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플레어 팬츠

벨바텀, 판탈롱, 나팔바지. 다양한 이름을 가진 추억의 팬츠가 돌아왔다.
70년대 스타일에 2015년의 동시대적 감각이 더해진 플레어 팬츠의 귀환.

페이즐리 패턴 블라우스와 크롭트 니트 톱, 프린트 실크 와이드 팬츠는 모두 미우미우(Miu Miu), 스웨이드 프린지 재킷과 프린지 숄더백은 생로랑(Saint Laurent), 선글라스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at Sewon ITC), 빈티지 패브릭 굽의 플랫폼 샌들은 프라다(Prada).

“나를 받아달라고 부탁하는 걸 듣고 싶은 거니? 벨바텀 블루스. 넌 나를 울게 해.” 1971년 청년 에릭 클랩튼은 청바지 하나에 가슴 아픈 사랑 노래를 써 내려갔다. 모델이자 비틀즈 멤버 조지 해리슨의 아내였던 패티 보이드와 금단의 사랑에 빠져 있던 클랩튼이 보이드를 위해 ‘벨바텀’ 청바지를 사면서 흐느끼며 썼다는 그 노래 ‘Bell Bottom Blues’. 노래를 발표한 지 8년 뒤 둘은 웨딩마치를 울렸으니 바지 한 벌이 사랑의 오작교가 돼준 셈이다. 그리고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 70년대 유행과 함께 벨바텀 팬츠가 유행의 부메랑을 타고 되돌아왔다.

나팔바지, 플레어 팬츠, 판탈롱 등으로 불리는 벨바텀의 유행은 지난 몇 년간 끊임없이 예고됐다. 수많은 디자이너들과 스타들이 심심하면 나팔바지의 귀환을 노래 불렀다. 영국 보그닷컴에서 ‘Flare’라는 단어를 검색해보자. 2013년 2월엔 수키 워터하우스가 플레어 팬츠를 입고 사진을 찍었고, 2011년엔 시에나 밀러가 플레어 데님을 입고 포즈를 취했다. 2008년엔? 슈퍼 나팔바지라 불러야 할 ‘슈퍼 플레어 데님’ 스타일이 유행했다. 그동안 잠깐씩 등장했던 플레어 팬츠의 유행이 불발로 끝난 것은 스키니 팬츠라는 강력한 유행 앞에서 번번이 제지당했기 때문. 제아무리 피비 파일로가 신발을 덮는 펄렁펄렁한 플레어 팬츠를 쇼에서 선보이고, 스키니 팬츠를 누구보다 즐겨 입었던 케이트 모스가 근사한 플레어 데님을 입고 나타나도, 현실의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날씬하게 해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는 스키니 팬츠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하지만 올봄만은 다르다. 원조 벨 바텀이 유행했던 70년대 스타일이 돌아오면서 플레어 스타일도 자동으로 따라왔다.

루이 비통의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발렌시아가에서 일할 때 전 세계 멋쟁이 여자들은 적어도 팬츠만큼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알아서 가장 세련된 실루엣에 가장 늘씬한 실루엣을 만들어주는 팬츠를 마법의 맷돌처럼 쏙쏙 뽑아내주었기 때문이다. 그 맷돌이 이제는 루이 비통에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선보인 하이웨이스트의 벨바텀은 누구나 선뜻 따라 입기엔 어려운 팬츠다. 높은 허리선에 지퍼 장식이 더해졌고, 다리를 짧아 보이게 하는 애매한 길이도 걱정스럽다. 하지만 얼마 전 <보그> 팬츠 기사를 위해 봄 신상 팬츠들을 죄다 입어본 패션 칼럼니스트 황진선은 이렇게 전했다. “모나코에서 성대하게 치른 크루즈 컬렉션의 판매용 버전 바지를 입어봤죠. 허리선이 약간 높았는데, 허리부터 무릎까지는 딱 맞고 밑단이 살짝 퍼지는 디자인. 일자와 벨바텀의 중간쯤 되는 팬츠였죠.” 그 팬츠를 들고 탈의실로 향했던 그녀의 반응은? “거울 속 내 다리는 허벅지 둘레가 절반으로 줄어든 채 젓가락처럼 쭉 뻗어 있었고, 골반과 엉덩이는 적절한 곡선을 그리고 있어 오히려 날씬해 보였어요(이게 바로 하이웨이스트 팬츠의 매력)! 그 바지를 통해 한동안 잊고 있던 감각, 편안해서 멋스러운 것 말고 멋 부려서 멋스러운 것의 감흥을 되찾았죠.” 팬츠 한 벌이 선사할 수 있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고 그녀가 전했다.

아직 반신반의하고 있다면, 셀린의 피비 파일로가 선보인 팬츠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녀가 제안한 것은 일명 크롭트 플레어(Cropped Flare). 그녀는 발끝까지 덮을 정도로 길게 떨어지는 플레어 팬츠 대신 헴라인이 발목 위에서 찰랑이도록 만들었다. 피비의 새로운 실루엣이 이번 시즌을 위한 런웨이에 등장했을 때, 모든 이들이 피비의 제안에 설득당한 것은 아니었다. 쇼가 끝나자마자 아시아 프레스들은 발끝까지 가려야 그나마 길어 보일 다리를 중간에 싹둑 자르는 실루엣이 먹힐 리 없다고 품평했기 때문.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지난 2월 시베리아의 칼바람이 몰아치는 뉴욕 패션 위크 주변에서 가장 눈에 많이 띈 팬츠가 바로 이 크롭트 플레어. 그중에서도 블로거인 렌드라 메딘의 스타일은 시선을 집중시켰다. 아킬레스건을 스치는 하이웨이스트 플레어 데님 팬츠에 클로그 슈즈를 신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지금 가장 쿨한 스타일 그 자체였다. 물론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녀가 크롭트 플레어 데님 팬츠를 입고 찍은 모습을 올린 인스타그램에는 ‘인터넷 워리어’의 악플이 잇따랐다. 덕분에 그녀는 새로운 플레어 팬츠를 위한 잔다르크가 됐다. “난 이 팬츠들을 사랑한다. 이 팬츠가 바로 나 자신이다. 물론 보기에 좋지 않을 수는 있지만 쿨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의 블로그에 팬츠에 대한 변을 포스팅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 팬츠들이 나를 더 흥미롭게 만들어준다. 그것이야말로 스타일의 목적 아닌가.”

