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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듣는 시간

2016.03.17

by VOGUE

    책 듣는 시간

    말 잘하는 남자 이동진과 말이 무서운 남자 김중혁이 마주 앉아 책을 이야기하는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 이 100회를 넘겼다.
    독특한 ‘케미’를 풍기며 조곤조곤 책 ‘읽어주는’ 이 남자들 덕분에
    복잡한 지하철이나 외로운 거리에서 책을 ‘들을’ 수 있다.

    두 남자의 조합은 의외였다. ‘이름과 얼굴, 글과 말이 다 같이 잘 알려진 영화 평론가’라는 독특한 위치에 있는 이동진과 등단 이후 10여 년간 소설과 에세이를 넘나들며 흥미로운 작업을 펼치는 동안에도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던 김중혁이 함께하는 팟캐스트라니. 게다가 오로지 한 가지 주제, 책 이야기만 판다. 책 읽는 사람이 희귀한 종족이 되어버린 요즘 같은 시절, 이 착한 방송이 생명력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데 흔히 말하는 ‘케미’가 폭발했다. 그 옛날 만담 콤비마냥 완벽한 궁합으로 조곤조곤 책 읽어주는 이 듀오 덕분에 언제 어디서든 책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동진이 특유의 분석력과 통찰로 책의 에센스를 정확하게 정리하면 김중혁이 창작자의 관점에서 좀더 감성적이고 디테일한 면을 짚어준다. 말하는 기쁨 못지 않은 듣는 기쁨, 읽는 것 못지않은 상상하는 기쁨을 안겨준 ‘이동진의 빨간 책방’은 2012년 5월 첫 방송 이후 매회 평균 다운로드 15만 회 이상을 기록하며 그야말로 순항 중. 그사이 100회를 훌쩍 넘었고, 방송 중 소개한 책 가운데 특별한 사랑을 받은 소설 일곱 편을 추려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이라는 책도 펴냈다.

    궁금했다. 이동진과 김중혁, 이 어색한 만남은 어떻게 시작됐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동진이 먼저 김중혁을 알아봤다. “<꿈꾸는 다락방>이란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게스트로 나오신 적이 있어요. 오랫동안 그의 작품을 좋아했는데 직접 만났을 때의 느낌이 정말 좋았어요. 재미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굉장히 진중한 분이라는 인상이었고요. ‘빨간책방’에서 ‘책, 임자를 만나다’라는 코너를 함께할 게스트를 선정하게 됐을 때 자연스럽게 김중혁 작가가 떠올랐어요. 매주 만나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려면 상대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이 있어야 하니까요. 뭐, 저 혼자 그랬다고요.”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김중혁이 받는다. “그래서 제 매력을 아주 조금씩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대략 100분의 1 정도만 풀었지요(웃음).” “17분의 1이 아니라 고작 100분의 1이라고요?” 방송에서 익히 듣던 두 사람의 어설픈 개그, 요상하게 애틋한 궁합에 웃음이 터진다.

    실은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의 책날개에 사이좋게 적혀 있는 글을 읽으면 좀더 느낌이 온다. “성실한 사람, 집요한 사람, 섬세한 사람, 꼼꼼한 사람,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쓰지만 존댓말을 벽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 다정한 사람, 천진난만한 사람, 마음이 여린 사람, 여린 마음이 부서지지 않도록 다짐과 반성으로 갑옷을 만드는 사람, 이해하기 위해 묻는 사람, 이해하기 위해 믿는 사람….(김중혁이 적은 이동진)” “다감한 사람, 민감한 사람, 산만한 사람, 엉뚱한 사람, 모든 게 노래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 사람, 자기만의 방을 가진 사람, 그 방에 처박히면 완전히 다른 사람, 그 방문을 열지 않고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 숨은 것을 발견하는 사람, 다양하게 쓰는 사람, 유영하듯 흘러가며 끝까지 쓰는 사람….(이동진이 적은 김중혁)” 간결하지만 따뜻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들의 애정 표현에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게다가 슬그머니 샘도 난다. 이렇게 속 깊고 뜨거운 찬사를 보내줄 친구가 있던가 하는 뜬금없는 생각에.

