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나면 달라지는 패션 브랜드 이름

자고 나면 달라지는 패션 브랜드 이름.
패션 세상에서는 하루아침에 MMM이 MM이 되고, YSL이 SLP로 둔갑한다.
대관절 상표명이 바뀌는 이유가 뭘까?

지난 1월 12일 오후 5시가 임박한 시각. 런던의 어느 사무실 건물에 패션 셀럽들이 속속 도착했다. 미국 <보그>의 안나 윈투어, 파리 <보그>의 엠마뉴엘 알트, 랑방의 알버 엘바즈, 버버리의 크리스토퍼 베일리, 그리고 케이트 모스 등등. 자타가 공인하는 패션계 거물들이 모인 이유는 존 갈리아노의 귀환을 지켜보기 위해서다. 4년 전 인종차별 발언으로 디올은 물론 패션계에서 떠나야 했던 그가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데뷔쇼를 발표하는 날. 그들은 갈리아노만의 로맨틱한 감성과 마르지엘라 하우스의 개성이 절묘하게 어울린 꾸뛰르 컬렉션에 기립 박수를 보내며 패션 천재의 귀환을 환영했다.

하지만 이 역사적 현장을 지켰던 100여 명의 관객들 중 마르지엘라 하우스의 가장 큰 변화를 눈치 챈 사람은 별로 없었다(마르지엘라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이 쇼 직전 올린 사진을 보며 뭔가 색다른 점을 눈치챘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눈썰미를 칭찬할 만하다). 새하얀 의자 위에 놓인 초대장 속에 숨겨진 비밀은 바로 브랜드 창립자인 마르탱 마르지엘라에서 마르탱을 쏙 뺀 채 ‘Maison Margiela’라는 이름만 남아 있었다는 것. MMM으로 불리던 브랜드가 하루 만에 MM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이틀 후 <뉴욕타임스>의 추궁에 브랜드 관계자는 이렇게 답했다. “이름의 변화는 하우스의 진화를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들어본 스토리 같지 않나. 3년 전, 패션계를 들었다 놨다 했던 화제의 YSL 이름 사건 말이다. 이브 생 로랑 가문에 들어선 에디 슬리먼이 느닷없이 라벨의 이름을 ‘생로랑 파리’로 바꾸겠다고 선언하자 패션계는 지옥 불에 떨어진 듯 대혼란에 빠졌다. “내게는 영원히 이브 생 로랑이다. 전설을 존중하라!” “YSL이 아닌 이브 생 로랑은 있을 수 없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는 ‘좋아요’ 대신 ‘싫어요’가 넘쳐났고, 일부 광팬들은 자신의 의견을 전 세계 네티즌들과 공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1966년 꾸뛰르만 고집하던 이브 생 로랑이 처음 기성복을 시작하며 선택한 이름이 ‘생 로랑 리브 고쉬’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던 슬리먼의 의견은 큰 동의를 얻지 못했다. 모든 논란이 잠잠해진 후 <베니티 페어> 인터뷰에서 에디 슬리먼은 이브 생 로랑이 꾸뛰르 고객들이 아닌 젊은 여성들을 고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브랜드 이름을 교체했던 사실을 예로 들며 자신도 새로운 세대를 유혹하기 위해 브랜드 이름을 바꾸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고 해명했다. 어르신들 말씀처럼 시간이 약일 때가 있다. 당시 인터넷을 통해 에디 슬리먼을 성토하던 이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잠잠해졌고, 오히려 새 이름에 익숙해진 팬들이 급속도로 늘었다. 3년 전에 “방금 YSL 매장에 다녀왔어”라고 말하던 이들이 이제 “생로랑 부츠 죽이지 않아?”라고 말하게 된 것.

