런 기대로 충만하다. “패션이 재미있고 흥분되는 일인 건 분명해요. 하지만 그만큼 피곤한 것도 사실이죠. 그럴 때마다 숨고 싶은 나만의 안식처를 원했어요.” 그래서 이렇듯 주니와 집에 머물며 나무를 가꾸는 거라고 그는 블랙 페키니즈를 꼭 끌어안으며 이야기한다. 아울러 디자이너의 업무가 평소 손과 머리를 자주 쓸 수밖에 없기에 집에서 쉴 때도 늘 녹색식물을 만지작거리게 된다고 털어놓는다. “동식물이 잘 자라는 집이 있다고 하죠? 제가 사는 집이 그래요. 하하!” 알록달록한 꽃보다 푸른 이파리가 더 끌린다며 자신의 컬렉션이나 매장엔 늘 청록빛이 포함된다고 덧붙인다(지난 1월에 발표한 16번째 파리 컬렉션은 ‘카키’가 주제였다). 아닌 게 아니라 거실에는 관음죽, 뱅갈고무나무, 무명씨 등은 물론, 1만5,000원에 구입한 손바닥만 한 고사릿과 식물이 이제 열 배나 자라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었다. 초록 식물들은 연회색 벽과 이국적인 몰딩 장식을 배경으로 놓인 채 모던한 ‘씬’을 보여준다. “처음엔 좀더 짙은 회색을 원했어요. 하지만 집이 북서향이라 오후에 더 멋진 빛이 들더군요. 오후의 짙고 풍부한 자연광엔 연회색이 더 적절할 것 같았죠.” 오후의 빛과 연회색의 교차 속에 톰 딕슨, 필립 스탁, 마르탱 마르지엘라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톰 딕슨은 여러 디자인을 한꺼번에 걸곤 하지만 저는 14.1인치만 원했어요. 또 필립스탁 중에도 ‘로지 안젤리스’만 좋아하죠. 마르지엘라 플로어 램프 역시 마르탱이 일하던 시기에 구입한 것들이죠.” 공간을 둘러보면 정욱준이 주니, 향, 식물 다음으로 꽂힌 게 조명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낮은 테이블에 놓인 캔들홀더 역시 빛과 향이 어우러진 무라노 유리공예품 못지않게 예술적이다. “파리에 가면 마레 지구에 늘 머무는 듀오 호텔이 있어요. 호텔 옆 인테리어 매장에서 획득한 겁니다.” 그러면서 주니가 돌아다니며 깨뜨리지 못하도록 한쪽으로 치웠다. “유리가 너무 얇아 몇 번 깨뜨린 적이 있거든요.” 사실 패션 피플들은 해외 대도시의 감각적인 호텔에서 인테리어나 데커레이션 아이디어를 얻곤 한다. 눈썰미와 손재주가 발달한 그들은 부티크 호텔은 물론 5성급 호텔이나 리조트에 머물며 발견한 솔깃한 것들을 나만의 것으로 응용하는 데 선수. 정욱준 역시 런던 샌더슨 호텔에서 본 커튼에 대한 기억을 6년 넘게 간직하다 드디어 구현했다. “매끈하게 표면 처리한 흰색 오간자 커튼 뒤로 조명이 비치는데 꽤 인상적이었죠.” 그 잔상은 거실과 침실, 서재의 대형 통유리창을 덮어씌우는 데 일조했다. “호텔 커튼과 가장 비슷한 원단을 서울에서 결국 찾았습니다!”라며 자신이 원하는 건 언젠가 이루고 만다는 흡족한 표정으로 그가 얘기했다.

각각 침실, 서재, 부엌 전경. 모노톤으로 일관성 있게 연출된 정욱준의 감각적 인테리어가 특징이다.

각각 침실, 서재, 부엌 전경. 모노톤으로 일관성 있게 연출된 정욱준의 감각적 인테리어가 특징이다.

한편 거실과 뻥 뚫린 다이닝룸엔 벼루를 연상시키는 검고 육중하고 딱딱한 나무 식탁과 의자가 길게 놓여 있다. 정욱준은 이를 두고 ‘식탁이 거실로 들어온 시대’라고 표현했다. “굳이 거실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할 필요는 없어요. 가령 친구들이 놀러 왔다면, 저는 다이닝룸에 앉아 간단히 샴페인을 마시거나 책을 보며 거실을 바라볼 수 있죠. 다이닝룸과 리빙룸이 통합되는 추세입니다.” 부엌 역시 격자형 몰딩 도어를 설치해 가리듯 노출한 구획 덕분에 시각적으로 개방된 느낌. 맞춤 제작한 식탁 겸 책상에는 정욱준이 유칼립투스 가지들을 듬성듬성 꽂아 완성한 근사한 꽃병이 톰 딕슨의 빛을 받아 그가 내놓은 페리에와 알싸한 풍경을 연출했다.

리빙룸과 다이닝룸을 사이에 두고 좌우는 각각 서재와 침실이다. 서재에는 그가 전에 살던 집에서 식탁으로 쓰던 테이블과 의자를 가로로 놓았다(“솔직히 이곳에서 뭐 대단하게 업무를 보는 건 아니에요”). 한쪽 벽은 딱 맞게 다이닝룸의 테이블과 같은 재질의 검정 책장을 맞춰 끼워 넣었다. 서재 맞은편 침실엔 침대와 식물과 자그마한 협탁이 전부(“사실 침실이 필요 이상으로 넓어서 좀 휑하죠”). 아직은 겨울이라 인조 모피 침구세트가 침대를 덮고 있지만 곧 봄맞이 데코 변신이 있을 거라고 슬쩍 귀띔한다. “파리 편집매장 ‘메르시’에 가면 잉크 블루 컬러나 샛노란 침구들이 눈에 확 들어올 때가 있어요. 가끔 그런 색깔이 봄바람처럼 분위기를 환기시키곤 하죠.”

정욱준은 2년쯤 머문 아파트를 뒤로하고 비로소 유엔빌리지의 마당 넓은 집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한때 오피스텔에 머물 때 침대와 더불어 유일한 가구였던 길쭉한 테이블은 어엿하게 데크를 차지하는 것으로 승격됐다. 봄이 되면 정욱준은 데크 앞에서 주니의 질주를 보며 나무를 심을 예정이다. “언젠가 중정이 있는 집에서 주니와 머물고 싶어요. ㅁ자 건물의 1층 주거 공간은 최대한 작게, 대신 2층엔 길게 발코니를 마련해 위에서 내려다보면 주니가 뛰어다니다 저와 눈이 마주쳐 까만 꼬리를 흔들겠죠?” 바야흐로 아디다스가 먼저 협업을 제안하고 파리와 뉴욕은 물론 런던과 일본의 일류 백화점에서 옷이 팔리는 정욱준에게 그 장면 역시 머지않아 연출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