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포스트 트렌드 시대

2016.03.17

by VOGUE

    포스트 트렌드 시대

    트렌드가 사라진 세상이 도래했다! 여자들이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하진 않겠냐고?
    천만에,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수록 찬양받는 ‘포스트 트렌드 시대’란 패션 신대륙을 그저 신나게 즐기면 된다.

    “위대한 미국 여성이 저 밖에 벌거벗고 서서 내가 그녀에게 어떤 옷을 입으라고 말하길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57년 영화 <화니 페이스>에서 가상의 패션지 편집장인 매기 프레스캇은 기자들에게 새로운 트렌드를 발견해야 한다며 소리쳤다. 그러던 중 책상 위 연분홍색 종이를 발견하고 소리친다. “Think Pink!” 미국 <보그> 편집장, 다이애나 브릴랜드를 모델로 삼았던 프레스캇은 이렇게 선언한다. “세계 모든 여성들에게 알려! 블랙은 없애고, 블루는 불태워 버리고, 베이지는 묻어 버리라고! 이제부터 모두들 Think Pink!”

    2015년의 브릴랜드라 불러도 좋을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는 한 달 전 뉴욕 패션 위크에서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트렌드는 더러운 단어예요(Trends is a dirty word).” 스타일닷컴의 팀 블랭스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는 ‘트렌드의 종말’을 선언했다. “이제 패션은 트렌드가 아니라 여성의 개성과 캐릭터를 반영해요.” 다시 말해 알렉산더 왕의 어두운 소녀들과 프로엔자 스쿨러의 예술적인 여인, 그리고 마이클 코어스의 부유한 여인들이 결코 하나로 묶일 수 없다는 것. 옷을 입는 여자들 각각의 개성과 디자이너들 특유의 미학이 주인공이 되는 ‘포스트 트렌드 시대’가 펼쳐졌다고 선언한 셈이다. 뉴욕 컬렉션을 정의할 만한 하나의 테마는 떠오르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웃으며 답했다. “블랙이 너무 많던 것 말고요?”

    브릴랜드가 만약 살아 있었다면, 후배의 말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사람들이 트렌드를 따르지 않는다고? 디자이너들이 비슷한 스커트와 코트를 선보이지 않는다고? 붉은 그림들로 유명했던 거실에서 담배를 물고 그대로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올봄 보테가 베네타와 마이클 코어스의 풀 스커트와 미우치아 프라다의 로맨틱한 프린트에서는 50년대 스타일이 엿보였고, 루이 비통과 지암바티스타 발리, 까르벵의 미니 시프트 드레스와 반짝이는 소재에선 60년대 모즈 룩이 연상됐으니까. 또 구찌, 에트로, 데릭 램, 타미 힐피거 등의 스웨이드 코트와 판탈롱 팬츠는 70년대풍이었다. 일명 ‘마이크로 트렌드’라 불리는 작은 공통분모들은 어디까지나 존재하는 셈(지난달 <보그 코리아>도 70년대 히피, 데님, 밀리터리 스타일, 핏빛 붉은색 등 7가지 봄 트렌드를 꼽았다). 그렇지만 2015년 봄 패션을 정의할 때 모든 걸 아우를 수 있는 거대한 유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해도 좋다.

    <뉴욕 타임스>의 평론가 출신인 칼럼니스트 캐시 호린 역시 최근의 이런 경향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20세기 동안 여성들이 옷을 입는 방법은 트렌드가 지배했다. 1910년대의 아래가 좁은 스커트(파리에서 출발해 다른 도시에 전파된)부터 1947년 디올의 뉴 룩, 그리고 60년대 미스 스커트까지.” 호린은 21세기의 가장 큰 변화는 바로 트렌드의 실종이라고 덧붙였다. “경제구조의 변화와 인터넷 등 다양한 이유들 때문에 패션계는 이제 그 오랜 모델에서 벗어났다.” 그러면서 그녀는 런웨이에서 시작돼 대중들에게 전파된 마지막 빅 트렌드는 20년 전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발렌시아가에서 선보였던 카키색 카고 팬츠였지 않냐고, 반문했다.

