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임금님

패션계에서 남자의 성인식일까, 잘나가는 남자 디자이너들의 통과의례일까?
혹은 노출증에 걸린 걸까?
이브 생 로랑 이후, 인기 절정의 남자 디자이너들이 벗고 또 벗기 시작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세상이 알아주는 섹시 가이 톰 포드, 끼로 똘똘 뭉친 존 갈리아노, 순수한 듯 야릇한 버나드 윌헴, 패션 신사 스테파노 필라티, 온갖 문신을 구경할 수 있었던 마크 제이콥스, 패션 아이돌 올리비에 루스테잉, 더 없이 에로틱한 리카르도 티시, 그리고 이 모든 누드의 시작이었던 이브 생 로랑!

보이는 게 전부인 패션계에서는 우발적이고 도발적인 볼거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공습한다. 특히 패션 위크 때는 패션쇼장에서 기적의 퍼포먼스들이 관중을 기다린다. 이런 것들은 웬만큼 마음의 준비와 기대를 갖고 보는 것이라 사실상 충격은 덜할 수 있다. 그러나 패션 주인공들이 난데없이 옷을 벗어젖힌다면 그것만큼 ‘쑈킹’한 찰나가 또 있을까? 그런 관점에서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영화 <프레타 포르테>의 마지막은 패션 역사에서 충격적 ‘씬’으로 기록될 만하다. 임신부 모델이 면사포만 쓴 채 패션쇼 대미를 장식했던 순간!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벗은 모델들을 보는 건 패션의 담장 안에선 익숙한 일이다. 그러나 패션의 진짜 주인공인 디자이너가 벗는다면? 심지어 남자 디자이너가?

그나마 다행인 건 패션쇼 마지막에 관객에게 인사하러 나와 스트립 쇼를 펼친 게 아니라는 것. 대신 잡지 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청년 디자이너의 누드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연실색할 수밖에. 패션 아이돌 쯤 되는 발맹의 올리비에 루스테잉이 홀딱 벗고 프랑스 잡지 <Tetu> 표지에 흑백 사진으로 출연했다. 사진가 앙드레 아탕가나와 프랑수아 루소는 그를 금속 의자 모서리에 앉혔다.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 각을 형성한 루스테잉은 서른 살이 채 못 된 청년의 탄력과 윤기를 갖고 있었다. 그에게 유일한 ‘패션’이라면? 몇 개의 우정 팔찌뿐. 그는 말초적인 표지 사진만으로 잡지 기획을 마무리 짓진 않았다. 킴 카다시안 같은 스타 친구들을 취재하는가 하면, ‘발맹 군단’으로 알려진 친구들의 패션 화보 작업도 진행했다. “제 아이디어였어요!” 소란을 일으킬 게 분명한 노출 행위에 대해 그는 의미를 부여하기로 작심했다. 패션에 대한 자신의 접근은 단지 의상 디자인을 초월하길 원하며, 대중문화와 다양성, 그리고 표현의 자유에 대해 시야가 확장됐음을 피력하고 싶었다는 것. “가장 시크한 것들 중 하나가 누드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하나의 컨셉에 대한 표현이었죠.”

모델이 아닌 발맹이라는 패션 명문가의 얼굴이자 무려 100만 명 이상을 인스타 세상에서 거느린 인물의 자유 영혼과 개방적 태도는 볼 때마다 아슬아슬하다. 그런 루스테잉의 야릇한 자태 앞에서 떠오른 딱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1971년의 이브 생 로랑! 30대 중반의 이브가 자기 이름을 딴 남자 향수 광고 사진을 위해 검정 벨벳 방석 위에 올라 앉아 누드 촬영을 감행한 순간이야말로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유일무이한 ‘패션’은 검정 뿔테 안경이 전부(최근 제작된 두 편의 이브 생 로랑 영화엔 이 장면이 여지없이 포함될 만큼 결정적 순간! 심지어 돌체앤가바나도 안경 광고를 위해 이 사진의 아이디어를 차용했다). 장루 씨에(Jeanloup Sieff)의 사진 속 이브에겐 그리스 조각 같은 숭고함이 깃들어 있다. 물론 이제는 고인이 된 패션 위인의 과거 사진이기에 현재의 우리가 남다른 가치를 부여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패션 역사책을 뒤진다면, 이브 이전에 남자 디자이너가 공개적으로 옷을 훌러덩 벗은 예는 찾기 힘들다.

