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시라의 황금기

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 채시라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희비극을 넘나드는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신선함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새로운 얼굴로 다가오는 이 매력적인 배우의 인생은 또 한 번 황금기를 맞았다.

메시 플레어 톱은 노케제이(Nohke J), 페티코트 형태의 베이지 튤은 진태옥(Jintéok), 골드 스틸레토는 라펠라(La Perla with Giuseppe Zanotti), 레드 퀄팅 백은 디올(Dior). 

메시 플레어 톱은 노케제이(Nohke J), 페티코트 형태의 베이지 튤은 진태옥(Jintéok), 골드 스틸레토는 라펠라(La Perla with Giuseppe Zanotti), 레드 퀄팅 백은 디올(Dior).

채시라는 요즘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피 뜨거운 여성 3대의 인생을 담은 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 안국동 요리 선생 강순옥(김혜자)의 사고뭉치 둘째 딸 현숙을 맡은 그녀는 매일같이 뛰고 달리는 중이다. 6m 높이의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연분홍 ‘쓰레빠’가 찢어질 때까지 경찰과 맹렬한 추격전을 벌였다. “저 달리기 좋아해요. <천추태후>에서 말 타고 활 쏘는 사극 액션 하는 걸 보고 무술감독이 그랬어요. 저랑 현대 액션물 한 번 하고 싶다고. 그런데 여기서 액션을 이렇게 많이 할 줄은 몰랐죠.” 채시라는 가느다란 손목을 내밀어 아직도 남아있는 투혼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활력이 넘쳤다. 방송 3회 만에 시청률 1위에 오른 이 기묘한 드라마에서 채시라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시나리오를 봤는데 이건 안 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아주 웃긴데 또 슬퍼요. 제가 찾던 게 바로 이런 거란 걸 그때 알았죠. 제 안에서 ‘하고 싶어! 내가 꼭 해야겠다.’ 막 그런 에너지가 나오더군요. 지금 시점의 저를 보여줄 대표작이 될 거예요.”

일상에서조차 모범적인 생활을 이어온 이 성실한 여배우에게서 그토록 변화무쌍한 표정과 거침없는 말투가 튀어나올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저축은행의 부도로 집안의 전 재산을 날린 현숙이 만회하기 위해 불법 도박판에 뛰어들어 타짜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은 압권이다. 5분도 되지 않는 이 찰나의 장면에서 채시라는 한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을 몰아치듯 한 번에 쏟아낸다. 전작 <내 딸 서영이>와 <브레인>에서 따뜻하면서도 감각 있는 연출을 보여준 유현기 PD는 고속 카메라를 이용해 그 만화 같은 설정을 더욱 코믹하게 잡아냈다. 이 베테랑 배우에겐 연출가가 별다른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었다. 현장에서 채시라는 이미 현숙이었다. 어떤 감정도 즉흥적으로 표출해냈다. 마침내 ‘장땡’이 나오는 순간, 한쪽 주먹을 불끈 쥔 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쾌재를 부르던 과장된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코믹 연기를 해보고 싶었지만, 사실은 좀 두려웠거든요. 내가 과연 억지스럽지 않게 잘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마음껏 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지니까, 아이디어가 자꾸 나오더라고요.”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 시트콤조차 출연한 적 없는 채시라의 이 같은 변신은 신선함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생각해보라! 그녀는 한때 모든 남자의 첫사랑이었다. 84년 가나 초콜릿 CF에서 노을 지는 풍경을 배경으로 긴 생머리를 휘날리던 아름다운 소녀를 아직도 기억한다. 무려 15년간 한 브랜드의 화장품 모델로 활동해온 기록은 지금껏 어떤 여배우도 넘지 못했다. MBC 베스트극장 <샴푸의 요정>에 출연한 직후엔 실제로 샴푸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늘 눈부신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상업광고 속 15초 여신으로 머무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채시라는 연기력으로 승부하는 배우였다. 한국 드라마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여명의 눈동자>에서 그녀는 비극적인 시대를 살아간 순수한 여옥이었고, <아들의 여자>에선 야망에 불타던 농염한 여인이었다. <아들과 딸>에 함께 출연한 김희애가 수수한 들꽃 같은 이미지였다면, 세련된 서울 깍쟁이 미현 역의 채시라는 화려한 장미 같았다. 주변부의 인생을 연기할 때도 그랬다. 지금은 사라진 옥수동 달동네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서울의 달>에서 구로공단 경리 사원 영숙은 가난했지만 도도한 매력이 있었다. 자신을 짝사랑하던 건설 현장 노동자 춘섭(최민식)을 거지 깡통 보듯 하던 그녀는 병문안을 가서 이렇게 쏘아붙였다. “왜 그렇게 자꾸 김밥 옆구리 터지는 말씀만 하세요? 다쳐서 누워계신 분한테 이런 말씀 드리긴 뭐하지만요, 저는요, 이게 다 인과응보의 결과라고 봐요. 왜 오르지 못할 나무는 자꾸 쳐다보세요? 나는 정말, 나무 입장에서 너무 기분 나빠요.” 그 순간, 지그시 눈을 감은 춘섭의 귓가에 울려 퍼지던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 그렇게 야무지게 굴던 영숙은 제비족 홍식(한석규)에게 연심을 품어버린 어설픈 헛똑똑이기도 했다. “아, 김운경 선생님 작품! 그때 되게 재미있었죠. 작품도 좋았고, 같은 학교 연영과 출신이 었던 한석규 선배님, 최민식 선배님, 그리고 원희랑 친했어요. 촬영 끝나면 회식 갔다가 같이 디스코텍도 가고, ‘바이바이’ 하고 헤어지고. 그렇게 넷이서 몰려다녔어요.”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대본을 쓴 김인영 작가는 극을 이끌어가는 현숙 역으로 처음부터 채시라를 마음에 두었다. <서울의 달>의 영숙은 물론, <아파트>의 선머슴 같던 홍두와 <여자 만세>의 어설픈 노처녀 다영이 모두 현숙의 캐릭터 속에 녹아 있다. 일종의 종합 세트다. “맞아요. 작가님을 만났을 때 그 드라마들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런 모습이 기억에 남았나 봐요. 현숙은 거기에서 더 업그레이드된 캐릭터고요.” 극 중에서 예측 불허의 행보를 이어가는 다혈질 천방지축 현숙은 상당히 다중적인 인물이다. 거침없이 당당하면서도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있고, 바보스러울 만큼 순진하지만 속물근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때로는 한심할 만큼 무식하고 철없다. 그럼에도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푼수다. 여자로서의 매력도 유지하고 있다. 천연덕스러운 모습의 그런 현숙을 보면서 채시라가 아닌 다른 어떤 배우를 떠올린다는 건 이제 불가능하다. “사람은 누구나 여러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잖아요. 현숙 역시 제 안의 일부죠. 저희 신랑은 맨날 그랬어요. ‘너의 그 인간적인 빈틈과 허당 같은 웃긴 모습을 방송에서 한번 좀 보여줘야 하는데…’ 하하.”

