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테라피

한곳에 얽매이기 싫어하고 복잡한 건 딱 질색인 디지털 유목민을 위한 감성 충전소, 아트 테라피가 화제다.
컬러링 북부터 페이퍼 커팅까지 마음 가는 대로 칠하고 오리다 보면,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스트라이프 원피스는 비비안 웨스트우드 앵글로매니아.

스트라이프 원피스는 비비안 웨스트우드 앵글로매니아.

온 가족이 둘러앉아 식사하면서 오손도손 대화를 나눈 게 언제였나? 내 손 안의 스마트폰이 친구요, 애인이자 선생님인 현대사회에서 밥상머리 교육은 사라진 지 오래다. 친구를 만나도 그룹 채팅에 진도를 맞추기 급급한 두 눈은 스마트폰에 고정돼 있는 ‘웃픈’ 상황의 연속. 이런 행태를 함부로 나무랐다간 오히려 촌스러워지는 우리는 문자 그대로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 없인 1시간은커녕 1분도 못 견디는 디지털 중독의 부작용은 온몸 구석구석 자리 잡은 지 오래. 시력 교정술로 되찾은 ‘광명’은 하루가 다르게 흐려지는 데다 두 팔목은 시큰거리며, 잠들기 직전까지 액정을 쳐다보다 떨어뜨리는 바람에 이마엔 시퍼런 멍 자국이 훈장처럼 남아 있다.

취미 생활이 곧 스마트폰이 돼버린 피폐한 일상. 거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컬러링 북이 연일 화제다. 지난해 8월 출간한 조해너 배스포드의 <비밀의 정원>이 아직까지 국내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10위권 안에 머물러 있음은 한국에 불어닥친 컬러링 열풍이 반짝하고 사라지는 신기루가 아님을 증명한다. 출장 차 다녀온 런던에서도 컬러링 북의 인기가 대단했다. 런던의 대표적 쇼핑 명소인 셀프리지 백화점 지하 서점엔 컬러링 북만을 따로 모아놓은 ‘아트 테라피’ 섹션이 마련돼 있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셀프리지 서점 관계자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인기 서적으로 쿡 북(요리책)이나 가드닝 북(정원 가꾸기 책)보다 더 잘 팔리는 실용서”라며 컬러링 북 열풍에 적극 동의했다. 2015년 힐링의 또 다른 이름으로 떠오르며 ‘색칠 공부’ 신드롬을 몰고 온 아트 테라피의 현주소.

 

마음을 치유하는 아트 북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겠지만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다. 사람마다 섭취한 음식물의 소화 능력이 다르듯 스트레스를 소화하는 능력 또한 다르기에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려면 적절한 취미 생활이 동반돼야 한다. 정신과 전문의들이 취미 생활을 통한 ‘주의 전환’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거금을 투자한 취미 생활의 시작은 늘 창대했지만,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쉽지 않아, 혹은 귀찮아서 금세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 결국 일상의 스트레스는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채 마음을 콕콕 찌르는 바늘로 남아 있게 되고 우리에겐 여전히 이렇다 할 취미 생활이 없다. 이력서를 작성하는 취업 준비생에게 가장 난감한 공란도 알고 보면 ‘취미 생활’일 때가 많다. 스마트폰으로 운동과 독서를 대신하지만 뭔가 제대로 해냈다는 성취감이 들지 않고 가라앉을 뿐이다.

하지만 색칠 공부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다. 준비물은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 컬러링 북과 색연필 두세 자루면 충분하고 정해진 분량도 없다. 오늘 이만큼 칠했다가 내일 다시 이어가도 문제될 게 없으니 할당량을 못 채웠다고 스트레스 받을 일도, 색감이 별로라고 꾸중 들을 일도 없다. 프랑스 화장품 꼬달리 홍보팀 김소희 대리는 색칠 공부의 매력을 ‘무념무상’이라 정의한다.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하다 보면 걱정스러운 일이나 스트레스 받는 상황을 잊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죠.” 컬러링 북이 이토록 주목받는 건 지속 가능한 취미 생활이 돼주기 때문이다. 매년 신제품 출시와 맞물려 뷰티 에디터들을 대상으로 다채로운 원데이 클래스를 선보이는 겐조 퍼퓸이 준비한 강좌도 아트 테라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안티 스트레스 민화 컬러링’. 두 아이의 엄마이자 워킹우먼인 겐조 퍼퓸 박현주 차장은 “그동안 취미 생활을 즐기는 건 사치라고 여겼지만 색칠 공부는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해보니 고도의 집중력과 마음의 안정을 얻었어요. 기자들의 마감 스트레스를 가라앉히는 데 이보다 적절한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죠.” 풍문으로 들었던 색칠 공부의 기적은 진실이었다. 화선지에 그려진 도안에 색을 넣는 아주 간단한 작업인데, 두 시간이 그리도 훌쩍 지나가버릴 줄 몰랐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곳에 집중하다 보니 식욕 억제 효과도 상당한데, 한창 허기질 오후 4시였지만 테이블 위에 세팅된 간식에 손을 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집중력 강화, 마음의 안정, 식욕 억제라는 색칠 공부의 마력은 콧대 높은 스타들의 마음까지 움직였다. F(X)의 엠버를 비롯, 아이유도 ‘잠이 안 올 땐 색칠색칠’이란 코멘트와 함께 자신의 작품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모델 박성진도 그림 그리기를 통해 마음을 치유한다.