그런 관점에서 남자 디자이너들의 패션 스트립쇼를 ‘이브 신드롬’으로 지칭하는 건 어떨까(태초의 이브 역시 올 누드)? 패션의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아닌 이브가 되고 싶은(패션의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통해 여자들을 유혹하기 위한!) 남자 디자이너들의 욕망이 이브 신드롬이다. 생로랑 이후 루스테잉 이전에도 남자들의 벗은 몸은 쉽게 엿볼 수 있다. 특히 이브의 자손들은 벗는 데 거리낌이 없다. 톰 포드가 이브 생 로랑을 맡던 시절, 그는 자신의 누드는 아니지만 장루 씨에의 사진에서 자극을 받아 남자 모델의 성기 노출 사진으로 남자 향수 ‘M7’ 광고를 만들어 잡지에 게재했다. 또 미국판 <W>에 실린 사진가 스티븐 클라인과 톰 포드의 성도착증적 패션 화보 속 미스터 포드의 전라는 패션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었다. 그렇다면 포드의 후임자였던 멋쟁이 신사 스테파노 필라티의 알몸도 기억하시나? 전설의 YSL 카산드라 로고를 대형으로 제작해 그 뒤에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섰던 그 사진. 유르겐 텔러의 어딘지 모르게 퇴폐적인 시선에 찍힌 사진을 보며 팬들은 필라티의 일탈에 환호했다.

자칭 패션계에서 ‘한가락’한다는 앙팡테리블들 역시 한번씩 벗었다. 리카르도 티시는 미국판 <W>의 패션 셀럽들의 헐벗은 몸 특집쯤 되는 기획을 위해 벗었다. 티시 패거리인 머트 앤 마커스의 카메라 앞에서 그는 침대의 흰 이불 속에 엎드린 채 엉덩이 골을 드러내 에로틱하기 그지없었다. 언젠가 제레미 스캇은 거품이 뽀글뽀글 올라오는 욕조에 누워 몸의 절반 이상을 공개했고, 버나드 윌헴은 <Butt> 창간호를 위해 다 벗었다. 그런데 남자들의 누드를 보면 그들이 만든 옷만큼 캐릭터가 선명하다. 모두를 껌뻑 숨넘어가게 만들던 2000년대 존 갈리아노로 치면 ‘입는 것보다 벗는 게 쉬웠어요’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하다. 얼굴과 몸에 페인트를 덕지덕지 칠한 뒤 리차드 아베돈의 흑백 뷰파인더 앞에서 올 누드로 끼를 부리던 그를 어찌 잊을까. 또 흑인 모델 알렉 웩과 함께한 사진가 닉 나이트의 형광빛 조명 아래에선 교배 중인 동물처럼 엉킨 적도 있다.

