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전성 시대

핑크에 대해 부정적인 세뇌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 여자들.
덕분에 핑크를 평생 벗한 적이 없었다면,
올봄이야말로 트렌드의 중심에 선 핑크를 시도해볼 때다.

얼마 전, 2015년 그래미 시상식 레드 카펫을 밟은 수많은 셀러브리티들 중에서 단연 화제가 된 인물은 리한나다. 평소 완벽한 보디라인을 훤히 드러내는 룩으로 레드 카펫 위에서 관능적인 포즈를 취하던 ‘배드걸 리리’가 선택한 건 놀랍게도 디즈니 만화 속 공주님이 입을 법한 어마어마한 튤 드레스! 게다가 딸기 맛 아이스크림을 연상시키는 분홍색. 누구보다 빠르게 새로운 컬렉션 룩을 선보이는 그녀는 바로 2주 전, 지암바티스타 발리가 파리 꾸뛰르쇼를 위해 완성해낸 따끈따끈한 신상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것이다(누구도 그녀가 이런 ‘샤방샤방’한 드레스를 입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듯). 온라인에서는 이날 리한나의 모습이 두루마리 휴지 케이스, 생크림 케이크, 레이스 우산 등과 비교되며 끊임없이 회자됐다. ‘패션여제’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신의 한 수였을까? 그런데 며칠 후 사진가 머트앤마커스 듀오의 파티를 찾은 킴 카다시안과 리타 오라가 선택한 컬러도 핑크. 미리 상의라도 한 듯 꼭 닮은 분홍색 라텍스 미니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파티 드레스를 협찬해주고 싶어 안달인 수많은 디자이너 옷들 중에서 두 사람이 선택한 건 이름도 생소한 아츠코 쿠도의 분홍 미니 드레스. 지금 패셔니스타들은 핑크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분홍색을 좋아하는 여자라는 설명을 듣는 순간 그려지는 여성상은 사실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영화 <금발이 너무해> 속 엘르 우즈는 완벽한 외모를 지녔지만 미래지향적이지 못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그런 그녀를 상징하는 것이 금발과 분홍색이다(엘르 역을 맡은 리즈 위더스푼의 딸이 어느덧 열여섯 살이 돼 핫핑크로 염색한 헤어스타일을 선보인 건 흥미로운 우연!). “주홍이 새로운 분홍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심각한 장애가 있는 것이 분명해!”라며 옷부터 가방, 펜, 노트, 강아지 옷까지, 모든 것을 분홍색으로 고집하는 그녀는 지적인 하버드 법대생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한다. 또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예쁘기만 한 여주인공들이 ‘수요일은 분홍색을 입는 날’이라고 말하며 분홍색을 향한 애정을 과시한다. 이런 편견 때문인지, 2011년 하버드 대학에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 성인 여자들은 분홍을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몹시 싫어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대체 언제부터 분홍에 이런 부정적 의미가 포함된 걸까? 놀랍게도 19세기에는 분홍이 남자들의 컬러였다. 빅토리아 시대 가족 초상화를 보면 남자 아이들이 분홍 옷을, 여자 아이들이 파랑 옷을 입고 있다. 염색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원색보다 파스텔 컬러 염료를 만드는 것이 더 어려웠던 당시 분홍색은 부유함의 상징이었다. 1927년 <타임>지 기사는 미국 내 소비자들을 분석하면서 부모들이 아들에게는 분홍, 딸에게는 파랑 옷을 입히는 경향이 있다고 썼다. 당시만 해도 분홍은 강인함을 상징하는 색상, 파랑은 부드러움을 상징하는 색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런 인식은 완전히 뒤바뀌게 됐다. 전 세계적으로 여자는 분홍, 남자는 파랑이라는 이분법에 세뇌되기 시작한 것. 그 결과 여자들은 분홍을 의도적으로 피하게 됐고, 분홍을 좋아하는 건 독립적인 성인 여자답지 못한 취향이라고 여기게 됐다.