 

컬러링 북, 제대로 즐기려면?

“자, 색연필을 들고 책을 펼치세요.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잠시 꺼두세요. 모니터와 키보드가 아닌, 손과 종이를 이용해 정신을 집중해서 색칠을 하면 할수록, 자꾸 생각나는 화나고 짜증스러운 일들, 일상의 자잘한 걱정과 긴장이 서서히 지워집니다.” 컬러링 북 열풍의 주역 <비밀의 정원>의 저자 조해너 배스포드의 말처럼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멀어지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까? 제니하우스 청담점 메이크업 아티스트 전성희 실장은 뷰티 업계에서 소문난 컬러링 마니아다. 한창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고통받던 시절, 지인의 추천으로 시작한 색칠 공부가 이젠 그녀의 일상이 됐다. “색칠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면 잡념이 사라지는 것은 기본, 색을 가지고 노는 능력이 향상돼 화장할 때도 굉장히 도움이 되더군요.” 아닌 게 아니라 컬러링 북은 메이크업 전공자들에겐 필독서가 됐다. 글자라곤 찾아볼 수 없지만 컬러 감각을 키우는 데 아주 유용하단다. 스타일링의 기본은 컬러 매치이기에 패션을 즐길 때도 물론 도움이 된다. 손재주가 없어 도전을 망설이고 있다면 동양화 아티스트 이영선 작가의 조언이 위안이 돼줄 것이다. “꼭 다양한 색을 쓰라는 법은 없어요. 여백의 미를 표현하는 블랙&화이트 모노톤 작업으로 시작하는 것도 한 방법이에요.” 처음부터 컬러링 북을 구입하지 않아도 된다. 인터넷에 올라온 도안을 프린트해서 충분히 연습한 다음 전문 서적으로 넘어가면 벽에 걸어 놓고 싶을 만큼 멋진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아트 테라피, 어디까지 해봤니?

컬러링 북의 선풍적 인기로 최근 페이퍼 커팅, 민화 그리기 등 아트 테라피의 영역이 확대됐다. 손재주 좋기로 소문난 <보그> 패션 뉴스팀 막내 기자는 요즘 종이 자르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단다. “색칠 열풍으로 컬러링 북을 잔뜩 구입했지만 완벽주의 성향 때문인지 마음 편하게 집중할 순 없었어요. 그러던 중 페이퍼 아티스트 엘사 모라의 인스타그램(@elsamorainstant)을 보고 이거다 싶었죠.” 페이퍼 커팅의 묘미는 이러하다. “컬러링은 정해진 룰이 없어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건지 감이 잘 안 오는데, 커팅은 나날이 실력이 발전하는 게 보이죠.” 처음엔 일직선도 잘라내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곡선도 식은 죽 먹기란다. 꼬달리 김소희 대리는 도안을 직접 그리는 DIY 작업도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평소 틈틈이 그려두었다가 한날 몰아서 각각의 덩어리를 이어 붙이듯 작업합니다. 과정은 힘들지만 누군가 그려놓은 밑그림에 색칠을 하는 것보다 200배 이상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어요.”

매서운 한파를 핑계로 유일한 취미 생활이던 테니스를 그만두니 몸무게는 정확히 2kg 늘었고, 시력은 1.0에서 0.7로 떨어졌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은 대가는 생각보다 끔찍했고, 몸은 편했을지 몰라도 마음은 불편했다. 아트 테라피는 한곳에 얽매이기 싫어하고, 복잡한 건 딱 질색인,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디지털 세대를 위한 맞춤 취미 생활이다. 정답은 없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칠하고 오리다 보면,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