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블로거들의 세상

취미로 시작한 블로그로 수백만 명의 팬을 거느리며 하루아침에 패션 스타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패션 블로거를 둘러싼 온라인 세상에선 지금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여기 혹시 자리 번호가 어떻게 되지?” 지난 2월 15일 오후 3시경, 뉴욕의 웨스트 37번가에 자리한 한 창고에서는 잠시 좌석 번호를 두고 신경전이 벌어졌다. 곧 시작할 예정인 타쿤 쇼를 찾은 한 패션 블로거(한국에도 잘 알려진 미국 교포 블로거)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또 다른 블로거에게 티켓 확인을 요구한 것. 하지만 이미 좌석을 차지한 블로거들은 그녀에게 자리를 양보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어쩔 수 없이 맞은편 빈 자리에 앉은 블로거는 당황스러워 했지만, 오히려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에게 원래 배정돼 있던 자리는 누가 봐도 ‘블로거 섹션’이었기 때문이다.

패션쇼장의 관객석은 주로 편의상 ‘미국 프레스’ ‘영국 바이어’ ‘한국 프레스’ 등으로 섹션이 나눠진다. 전 세계 프레스와 바이어들을 위한 프레젠테이션 자리인 그 현장에서 이제 패션 블로거들이 모여 앉는 모습은 익숙한 풍경이 됐다. <보그 코리아>가 사토리알 리스트로 대표되는 1세대 패션 블로거들을 처음 소개했던 것이 2006년. 그러니까 패션 블로거라는 새로운 직업이 탄생한 지도 10여 년이 흐른 셈이다. 그동안 패션 블로거들의 역사에도 기념비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돌체앤가바나가 자신들의 쇼에 토미 톤, 스콧 슈먼, 브라이언보이 등의 블로거들을 프런트 로에 앉히면서 프레스들을 놀라게 했던 것이 2009년(나중에 스콧 슈먼은 그 사건에 대해 자신들을 ‘춤추는 원숭이’ 취급했다며 분노했지만). 같은 해 ‘올드 미디어’의 대명사인 미국 <보그> 역시 주목할 만한 블로거 9명을 취재하면서 패션의 새로운 경향을 인정했다. 그동안 1세대 블로거인 토미 톤, 스콧 슈먼, 브라이언 보이, 수지 버블, 토드 셀비 등은 1인 기업 혹은, 인정받는 사진가와 칼럼니스트로 자리 잡았다. 또 지난해 패션 비즈니스 관련 사이트인 ‘Business of Fashion’이 발표한, 패션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500명 리스트에는 가랑스 도레, 린드라 메딘, 중국인 블로거 고고보이 등 10명이 넘는 블로거가 포함됐다. 이제 블로거는 더 이상 패션계의 춤추는 원숭이가 아니라는 증거다.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2013년 수지 멘키스가 에서 썼던 ‘The Circus of Fashion’이란 기사. 패션쇼를 하나의 서커스로 만든 이들을 비판하면서 이 백전노장의 패션 저널리스트는 블로거들이 ‘공짜 선물과 공짜 여행’을 받으며 스스로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온라인 심판자들 스스로가 위대하다고 착각하는 것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 블로거들 중에서 저널리스트로 성장한 수지 버블 역시 그 의견에 일부 동의했다. “B 단어(Blogger의)는 더러워졌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돈을 얼마나 버는지 묻고, 모든 포스트가 스폰서를 받은 것이라 의심하고, 어떤 옷들이 공짜 선물인지 궁금해 하고, 패션 평론가가 아니라 기자 정신이 부족한 허식가라고 비판한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 이런 면에서 유죄임은 맞다.” 린드라 메딘 역시 멘키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멘키스가 질책하는 것은 우리 세대이자 우리 직업이고, 우리의 순간이다. 물론 나도 실제로 재능보다는 팔로잉 수만으로 프런트 로를 차지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하지만 팔로워의 숫자만으로 패션 특급 열차의 VIP석에 앉는 블로거들은 지금도 늘고 있다. 무려 330만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거느린 이태리의 패션 블로거 키아라 페라니는 이제 단독으로 패션지 커버를 촬영할 정도의 스타가 됐고, 한국의 패션 브랜드 보브는 스트리트 패션 스타였던 테일러 토마시 힐(팔로워 10만 명)과의 지난가을 협업 컬렉션의 성공(브랜드 홍보팀에 따르면 사상 최고 매출을 올렸다)에 힘입어 올봄엔 하넬리 무스타파르타(팔로워 18만 명)와의 협업을 선보였다. 또 미국의 쇼핑 매거진 <럭키>는 3월호 커버 모델로 할리우드 스타 대신 세 명의 블로거들을 선택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블로거들이 세계를 정복하는 법”이란 제목 아래 키아라를 비롯해 니콜 완(팔로워 110만 명), 자니타 위팅턴(팔로워 20만 명)의 성공담이 이어졌다. “이 셋은 한때 취미를 완전한 사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들은 랑콤 모델을 하고, 루이 비통 캠페인을 촬영하고, 책을 쓰기도 한다.”