브랜드 이름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일은 흔치 않지만, 창립자 사망 후엔 이름을 떼버리고 성만 남기는 방법은 오랫동안 패션계에서 이어지고 있는 전통 중 하나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발렌시아가로, 코코 샤넬이 샤넬, 지아니 베르사체가 베르사체로 변했듯이. 또 구찌오 구찌는 구찌, 프라텔리 프라다는 프라다로 축약되지 않았나. “디자이너의 첫 번째 이름을 쓰지 않는 것은 브랜드의 영속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최근 ‘FashionMag.com’ 인터뷰를 통해 밀라노-비코카 대학의 패션 마케팅 교수인 살보 데스타가 설명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브랜드 이름에 새 생명을 더하게 됩니다. 게다가 단순한 이름은 좀더 쉽게 알아볼 수 있고 거울부터 향수까지 모든 제품에 실용적으로 쓰이죠.”

이름의 변화는 때로 타성에 젖은 브랜드에 신선함을 더하기도 한다. 1년 전 자신의 세컨드 라인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의 지휘권을 영국 듀오인 케이티 힐리어와 루엘라 바틀리에게 넘긴 마크 제이콥스는 디자이너의 교체만큼 획기적인 변화를 원했다. “저는 그 이름이 싫었습니다!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걸 모두에게 알렸죠.” 그리하여 마크가 고안한 이름은? 브랜드의 두문자만 따서 완성한 MBMJ. 패션계는 새로운 선택에 만족함을 표했다. MBMJ가 반복해 등장한 양말과 구두, 옷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말이다. 또 3년 전 아크네는 뒤에 Studios를 덧붙여 아크네 스튜디오로 공식 명칭을 바꿨다. “고백하자면, 처음부터 아크네라는 이름이 싫었어요. 하지만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 바꾸기 어려웠죠.” <보그 코리아> 인터뷰를 통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조니 요한슨은 이름 변경의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데 남미, 아시아 등 우리가 처음 진출하는 국가에 이미 아크네라는 브랜드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고민 끝에 이름 뒤에 ‘스튜디오’를 붙였습니다. 스튜디오라는 개념은 우리와 잘 어울렸죠.” 사실 말이 쉽지 브랜드가 이름을 바꾸는 건 개인이 법원에 개명 신청을 하는 것만큼이나 복잡하다. 당시 인터뷰를 위해 찾았던 스톡홀름 본사에는 새로운 브랜드 이름에 어울리는 로고 그래픽 시안들로 가득했다. 요한슨은 그 과정을 이렇게 전했다. “모든 게 바뀌어야 해요. 크기부터 간격, 그리고 폰트까지!”

가장 최근에 개명을 신청한 디자이너는 크리스토프 르메르. 지난 1월 중순 파리 남성복 패션 위크에서 그는 앞으로 ‘Lemaire’란 이름으로 활동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자신의 오랜 파트너인 사라-린 트랜과의 공동 작업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모든 것을 좀더 확실하게 한 채 새로 시작할 시간으로 여겼습니다. 성(姓)만 사용하면서 우리가 디자인 듀오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죠.” 그림자 속에서 르메르와 함께해온 트랜 역시 이렇게 말했다. “팀워크로 일한다는 것을 알리는 이름입니다. 이름은 하나지만 조금 덜 개인화됐다고 할 수 있죠.”

다시 마르지엘라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아직까지 브랜드 홈페이지와 공식 쇼핑 사이트는 ‘Maison Martin Margiela’라는 주소와 로고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비교적 개명이 쉬운 SNS 계정은 어느새 ‘Maison Margiela’로 간결해졌다. 그렇다면 2009년 자신의 브랜드를 떠난 브랜드의 창립자는 이 변화를 어떻게 지켜볼까. 지난해 갈리아노 영입 소식이 들렸을 때 마르탱 마르지엘라는 이 결정에 대해 절대적으로 찬성한다고 밝힌 적 있다. 그러니 자신이 만든 브랜드에서 본인의 이름 중 하나가 사라졌다고 마음이 상하진 않을 것 같다. MMM이든 MM이든 마르지엘라 하우스의 건승을 가장 원하는 인물은 마르탱 마르지엘라 자신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