제스키에르와 파일로만으로도 충분한 플레어 팬츠 원정대엔 기세 좋은 아군이 합세했다. 구찌와 생로랑에서 판탈롱 팬츠의 유행을 이끌었던 톰 포드 역시 자신의 장기를 마음껏 자랑하며 벨바텀을 부활시켰으며, 아크네 스튜디오, 데릭 램, 발맹, 알투자라, DVF, 알렉산더 맥퀸, 에밀리오 푸치 등도 벨바텀 스타일을 선보였다.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패스트 패션 브랜드에서도 나팔바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이웨이스트 데님 팬츠와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입고 포즈를 취한 망고 광고 속 안나 이버스는 얼마나 멋진가. 또 스웨이드 프린지 재킷을 입고 플레어 데님을 입은 자라 룩북 속의 샘 롤린슨은 2015년 봄의 쿨 걸 그 자체다. 게다가 이 멋진 유행을 고작 6만9,000원이란 착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반갑다.

우리는 2000년대 중반 프리미엄 데님 브랜드들이 선보였던, 밑위가 유난히 짧았던 플레어 팬츠들을 기억한다. <내 이름은 김삼순> 속 정려원이 입었던 허드슨 진을 사기 위해 압구정동 데님 숍을 뒤지던 여성들이 얼마나 많았나. 그 팬츠를 입고 허리를 숙일 때마다 상의 뒤를 억지로 끌어 내리던 불편함도 기억한다. 그때와 달라진 점이 바로 높아진 허리선. 미국 <보그>는 높아진 허리선의 플레어 팬츠가 올봄 근사한 실루엣을 완성한다고 설득에 나섰다. “높아진 허리선이 지금 가장 패셔너블해 보인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높아진 허리선은 다리를 3m 정도 길이로 보이게 한다. 그러니 제발 우리가 전하는 굿뉴스를 듣길 바란다. 그 어떤 것도 허리를 날씬하게 만들어주는 하이웨이스트 진 한 벌만큼 몸을 예쁘게 만들어주진 않는다!”

전 세계 여성들의 쇼핑 베스트 프렌드인 네타포르테는 이렇게 전했다. “60년대와 70년대 플레어 팬츠가 그토록 높은 인기를 누렸던 중요한 이유는 바로 플레어 팬츠야말로 몸을 예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물론 스키니한 팬츠들이 여전히 스타일리시해 보일지 모르지만, 다리를 짧게 보이게 하는 건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70년대 스타일 아이콘이었던 제인 버킨과 프랑수아즈 아르디 사진 속 팬츠들을 기억한다면, ‘배바지’와 ‘나팔바지’가 만났을 때의 시너지를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인 점은 과거와는 달리 이번 유행은 올봄이 지나도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 프리폴 컬렉션은 물론, 올가을 컬렉션까지 플레어 팬츠는 꾸준히 등장했다. 런던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최유돈 역시 가을 컬렉션을 플레어 팬츠로 가득 채웠다. “2000년대 초반, 톰 포드가 생로랑 남성복에서 선보였던 벨바텀과 스텔라 맥카트니가 자신의 라벨 초반에 선보였던 플레어 팬츠 이후, 그 실루엣은 제 관심권에서 사라졌죠.” 런던 달스턴 스튜디오에서의 쇼가 끝난 후, 그가 컬렉션에 플레어 팬츠를 등장시킨 이야기를 들려줬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나팔 실루엣이 ‘Right’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게다가 저패니즘 메타볼리즘이라는 70년대 미술 사조를 영감으로 삼았기에 70년대 팬츠 실루엣을 차용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는 익숙한 플레어 팬츠 스타일에 크롭트 플레어를 더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그냥 그 실루엣이 가장 자연스러워 보였죠.” 그의 미카도 실크 크롭트 플레어는 요즘 바이어들 사이에서 인기 상승 중이다.

“판탈롱은 원래 프랑스어에서 ‘바지’를 통칭하는 것이지만, 외국으로 퍼지는 과정에서 밑 부분이 넓은 바지의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판탈롱 혁명은 이브 생 로랑의 시티 팬츠 스타일에서 비롯된다.” 한창 전 세계가 벨바텀 열풍에 빠져 있던 1976년 4월 16일 <동아일보>는 플레어 팬츠의 유행을 이렇게 전했다. “생 로랑의 이 새롭고 멋있는 시티 팬츠의 제안에 따라, 그 당시 미니를 대신할 만한 여성복의 새로운 기본 패턴이 되었다.” 아마도 기자는 71년 무슈 생 로랑이 선보였던 ‘40년대 컬렉션’의 벨바텀을 지칭했을 것이다. 40년대를 재해석한 당시의 이브 생 로랑 스타일은 절정의 인기를 누렸으니까. 그리고 40년 뒤인 올봄 ‘시티 팬츠’가 되돌아왔다. 에릭 클랩튼처럼 눈물까지 흘릴 순 없더라도, 멋 좀 부리는 여성들이라면 이 멋진 유행에 환호의 박수를 보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