모든 것이 인스타그램 팔로워 숫자로 계산되는 시대, 블로거들은 더 이상 블로거로 불리지 않는다. 새롭게 등장한 단어는 ‘인플루언서(Influencer)’! 이제는 무명의 모델도, 패션 학도도, 혹은 그저 빼어난 외모의 일반인들도 패션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영향력 척도는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소셜 네트워크 팔로워 숫자. 파리의 패션 하우스들은 더 많은 인스타그램 팬을 가진 모델들 위주로 캐스팅을 하고, 브랜드 홍보 담당자들은 패션 매체의 공식 계정은 물론, 에디터들 개인의 인스타그램도 살피며 그들이 ‘인플루언서’인지 아닌지 가늠하기 시작했다.

4대 도시 컬렉션을 모두 참관하고 있는 모델 아이린 역시 한국의 인플루언서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다. 43만 명에 달하는 인스타그램 팔로워 숫자를 자랑하는 아이린은 이제 모델보다 ‘패션 스타’라는 직업이 더 어울린다. 그녀는 굳이 사진과 설명으로 가득하고 지나치게 친절한 블로그를 운영하지 않는다(사진을 모은 텀블러는 있다). 대신 그녀의 패션 위크 일정을 촬영하는 스태프들이 일거수일투족을 시시콜콜 추적하고, 그녀가 찍힌 스트리트 패션 사진들은 자연스럽게 온라인을 가득 메운다. 그런 가능성을 알아본 패션 하우스들은 그녀를 프런트 로에 초대하고, 뉴욕 모델 에이전시인 ‘더 소사이어티’는 그녀와 계약까지 마쳤다.

지난 2월 나우매니페스트(NowManifest)라는 블로그 회사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스타일닷컴을 비롯해 <보그>를 발행하는 콘데나스트 자회사 중 하나였던 나우 매니페스트는 가장 영향력 강한 블로거들의 포털 역할을 해왔다. 브라이언보이, 수지 버블, 안나 델로 루쏘, 데렉 블라스버그 등 블로그들의 광고 업무를 대행해온 회사가 문을 닫은 것이다. 소속 블로거들은 변하는 것은 없다며 자신들의 블로그는 그대로 운영할 것이라 밝혔다. 비록 브라이언보이와 안나 델로 루쏘 등은 직접, 혹은 그들의 어시스턴트들이 광고 업무를 진행하는 수고로움을 거쳐야만 하지만 말이다. 물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는 출판사의 정책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 소식은 또 다른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듯 했다. 휴대폰으로 기나긴 블로그 포스팅을 보는 대신 인스타그램 피드와 페이스북 링크를 클릭하는 것이 익숙해진 요즘, 블로그라는 플랫폼의 미래가 마냥 밝지만은 않다는 것!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은 “패션 블로거는 돈을 어떻게 버나”라는 기사를 준비했다. “수많은 스타일 블로거들에게는 제휴 링크가 주된 수입원이다. 유행을 앞서는 이 블로거들은 자신이 링크를 거는 제품들을 사기도 하고, 브랜드와 소매업체들로부터 정기적으로 상품을 받기도 한다. 일부는 자기가 실제로 갖고 있지 않은 ‘위시리스트’나 ‘기프트 가이드’에 들어 있는 상품에 연결시키기도 한다.” 즉, 자신이 올리는 이미지 속 아이템의 링크를 방문자가 클릭하고 연결된 사이트에서 물건을 살 때마다 다음달 그 제품의 매출액 일부를 블로거가 받는다.