    물론 지금도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반응하는 히트 아이템과 새로운 경향은 존재한다. 최근 기억을 떠올려보면, 피비 파일로의 선택만으로 신분 상승을 경험했던 스탠 스미스와 버켄스탁이 떠오를 만하다. 얼마 전 파리의 신인, 베트멍이 물 빠진 데님 팬츠를 선보이자 갑자기 빈티지 501을 찾는 소녀들이 늘어난 것도 흥미로운 케이스(리바이스는 ‘501의 시즌’으로 정하며, 이 새로운 유행의 버스에 재빨리 올라탔다). 그 밖에도 ‘놈코어’란 새로운 패션 용어가 등장했는가 하면, 패션쇼장에서 스틸레토 힐보다 아디다스 슈퍼스타가 더 많이 눈에 띈 것도 분명 트렌드였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패션 파도의 주기는 더 빨라졌지만, 그 뒤에 부는 유행이라는 바람 속에 숨겨진 공식은 없다. “트렌드라는 단어는 이제 럭셔리와 비슷한 단어가 됐어요. 그 누구도 그것의 정체를 모르고, 어디서 시작되는지, 어디서 끝나는지도 모르죠.” 파리의 트렌드 예측 회사 ‘NellyRodi’ 대표인 피에르-프랑수아 르 루에는 그 바람의 방향을 예측하기란 이제 불가능해졌다고 덧붙였다. 디자이너와 브랜드들은 이제 바람이 불어 하늘에서 사과가 뚝 떨어지기를 기다리기 보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 시즌 제품을 팔 수는 없어요. 대신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키워야 하죠. 진짜 어떤 패션을 이야기하는지, 경쟁자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한편, 마구잡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할 이들은 있다. 바로 옷을 사고, 입고, 즐기는 여성들! 여성들에게 ‘포스트 트렌드 시대’란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개성과 캐릭터가 넘쳐나는 옵션들의 등장과 동의어다. 여성 스스로 개성에 맞는 스타일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패션 신대륙이 열린 셈이다. 뛰어난 재능의 디자이너들 역시 지금은 여성들을 위한 시대라고 강조한다. “패션이 여성들에게 당신이 누구라고 가르칠 필요는 없어요.” 석 달 후 사라지는 유행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타임리스’ 아이템들을 선사하는 게 자신의 목표라고 설파하는 피비 파일로는 3월 초 파리 컬렉션 직후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파일로는 자유로운 여성들로 사는 즐거움은 바로 스스로 자신을 완성해나가는 데 있다고 덧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가을 컬렉션 속 모델들은 한 가지 스타일이 아닌, 다양한 헤어와 메이크업을 하고 등장했다. 랑방의 알버 엘바즈 역시 파일로의 의견에 동의했다. “디자이너들은 ‘회색이 새로운 검은색이다’라고 말하고는 다음 시즌엔 ‘난 이제 더이상 회색을 못 쓰겠어’라고 말하죠. 그럼 대체 회색은 어디로 가는 거죠? 왜 매 시즌 회색을 사용하면 안 되는 거예요? 여성들은 분명히 회색을 좋아할 텐데 말이죠.” 그는 만약 랑방의 회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릭 오웬스의 회색을 선택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좀더 강렬한 회색을 찾는다면 꼼 데 가르쏭의 회색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회색은 완전히 다른 매력을 가졌다.

    “우리는 끝없는 다양성을 원하지 않는다.” 다이애나 브릴랜드는 패션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진짜 패션을 원한다. 그리고 패션이 바뀔 때면, 그 사이에 작은 금이 생기고 갈라지는 소리가 난다. 그걸 살펴보는 것이 바로 패션의 재미다.” 그녀는 <보그>야말로 패션 대지의 갈라진 틈을 대신 살펴보는 훌륭한 동행이라 믿었고, 그 사실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모든 회색이 옳을 리는 없다. 랑방의 회색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 테고, 릭 오웬스의 회색을 어떻게 소화할지 감이 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복잡한 패션 미로에서 손을 잡아줄 친절한 안내인을 필요로 한다. 그 손은 때로 <보그>일 수도, 디자이너일 수도, 혹은 바이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요즘엔 인스타그램 사진 한 장일 수도 있다. 지난해 5월 모나코에서 <보그 코리아> 편집장과 만난 자리에서 루이 비통의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이 시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가져야 할 자질을 이렇게 정의했다. “비전을 가지고 이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많은 방해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 쉬우니까요.” 때로는 너무 많은 옵션들과 너무 많은 자유가 방해 요인이 될 수 있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수많은 옷들이 눈을 가릴 때도 있다. 그럴 때 제스키에르의 말은 위안이 될 것이다. “디자이너가 ‘리드’한다는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그 누구도 아직까지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포스트 트렌드 시대’에 이보다 든든한 동행이 또 있을까?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손기호
      사진
      James Cochrane, Indig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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