    사실, 두 남자는 각각의 이야기만 풀어도 엄청난 분량의 이야기가 풀려나올 정도로 흥미로운 인간들이다. 둘 다 특별한 팬덤을 가지고 있는 ‘문화 생산자’들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소설가 김중혁이 오늘의 문단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좀 독특하다. 2000년 문‘ 학과 사회’에 중편 <펭귄뉴스>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그는 소설과 에세이, 웹디자인과 일러스트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그야말로 ‘독창적으로’ 활동해왔다. 느닷없이 웃음이 픽픽 터져 나오면서도 밑줄 긋고 훔치고 싶은 문장이 너무나 많은 글은 물론, 작가 자신을 그대로 닮은 앙증맞은 그림(180cm의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움을 탑재하고 있다!)까지 팬들은 그만의 기발하고도 유쾌한 세계를 뜨겁게 사랑한다. “지루한 것을 못견디고 반복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때문일까요? 저는 글을 쓰는 일, 소설가라는 직업이 몹시 좋아요. 소설 쓰는 일은 매번 새롭고 힘든 일이지만 바로 그 점이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니까요. 특별히 독특한 이야기를 써내겠다거나 어떤 독자가 내 글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 같은 건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을 내가 만족하는 수준으로 써내면 ‘누군가가 읽겠지’라고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뭔가 다른 좀비물과(<좀비들>) 독특한 추리소설(<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등 한국에서 만나기 힘든 소설들을 써내면서도 음악에 대한 식견과 편애를 가감 없이 담아낸 <모든 게 노래>와 김중혁식의 공장 탐방기 <메이드 인 공장> 등의 에세이집까지, 세상 모든 것을 글의 재료로 삼아 서사를 부여하고 독특하게 창조해낼 줄 아는 그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글쟁이인지도 모른다.

    물론, 독특한 팬덤이라면 이동진 역시 만만치 않다. 일간지의 영화 담당 기자로 10여 년간 일했던 그는 정확히 10년 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이동진닷컴’을 오픈해 1인 미디어 시대의 선구자가 됐다(그의 블로그 ‘언제나 영화처럼’은 하루 방문자가 1만 명을 상회하는 인기 블로그다). 다양한 인쇄 매체는 물론이고 TV와 라디오를 넘나들며 비교적 쉽고 적확한 언어로 요지를 전달하는 이동진식 화법은 일찌감치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이동진이 별 다섯 개 준 영화’라는 식의 표현이 유통되기 시작한 지도 꽤 오래다. 그러나 ‘평에 대한 평’을 받는 것도 평론가의 운명인바, 그의 말만큼이나 신사적인 그의 글에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도 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어떤 맥락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신경을 쓰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제 평에 대해 공격을 한다고 해서 에둘러간다거나 피해가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예의 주시하긴 하지만 그것에 영향을 받아 평을 수정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공격적이지 않은 화법을 가진 건 다만 저의 본성입니다.” 한편 그는 1만5,000권을 훌쩍 넘는 책과 그에 못지않은 앨범을 수집하고 소장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네, 가벼운 의미에서의 강박증을 갖고 있습니다. 완벽주의라고도 할 수 있겠고요. 기본적으로 한 군데만 파는 성격이 아니에요. 가장 좋아하는 밴드는 핑크 플로이드지만 1년에 고작 한두 번밖에 안 듣습니다. 좋든 싫든 순서를 정해놓고 제가 소장한 음반을 골고루 끝까지 듣습니다. 물론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 경영 분야같이 좋아하지 않는 종류의 책도 다양하게 챙겨 읽는 것이 제 독서 방식이에요.” 아, 못 말리는 모범생기질에 오타쿠적 취향이 결합된 이 독특한 스타일이야말로 ‘평론가를 사랑하는 팬덤’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쉽지 않은 현상을 만들어낸 핵심이다!

    다시, 단순한 ‘취향의 공동체’를 넘어 좀더 강력한 ‘태도의 공동체’를 이뤄낸 두 남자의 책방 이야기로 돌아오자. 청취자들은 가능한 오래도록 그들의 수다를 듣고 싶어 한다. 배려와 예의를 기본으로 갖춘 채 치열하게 의견을 나누는 토론, 지적 유희와 적당한 유머가 결합된 대화를 ‘듣는 기쁨’은 ‘책 읽는 기쁨’과 다를 바 없으니. 게다가 꽤 믿을 만한 도서 리스트를 소장하게 된다는 기대감도 크다. <속죄> <작가란 무엇인가> <무의미의 축제> <자기 앞의 생> <비틀즈 앤솔로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28>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백석 평전> <칼의 노래> <당신들의 천국> <트렌드 코리아 2015>…. 오로지 ‘이동진의 감식안’에 의해 완성된, 시대와 국경과 장르를 가뿐하게 넘나드는 리스트는 책 중독자는 물론 트렌드 추종자 등을 두루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니까.

    갑자기 방송 후 뒤풀이를 하며 나눈다는 ‘뒷담화’ 현장이 궁금해졌다. 그곳에는 책과 영화와 음악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꽃을 피울 것이고, 때로는 영화감독과 배우와 소설가와 음악가들의 비밀스러운 에피소드들이 펼쳐질 것이다. 한 남자가 “지금도 웃기긴 하지만 좀더 노력하면 나만큼 유머러스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농을 던지면, 또 다른 남자가 “선배는 학원에서 배웠지만 난 독학 스타일”이라고 여유 있게 응수할 것이다. 아, 말과 글의 엄중함, 대화와 관계의 소중함을 아는 남자들이 무장 해제하고 나누는 진짜 수다를 담아내는 팟캐스트를 만들 수는 없을까?

      에디터
      글 / 오유리(자유기고가), 피처 에디터 / 이미혜
      포토그래퍼
      CHA HYE KYUNG
      장소
      채널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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