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베레 붐

2017.07.13

by VOGUE

    베레 붐

    비니? 유효하다. 스냅백? 따분해졌다. 페도라? 이제 그만!
    인체에서 머리가 스타일을 결정짓는 시대에 새로운 ‘비행접시’가 정수리에 착륙 신호를 보내고 있다.
    낭만적인 듯 호전적인 베레 붐!

    구찌 역사가 8년 만에 새로 작성되던 1월 19일 밀라노. 알레산드로 미첼레는 성욕이나 과시욕을 뺀 서정적이고 중성적인 옷으로 데뷔전을 치렀다. 현대 낭만주의 시 같았던 컬렉션은 남성복 전문가가 아니어도 ‘Nuovo Gucci’ 차원에서 화제였다(여자 관객들이 더 입고 싶어 마음을 졸였다는 후문). 낭만파 젊은이들의 용모에서 눈에 띈 건 단연 베레였다(갈색, 녹색, 회색 등). 베레를 쓴 청년과 아가씨들이 구찌 쇼에 나오기 몇 시간 전, 그래픽 디자이너인 내 멋쟁이 친구는 우연인지 베레를 쓴 채 약속 장소에 나왔다. 유니클로에서 구입한 이네즈 드 라 프라상쥬 라인의 남색 베레는 폭이 좁은 얼굴은 물론 허리를 살짝 묶은 검정 코트와 기똥차게 잘 어울렸다(패션 전문 기자가 보기에 샘 날 만큼). 카페에서 노닥거리며 밀라노 남성복 쇼 사진을 실시간 점검하던 나는 구찌 쇼의 베레 사진이 뜨자마자 무릎을 탁 쳤다.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사진을 들이밀자 새삼스럽게 뭘 그러냐는 투로 피식 웃으며 이렇게 대답할 뿐. “그저 자유롭고 싶어서 썼다고!”

    그로부터 8일 후 파리. 생로랑 쇼는 프리폴 여성복 16벌이 포함된 남성복 컬렉션으로 편집됐다. 엉성하게 걷다가 관절이 분리될 듯 빼빼 마른 소년 모델들 틈에서 여성복을 찾는 건 쉬웠다. 죄다 치마였으니까. 그 가운데 7벌에 베레가 쓰였다(남자 옷에서도 7개를 볼 수 있었다). 결론부터 얘기해보자. 이제 베레를 써야 할 시간이다! 구찌 뉴 룩의 일등공신이 베레였고, 에디 슬리먼이 판매와 유행에 끼치는 힘이 실로 대단하다는 것이 판명된 지금, 그의 최신 컬렉션에 베레가 우르르 출몰했으니까. 사실 베레가 ‘유행’인 적은 별로 없었기에, 베레가 돌아왔네 어쩌네 호들갑 떨 일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요즘 패션 경향이 모순과 이중성으로 가득하다는 걸 감안하면 베레야말로 의미 있는 품목이다. 낭만적이거나 호전적이거나, 부드럽거나 딱딱하거나, 실용적이거나 폼 나거나 등의 이분법적 모순을 동시에 지녔으니까.

    양면성을 지닌 그 베레가 비행접시처럼 여러 패션 도시 상공을 날아 여러분의 정수리에 안착하기 위해 지금 착륙 신호를 보내고 있다. 베레 조종사들은 우리가 팔로잉 하는 디자이너들이다. 슬리먼 외에 스텔라 맥카트니, 소니아 리키엘, 랄프 로렌, 루엘라 바틀리 같은 베테랑들이 쟁반 날리기 게임하듯 이 패션 도시에서 저 패션 도시로 베레를 날렸다. 최신 경향을 LTE 플러스급으로 지구에 타전 중인 미국 ‘보그닷컴’은 올해가 시작되기 직전 베레 붐을 다뤘다. “베레, 비니를 밀어내고 대대적인 컴백 준비를 마치다!” 이 선언 뒤에 따른 문장은? “지구상에 당돌하면서도 수줍고, 지적이면서도 도발적이고, 감성적이면서도 현대적 면모를 동시에 갖춘 건 많지 않으나 베레는 명명백백 이 범주에 속한다.” 힘주어 멋 부린 듯 보이거나 불량해 보일 때도 있다며 베레의 무궁무진한 매력을 덧붙였다. 심지어 업타운과 다운타운 가릴 것 없이!