이런 편견은 패션계에선 더 심했다. 패셔너블하다, 즉 ‘시크’하고 ‘쿨’한 룩은 검정, 회색, 남색, 카키 등 칙칙한 컬러들이지 분홍 같은 예쁜 컬러가 아니었다(검정 스키니진과 검정 가죽 재킷, 검정 킬 힐을 신은 케이트 모스의 모습을 떠올려보시라!). 패션계 여자들끼리 만나면 온통 시커먼 룩으로 차려입은 웃지 못할 광경이 벌어지기도 하지 않나.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리 생각했던 건 아니다. 생전의 무슈 디올은 “회색, 옅은 터키석 색, 그리고 분홍은 영원할 것”이라고 말했고, ‘프렌치 시크’의 대명사라 불리는 이네즈 드 라 프라상쥬의 파리 사무실은 벽면이 죄다 진분홍색이다. 분홍 역시 패셔너블할 수 있다는 뜻.

어쨌든 이번 시즌만큼은 여러 디자이너들이 프라상쥬와 무슈 디올의 의견에 동의한 것 같다. 그 증거로 분홍색을 재평가한 컬렉션이 여럿 눈에 띄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제레미 스캇의 모스키노. 머리부터 발 끝까지 분홍 아이템들로 무장한 모스키노의 바비 인형들은 전형적인 ‘핑크 걸’의 모습이지만 이번엔 세련되게 느껴진다. 이 핑크빛 트렌드는 니나리치, 발렌티노, 시몬 로샤, 자크무스, 겐조, MBMJ 등 사랑스러운 소녀 취향을 지닌 브랜드들은 물론, 지방시, 버버리, 발렌시아가 등 평소 분홍과는 거리가 먼 브랜드의 런웨이 위에서도 눈에 띄었다. 오스카 드 라 렌타의 유작이 된 이번 컬렉션의 오프닝 역시 분홍 깅엄 체크 룩. 뉴욕 시크의 대명사 격인 빅토리아 베컴조차 분홍 꽃잎으로 가득 메운 수트와 미니 드레스를 선보였다. 게다가 올봄 런웨이를 가득 메운 분홍은 살짝 분홍빛이 섞인 컬러가 아니라 눈이 시릴 정도로 눈부신 형광 핑크나 여릿여릿한 딸기우윳빛이다.

그렇다면 모처럼 찾아온 핑크 트렌드가 현실 속 여자들의 마음도 사로잡을 수 있을까? 대답은 예스! 평소 공식석상에서 다채로운 톤의 분홍 룩을 보여주는 ‘분홍 예찬론자’인 왕세자비 케이트 미들턴이 지난 연말 뉴욕 방문길에 입었던 진분홍 코트는 그녀의 사진이 온라인에 공개되자마자 ‘완판’! 멀버리의 가을 컬렉션으로, 약 250만원이란 가격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모든 매장과 온라인 사이트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자칫 바비 인형 코스프레가 될 수도 있는 모스키노의 올봄 컬렉션은 하비 니콜스에서 단 하루 만에 품절! 네타포르테 측은 지난 연말부터 분홍 아이템들의 판매량이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주로 샬롯 올림피아 혹은 소피아 웹스터의 귀여운 슈즈들이 잘 팔리긴 하지만, 돌체앤가바나의 장미 프린트 캡슐 컬렉션을 비롯, 분홍색 옷들도 점차 찾는 고객이 늘고 있어요.” 영국 <보그> 패션 에디터 프란세스카 번스, 지오반나바타글리아 등 2015 F/W 컬렉션 쇼장을 찾은 패피들의 스트리트 룩도 이미 분홍색이었다.

막 끝난 2015년 가을,겨울 컬렉션 런웨이에서도 뉴욕의 알투자라, 런던의 어덤, 밀라노의 프라다, 파리의 디올 등이 분홍 아이템들을 선보인 것을 감안했을 때, 오랜만에 찾아온 분홍의 인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첫 구찌 컬렉션에선 모델들의 머리카락 조차 분홍색이었다!). 한 가지 컬러도 수십 가지로 나뉘는 패션 세계에서는 분홍을 종종 장미색, 딸기 아이스크림색, 혹은 산호색 등으로 포장하지만, 올봄만큼은 그럴 필요 없이 당당히 분홍을 즐겨도 된다는 이야기. 이제 분홍을 좋아하는 여자라는 건 패션을 좀 아는 여자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