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2016.03.17

by VOGUE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생로랑, 셀린, 더우로, 돌체앤가바나의 공통점?
    멋쟁이 할머니가 쭉쭉빵빵한 연예인과 모델을 자빠뜨리고 광고를 점령했다는 사실.
    덕분에 새파란 젊은이들이 식상해 보이기 시작했다!

    “젊어 보이게 늙다가 그대로 확 죽고 싶다!” ‘헉’ 소리 날 만큼 무시무시한 말은 누구 입에서 터져 나온 걸까. 할리우드에서 나이 먹어가며 엄마 배역으로 밀리는 데미 무어(62년생)나 니콜 키드먼(67년생)? 여전히 성도착증적 사진 촬영을 감행하며 새 앨범을 낸 마돈나(58년생)? 누군가의 자살 기도나 유서의 한 대목이 아니다.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아프니까 청춘이다>의 김난도 교수가 센터장)에서 ‘트렌드 코리아 2015’를 위해 조사하던 중 취합된 실제 발언이다. 55년부터 63년 사이 출생한 베이비붐 세대 중 신세대 멋쟁이 할머니들이 주인공!

    그들이 목격한다면 기립 박수든 물개 박수든 노동당 박수든 몇 시간 동안 받게 될 인물들이 패션 중심가에 출현했다. 이번 시즌 셀린 광고의 기똥찬 마케팅으로 꼽히는 데 일조한 조안 디디온, 이에 필적하는 생로랑의 조니 미첼. 신사 숙녀 여러분, 2015년 첫 시즌을 위한 오프닝 모델들을 소개한다! 아시다시피 조니는 70년대 최고의 여성 포크 가수다. 또 조안은 미국 <보그> 기자 출신 작가로 유명하다. 최근 피비 파일로가 꽂힌 인물인 데다 젊은 시절 그녀의 옷차림이나 스타일이 셀린 이미지에 영향을 끼치는 중. 그렇다면 젊어 보이게 늙다가 그대로 확 죽고 싶다던 신세대 할머니들이 두 여인 앞에서 흥분할 만한 이유? 미첼은 71세, 디디온은 미첼보다 거의 열 살이 많은 80세라는 사실. 그들은 각각 에디 슬리먼과 유르겐 텔러의 뷰파인더 앞에 툭 앉아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시간에 의해 조각된 용모는 우리 시대 모든 아름다움을 전복시키고 말았다는 평.

    두 사진이 SNS에 뜨고 난 뒤 한동안 온라인은 두 여인의 얼굴로 도배됐다. 그러자마자 이날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인물들이 두더지 게임처럼 얼굴을 내밀었다. 먼저 1921년생 아이리스 아펠 여사님부터. 앨버트 메이슬리스 감독의 다큐멘터리에 주연으로 출연하는가 하면, 올봄 알렉시스 비타 광고를 위해선 1996년생 슈퍼 블로거 타비 게빈슨과 함께 떡하니 촬영할 정도. 이 할머니로 치면 꼼데가르쏭의 그 유명한 2차원 드레스 차림으로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 표지에 나왔고, 몇 년 전 메이크업 브랜드 M.A.C의 수많은 협업 중엔 아이리스 아펠 컬렉션도 있다. 저널리스트, 디자이너, 컨설턴트 등이 아펠 여사의 업무라는 걸 감안한다면 그녀의 정체는 일종의 패션 뮤즈, 혹은 스타일 아이콘쯤 될까. 한편 돌체앤가바나 광고에는 시칠리아나 스페인 출신이 분명한 익명의 할머니 세 명이 찬조 출연했다(2009년 9월호 미국 <보그>의 젬마 워드, 릴리 콜이 멋쟁이 할머니들과 찍은 ‘그래니 시크’ 화보가 떠오른다).

    자, 이쯤 되면 스킨케어 구루로 통하는 린다 로댕 여사가 입장할 때가 됐다. 몇 시즌 전 카렌 워커 선글라스 광고에 나오더니, 얼마 전엔 쌍둥이 올슨 자매의 더 로우 룩북 모델로서 카리스마를 보여준 인물. 게다가 라스트 네임에서 짐작했다시피 ‘Rodin’ 코스메틱의 안주인이다. 모델과 스타일리스트로 일한 뒤 실버 블론드와 군살 없는 몸매, 곱상한 얼굴 덕분에 당대 젊은 여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중(이런저런 블로그에는 “꼭 저렇게 늙을 테야!”라는 다짐의 콘텐츠 제목들이 수두룩하다). 작년 쯤 영국 보그닷컴 인터뷰를 통해 그녀는 자신에게 늘 따라다니는 나이에 관해 이렇게 전했다. “나는 66세가 늙었다고 여기지 않아요. 이쪽 문화에서는 26세도 늙은 듯 여겨질 때도 있죠. 패션과 뷰티 쪽에서는 내가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좀더 넓은 시각에선 결코 그렇지 않아요.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스스로를 훨씬 젊게 느끼는 친구들도 많거든요.”