    많은 패션 품종이 그렇듯 베레 붐을 만끽하려면 약간의 역사적 지식이 필요하다. 복식사전을 뒤져보니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에 위치한 바스크 지방에 사는 농민의 모자’요, ‘둥글납작하고 부드러우며 챙이 없는 모자’가 베레다. 또 미군이나 한국군 등의 특전단 요원이 쓰는 모자인 동시에(한국군은 검은색, 미군은 초록색), 몽고메리 베레, 밀리터리 베레, 마린 베레, 세일러 베레, 팬케이크 베레, 그린베레 등 생각보다 다채로운 양상을 띤다. 내친김에 우리에게 무한 영감을 제공해온 은막의 스타들을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먼저 두 편의 프랑스 영화의 주인공들! 67년 영화 <로슈포르의 연인들>에서 쌍둥이로 출연한 브리짓 바르도와 프랑소와 돌리악부터 보자. 바닐라와 요거트 맛 마카롱 같았던 베레를 쓰자 움직임이 더 미묘하고 부드러우며 누군가에게 소개되길 기다리는 천생 요조숙녀였다. 반면 <몽상가들>에서 ‘베레 루즈’로 지칭되는 빨강 베레는 학생운동에 필사적이며 충동적인 에바 그린의 캐릭터에 제격. 그러나 내가 꼽는 발군의 베레는 <보니 앤 클라이드>. 여주인공 페이 더너웨이의 옷차림은 영화가 개봉된 67년 이후 지금까지 어느 시대에 다시 봐도 현대적이다. 그러니까 전설의 ‘보니 스타일’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베레 덕이다.


    베레를 맵시 있게 쓴 이방 여인들은 더너웨이 외에도 줄이 길게 늘어설 만큼 많다. 독일인(마를린 디트리히), 영국인(트위기부터 케이트 미들턴), 미국인(마돈나부터 모니카 르윈스키), 캐나다인(조니 미첼), 이태리인(미우치아 프라다) 등등. 여배우가 패션 여신으로 숭배되던 40~60년대만 해도 베레를 쓴 그들을 할리우드와 파리에서 마주치는 건 어렵지 않았다(브리짓 바르도, 로미 슈나이더, 샬롯 램플링, 마릴린 먼로, 로렌 바콜, 안나 카리나, 캐서린 헵번, 진 할로 등등). 남자 중에도 강렬한 베레 매력을 발산한 인물이 있었다. 파리를 방문할 때 베레로 예를 갖춘 윈저 공, 베레를 동그란 안경과 매치한 존 레논, 천재 예술가의 증표였던 파블로 피카소의 베레, 그리고 시가를 문 채 더없이 섹시했던 체 게바라의 베레 등등. 범위를 좁혀 내게 익숙한 패션 세상에서 베레를 추적해보니 마크 제이콥스의 루이 비통부터 떠오른다. 크리스티 털링턴과 케이트 모스에게 베레를 씌워 지극히 파리지엔다운 쇼를 발표했고(2000년 가을), 베르메르 화가들을 묘사하던 시기엔 커다란 찐빵처럼 축 늘어진 플레미시 베레를 아가씨들에게 씌웠다(20007년 가을). 거미줄조차 에펠탑처럼 드리워져 있을 법한 파리 골수 패션 하우스(소니아 리키엘, 장 폴 고티에 등등)에선 두말할 필요가 없다. 빠지면 섭섭할 액세서리를 하나 꼽으라면 그게 바로 베레다.

    아시다시피 베레는 지금 당신이 쓴 야구 모자나 스냅백(챙을 앞으로 해서 혓바닥처럼 위로 말아 올렸든, 요즘 ‘패션 꾸러기’들처럼 뒤로 돌려 썼든) 류의 미국적 문화와 거리가 멀다. 그래서인지 파리 같은 유행의 도시 젊은이들은 베레 붐을 선도하며 점점 미국화되는 지상에서 과거 프랑스 시대에 대한 향수와 상징으로 베레를 쓰는 눈치다. 실제로 요즘 파리지엔들 사이에서는 ‘베레 바게트’가 인기다. 날씨 좋은 주말에 사이클링 광팬들이 패션과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프랑스적 재능을 치하하자는 명목으로 30년대 옷차림으로 모양을 낸 채 자전거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행사. 다들 프라이탁 스페셜 캐리어 백에 바게트를 꽂곤 하는데, 여기서 베레는 스트라이프 티셔츠, 롤업 팬츠, 멜빵, 보타이, 콧수염 등과 함께 꼭 등장한다.