이쯤에서 남자 디자이너의 벗은 몸을 실제로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유의 도시 파리로 떠나시길! 릭 오웬스로 치면 자신의 전라를 그대로 본뜬 조각상(마담 투소의 조각상을 제작한 인물들의 솜씨)을 팔레 루아얄 매장에 고이 보관하고 있다(천하대장군처럼 그곳을 늠름하게 수호하는 중). 그는 벗는 것 이상의 비뇨기 패티시를 지녔다. 어느 잡지에 자신이 소변 보는 모습을 아찔하게 보여준 적 있고, 2006년 피티 워모에서는 그가 또 다른 자신의 입에 오줌을 싸는 조각상을 제작해 파란을 일으켰다(올가을 남성복 쇼에는 원피스 같은 디자인에 소변구를 뚫은 희한한 옷을 잔뜩 발표했다). 이런 릭 오웬스에게 누드란? “극단적 상황의 내 모습을 공개해 나의 세계엔 한계가 없음을 재미있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대체 남자 디자이너들은 왜 벗는 걸까? 볼 꼴 못 볼 꼴 다 본 허심탄회한 친구가 되기 위해? 오웬스의 말처럼 그들의 몸을 엿보는 게 ‘재미’있나? 그건 수컷 공작처럼 다분히 원초적 본능이다. 벗는 남자들 사이엔 교집합이 있다. 몸에 대한 자신감이다. 마크 제이콥스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배가 나왔던 시절엔 누드 촬영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꿨다. 하지만 머리를 바짝 밀고 남미풍으로 수염을 기르고 체지방을 20%에서 8%로 낮춘 뒤엔? ‘BANG’ 향수 광고는 물론 유명 패션지에 알몸을 대놓고 공개했다(테리 리차드슨의 음탕한 접근과 딱 맞았다). 포드, 티시, 루스테잉이 엉덩이만 보여준 데 비해 그는 늠름하게 정면이다(비뇨기는 손이나 향수로 가렸지만). 라거펠트가 다이어트 성공의 증표로 샤프 연필처럼 가는 디올 옴므를 입었다면, 마크는 환골탈태를 자축하기 위해 누드 촬영을 감행한 것이다. “내 인생 최초로 ‘아, 편안하구나!’ 하는 기분을 느꼈어요!” 그는 누드 촬영을 떠올리며 말했다. “입은 것처럼 벗고 있는 것도 편했죠.” 알고 보면 제이콥스는 피부암 환자 돕기 기금 마련 캠페인 때부터 벗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쳤었다. 사업 파트너인 로버트 더피와 함께 홀딱 벗고 촬영한 사진을 티셔츠에 인쇄해 전 세계에 팔았으니까(물로 이때도 정면!).

벗기 게임에 중독된 남자들이 백스테이지와 스튜디오 곳곳에서 늘고 있다. 스타일리스트 조지 코티나(에밀리오 푸치 등을 스타일링하는 안나 델로 루쏘의 절친)부터 헤어스타일리스트 루이기 머레누(작년 <보그 코리아> 8월호 표지를 촬영한 적 있다) 등은 자신이 신뢰하는 잡지(패션계 소수에게 사랑받는)를 위해 거침없이 옷을 벗어젖혔다. 평소 ‘일’로 여겼던 옷 자체에 신물이 난다는 듯 다들 그 순간만큼은 황홀경에 빠진 표정. 하긴 남자들은 피트니스 클럽에서 자기 몸이 꽤 괜찮게 조각되는 중이다 싶으면 즉석에서 셀피를 찍어 SNS에 올린다. 미의 기준에 부합될 만한 신체 조건으로 자기 몸이 바뀌고 있는 데다 뭔가를 보여주지 못해 안달 난 세상인데, 누가 옷감 따위로 몸을 꽁꽁 감추고 싶겠나.

바야흐로 디자이너로 패션계에서 유명세를 치르려면 ‘벗어야 산다!’는 게 또 하나의 명제로 성립된 분위기다. 특급 대열에 속한 인물이라면 “난 여전히 잘나간다구!”라는 식의 색다른 자기 과시를 해댈 수 있다. 막 뜨기 시작했고 좀더 폭발적 반향을 일으키고 싶은 젊은 남자라면? 셀러브리티들을 잘 벗기기로 소문난 마리오 테스티노가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타월 시리즈’가 도움이 될 듯. 상상력을 마구 펼치니 이런 그림들이 떠오른다. 데님 라인 ‘X’를 발표하며 모델 안나 이워스를 벗긴 알렉산더 왕이 긴 검정 머리를 풀어헤친 뒤 아랫도리에 수건만 두른 채 누드 촬영을 감행한다면? 조나단 앤더슨이라면 로에베의 새 가방만이 사진 속 유일한 패션이 되지 않을까? 이브 신드롬의 주역이자 후계자들의 통과의례가 된 누드 사진 속 에디 슬리먼의 셀프 누드는 또 어떤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