꾸뛰르쇼에 초대받을 정도의 ‘우주 대스타 블로거’들이라면, 굳이 모든 제품에 링크를 다는 귀찮은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네타포르테, 톱숍, 바니스 뉴욕, 센스 등의 쇼핑몰들은 이런 블로그들에 앞다퉈 광고를 내건다. 또 앞서 소개한 하넬리처럼 브랜드와 협업을 하는 것만으로도 수만 달러의 수익을 올릴 수 있으며, 브랜드의 ‘앰버서더’로 활동하면서 한 해 수입을 보장받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 린드라 메딘의 사이트인 ‘맨리펠러(ManRepeller)’는 6명 필자가 활동하는 패션 사이트로 성장했으며, 나우매니페스트의 창립자였던 엘린 클링은 <스타일바이>라는 패션지를 창간하고 패션 브랜드 토템(Toteme)을 론칭하기도 했다. 블로그가 새로운 패션 비즈니스의 시발점이 된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블로거들은 어떨까? “인스타그램을 폭파하고 싶어요.” 한 홍보대행사의 팀장은 <보그>의 질문에 한숨을 쉬며 이렇게 답했다. “브랜드는 온라인 노출도 중요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패션지에서의 노출이 에디터의 결정이라면, 블로거의 SNS는 철저히 돈으로 움직이거든요.” 인스타그램에 제품이 등장하는 횟수, 관련 해시태그 등 모든 것이 돈에 의해 관리되는 것. 수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한 신인 모델의 인스타그램에 뜬금없이 브랜드 이름 해시태그가 걸려 있거나, 파워블로거의 블로그에 새 매장 소개가 자세히 올라가 있다면, 그 뒤로 모종의 거래가 오갔을 가능성이 높다(지난해 6월부터 공정거래위원회는 블로거가 상품평 등을 올릴 때 대가성 유무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고 지시했다). “저희는 2년 전부터 관리하던 블로거 리스트를 폐기했어요.” 또 다른 홍보대행사 팀장 역시 한국식 패션 블로거의 폐해에 대해 언급했다. “이른바 파워블로거들이 금전 혹은 선물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면서 곤란한 경우가 많았어요. 그렇다고 전문적인 포스팅이 따르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관리하던 블로거 리스트를 과감히 없앴습니다.”

“파워블로거들이 결국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브랜드나 쇼핑몰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아요.” 한 파리 하우스의 홍보 담당은 결국 자신들이 블로거들을 이용한 마케팅을 포기하게 된 또 다른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원칙적으로 이런 경우 문제는 없어요. 하지만 이들이 운영하는 쇼핑몰에서 이른바 ‘짝퉁’ 제품을 판매하는 경우 상황은 달라지죠.” 예를 들어 하루 평균 1만 명 정도가 찾는 한 파워블로거는 H 브랜드 백을 똑같이 베낀 아이템을 소개하는 포스트를 올리고, 곧이어 한 패션 브랜드 행사에 다녀온 포스트를 올리는 식. 가짜 제품을 판매하는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블로거를 다른 패션 브랜드가 초대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더 골치 아픈 것은 이런 블로거들이 쇼핑몰로 엄청난 돈을 번 다음 하이패션 브랜드의 VIP 고객이 된다는 거예요. 쇼핑몰에서는 가짜 제품을 판매하면서 자신은 진짜 아이템을 사기 위해 매장을 찾는 거죠. 이런 아연실색할 상황은 한국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일 거예요.”

아마추어들이 패션을 즐기는 도구로서 완벽했던 블로그는 이제 많은 부분이 변색됐지만, 패션계에 완벽하게 안착하기는 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 패션 블로그를 방문한다고 고백한 적 있는 랑방의 알버 엘바즈는 당연한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저희는 즉각적인 세상에 살고 있어요. 모든 것이 빠르고, 모든 것이 거대해야 하고, 모든 것은 지금 가능해야 하죠. 패션 블로그 역시 우리 사회를 반영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둘러앉아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거죠.” 어쩌면 사진가들의 셔터 소리와 팔로워가 보낸 하트 개수에 집착하는 블로거도, 통장에 찍힐 잔고만 떠올리는 블로거도 지금 패션계의 현실을 그대로 비추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한때 패션 블로그는 이전에 듣지 못했던 새로운 목소리를 들려줬고, 패션계는 기꺼이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이제는 가장 큰 목소리(혹은 가장 많은 팔로워)를 가진 블로거들의 아우성만 들릴 뿐이다. 2009년 <보그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토드 셀비는 자신의 블로그를 한마디로 정의했다. “흥미로운 사람 + 창조적인 공간 × 무언가 다른 것!” 하지만 지금처럼 하나의 비즈니스로 블로그가 변질되고 만다면, 결국 패션 블로그의 정의는 이렇게 바뀌지 않을까? “패션 + 돈 × 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