    런더너들 역시 프랑스적인 것들을 흠모했던 앞세대와 비슷한 방식으로 베레를 쓰는 중이다. ‘스타일닷컴’은 뉴욕 패션 위크에서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 쇼가 끝나자마자 ‘Berets: The Next Must-Have Hair Accessory?’란 질문을 던졌다. MBMJ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두 명의 영국 여자(루엘라 바틀리와 케이티 힐러)는 발랑 까진 소녀들을 위해 검정 베레에 징을 박고 펀칭을 낸 뒤 단추와 옷핀과 배지까지 덕지덕지 달았다. 또 지난 런던 패션 위크에 참여했던 파격적인 젊은 디자이너들(아스트리드 앤더슨, 시블링, 패션 이스트 멤버들 등등) 역시 베레를 포함시켰다(‘섹스 피스톨즈’ 조니 라튼의 베레처럼 혁신적이고 거친 면이 충만한 그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베레를 쓰고 싶은가? 구찌나 생로랑? 페이 더너웨이 혹은 체 게바라? 융통성 있는 패션 세계에서 나는 세 번째 옵션을 제안한다. 두 가지를 혼합하는 것. 생로랑처럼 히피 미니 드레스에 야상을 걸친 뒤 베레를 쓰면 끝이다. 젊은 성적 매력과 70년대 감수성을 지닌 채 헝클어진 머리에 베레를 한쪽으로 눌러쓴 아가씨! 말만 들어도 끝내주지 않나? 이네즈 베레를 쓴 내 친구는 이렇게 조언했다(그는 모자가 잘 어울리는 두상을 타고났기에 평소 비니, 페도라, 뉴스보이캡, 야구모자 등을 마다하지 않는다). “맥카트니처럼 단정한 카멜색 캐시미어 니트와 회색 스커트에 쓰면 보니 스타일을 즐길 수 있어. 이런 방식이야말로 모던 절충주의지.” 한 주제로 빼입는 것처럼 손발이 오그라드는 옷차림도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베레를 비니처럼 쓰면 근사하지만 페도라처럼 쓰면 곤란해!” 하긴 실용성이야말로 오래 가고 유용하다는 점에서 베레는 드라마틱하고 부피가 큰 페도라보다 현실적인 물건이다. “서울 힙합 ‘씬’에서도 스냅백이 밀리는 추세고 베레가 비니와 함께 그 자리를 점령하는 분위기야.” 수트엔 뉴엘라가 진리라고 단언했던 젊은이들이 말쑥한 정장 한 벌에 베레를 쓰게 될 장면이 눈에 선하다.

    고백하자면 나는 ‘Francophile’ 성향이 진하다. 프랑스 영화는 물론 파리에서 발간된 패션지들을 즐겨 보다가 베레를 쓴 인물이 나오면 늘 캡처하거나 스크랩했고, 패션 화보를 찍을 땐 강동원이나 주지훈 같은 톱 모델들에게 베레 씌울 틈을 호시탐탐 노렸다. 정작 두상이 예쁘지 않아 교련 수업 외에 베레를 써본 역사가 없지만, 베레를 쓰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타이밍이 없는 요즘, 비로소 대리만족의 기회를 찾았다! 몇 시즌째 컨설팅 중인 디자이너 김서룡의 올가을 컬렉션에 베레를 곁들이기로 한 것(김서룡은 평소 검정 베레와 검정 야구모자를 번갈아 쓴다). 디자이너들이 흔히 자신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베레야말로 그의 시그니처인데다, 그의 아카이브에 늘 포함돼 있었으니 동시대성과 명분까지 충분했다. “쫀쫀한 니트, 빳빳한 펠트, 굵고 헐렁한 손뜨개 등으로 베레를 만들어왔었죠.” 김서룡의 얘기다. “낭만적인 뭔가를 표현한다고 할까요?”

    바야흐로 둥글납작한 모자의 패션계 접수가 코앞이다. 프랑스 베레 제조사들에 따르면 예전에 비해 판매가 증가하는 중. 베레 생산의 메카인 프랑스 남서부 오를롱 생 마리 지방의 베레 회사들은 신용규제 정책 실시 이후 베레 매출이 두 배나 뛰었다. 십수 년 전만해도 회사를 접을 뻔했지만 지금은 매년 3,000~4,000개 이상이 생산되고 있단다. 이제 먼 과거와 지구 반대편을 헤집고 다니지 않아도 고개만 돌리면 베레를 볼 수 있다. <진짜 사나이> 여군 특집부터 홍대 힙합 뮤지션은 물론 서울 패션 위크 안팎까지. 마지막으로 나는 멋쟁이 친구와 김서룡에게 베레에 관한 꽤 유명한 속설 하나를 전했다. 베레를 기울여 접는 방향이 왼쪽이냐 오른쪽이냐는 자신의 정치적인 성향을 알리는 표식이라고 하는데, 당신의 베레는 패션 좌파인가 우파인가? 평소 김서룡은 사르트르와 피카소처럼 평평하게 쓰는 편. 하지만 친구의 대답은 패션 괴짜답게 짓궂었다. “나는 반골좌파 기질이 다분한데 왜 오른쪽으로 접었지?”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신광호
      사진
      Kim Weston Arn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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