    당대 패션 삽화가로 통하는 도날드 드로버슨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린다, 조니, 조안, 아이리스 네 분의 사진을 한 컷으로 편집해 올리며 이렇게 선언했다. “Old is The New Black!” 이런 은빛 바람을 민첩하게 감지한 미국 보그닷컴 역시 “이런 현상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라고 흥분했다. “자신의 나이를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는 시대 불변의 스타일을 갖춘 여자가 되는 것보다 멋진 일이 또 어디 있나!” 그러면서 새로운 시류에 동참한다는 차원에서 다음 시즌 브랜드와 모델의 광고 짝짓기를 심심풀이로 기획했다. 이를테면 랑방과 카르멘 델로피체(1931년생), 알렉산더 맥퀸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1926년생), 루이 비통과 키키 스미스(1954년생) 등등. 여러분이 선정한 짝꿍을 뒤에 잇는다면? 모르긴 몰라도 앤 드멀미스터와 패티 스미스(1946년생)라는 준비된 대답부터 튀어 나올 듯. 오, 이토록 영적인 아름다움의 ‘백발미녀전’!

    이렇듯 패션계에 고요히 은빛 혁명을 일으키는 여사님들을 뵙고 있자니, 5년 전 작고한 루이즈 부르주아가 떠올라 숭고한기분마저 든다. 90년대 말 헬무트 랭 광고에 모델로 출연했을 때 말이다(대형 남근상을 팔꿈치에 끼거나 검은 왕관을 쓰고 지면 광고에 등장하는가 하면, 랭 패션쇼에서는 그녀가 부르는 자장가가 BGM으로 쓰였다). 1911년 성탄절에 태어났으니 그녀가 광고를 찍을 때가 80대 후반. 그러고 보니 셀린과 조안의 협업이 이와 같은 맥락인 듯싶다. 피비 파일로가 랭의 90년대 유산에 당대 경향을 덮어쓴 뒤 여성성을 절묘하게 곁들여 재가공하는 데 재미들렸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 관점에서 피비가 조안을 섭외하고 영감을 얻는 것 역시 랭과 부르주아의 밀월과 영락없이 닮았다.

    물론 몇몇 광고에 멋쟁이 할머니들이 모델로 출연했다는 사실만으로 패션계에 갑작스럽게 방문한 어르신들이 실세가 됐다고 단정하는 건 아니다. 생각보다 더 많은 영역이 그들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쇼윈도 13개를 시몬 로샤나 마텐 반 더 호르스트 같은 야심만만한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제공하던 영국 셀프리지스 백화점은 정초부터 나이 지긋한 14명에게 쇼윈도를 할애했다. 그들로서는 패션과 이별할 시기에 패션과 예술과 함께 인생을 다시 시작한 셈이다. “정초엔 새로운 것과 다가올 유행에 초점을 맞추는 게 전통입니다”라고 셀프리지스 관계자는 설명했다. “이번에 우리는 그것을 뒤집기로 했죠!” 또 평균 80세 여인 6명의 기막힌 옷장들을 다룬 2013년 영국 다큐멘터리 <Fabulous Fashionistas>에 관해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작년에 EBS에서 방송되고 책으로도 발간된 사진가 아리 세스 코헨의 ‘Advanced Style’ 프로젝트 역시 반향을 일으켰다.

    이런 시대상 속에 어느 라디오 채널은 ‘트렌드 코리아 2015’의 목록 가운데 유난히 ‘어반 그래니’만 콕 집었다. “세련된 우리 할머니들이 소비의 한 축으로 떠올랐다”고 보도한 것. 아울러 비만이나 피부 관리부터 여성 질환 예방을 위한 5060 전용 토털 에스테틱 숍이 대세라고 덧붙였다. 또 ‘아웃도어 회춘 효과’ 덕에 아웃도어 브랜드들이 돈 좀 벌고 있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 롯데백화점은 매년 60대 이상 고객의 매출 구성비가 증가해 작년 1~11월 기준, 10%를 넘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올해 트렌드 골자로 ‘SCALE’을 제시했는데, 이 가운데 ‘E’는 ‘Elder Surfer’, 다시 말해 온라인과 모바일 쇼핑을 적극 활용하는 은빛 세대를 지칭한다(지난해 기준 50대의 스마트폰 사용률은 절반에 달한다).

    보시다시피 베이비붐 세대를 향해 또다시 세상의 눈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특히 맹목적으로 젊음만 찬미하던 패션 세상에서 그들만의 전성기가 도래한 것. 뻔한 말이지만, “젊음이라는 건 나이보다 마음의 상태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조셉 알투자라는 <NYT>에 전했다. 패션계가 늘 목을 매는 20대의 젊음과 지금 들고 일어선 어르신들을 바라보며 건넨 말이다. 그 어르신들의 “나는 젊어 보이게 늙어가다 그대로 확 죽고 싶다”라는 발언 외에 터져 나온 또 다른 얘기라면? “나는 할머니, 어머님, 어르신이 아니다. 그냥 멋진 어른 여자다.” “나는 젊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젊다.” 그들의 뮤즈가 돼줄 조니 미첼의 한마디가 패션 세상을 향한 깊고 고요한 메시지가 될지 모르겠다. “내 모습 그대로 받아줄래요?”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신광호
      사진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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