섬세한 시스루 주름 장식이 옆선을 장식한 섹시한 롱 드레스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섬세한 시스루 주름 장식이 옆선을 장식한 섹시한 롱 드레스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꽃자수 레이스가 수놓인 톱은 라펠라(La Perla), 마름모꼴 술이 달린 펜슬 스커트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꽃자수 레이스가 수놓인 톱은 라펠라(La Perla), 마름모꼴 술이 달린 펜슬 스커트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이번 드라마엔 한 시대를 풍미한 쟁쟁한 배우들이 모두 출연한다. 한국의 어머니상을 대표하는 김혜자가 장미희의 가슴팍을 향해 하이 킥을 날리고, 장미희는 그 유명한 수상 소감 “아름다운 밤이에요”를 드라마 속 대사로 천연덕스럽게 내뱉는다. 채시라의 언니로 출연하는 도지원, 그리고 도지원의 상대역인 손창민과 최근 다시 등장한,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 이순재까지! 한 작품에서 이들을 볼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멤버가 진짜 좋아요. 김혜자 선배님과 꼭 한 번 연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같은 작품에 출연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장미희 선배님도 패션쇼장에서만 서너 번 마주쳤을 뿐이죠. 손창민 선배님과는 88 서울올림픽 자원봉사단 모집 포스터 촬영하며 한 번 만났죠. 청춘스타였잖아요. 하하. 전국이 그 포스터로 도배되고 그랬어요.”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파 연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다 보니 촬영 현장은 늘 순조롭다. 밤샘 촬영을 기본으로 하는 미니시리즈지만, 이 드라마만큼은 예외다. “밤을 안 새우고도 미니시리즈를 찍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웬만하면 자정을 넘기지 않고요. 배우는 물론 스태프들까지, 모두의 힘이죠.”

하지만 촬영이 끝난 후에도 두 아이의 엄마로서의 일상은 남아 있다. “쉴 때는 매일 막내 숙제를 봐줬는데, 요즘은 일주일에 한두 번이에요. 그거라도 해야죠. 그저께는 인터넷으로 주문한 미술 준비물이 잘못 왔기에 새벽 5시에 그거 체크하고.” 초등학교 저학년인 둘째 채민이는 아직 엄마가 출연하는 드라마를 보지 못했다. ‘15세 이상 관람가’이기 때문이다. “전 그걸 좀 지키는 편이에요. 물론 다른 집 부모님들이 아이랑 같이 보는 건 괜찮아요. 잘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어른이 설명해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제 자식에게 보여주기엔 교육적인 문제가 있죠. 이번 드라마에선 제 말투가 거칠잖아요. 평소 엄마 모습과는 다르다 보니 아이가 오해하겠다 싶어, 그 시간에 <변신자동차 또봇>을 보게 해줘요. 웬 떡인가 하고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웃음)” 어린 아들은 그래도 엄마가 배우 채시라라는 사실이 마냥 자랑스럽기만 하다. 중학교 2학년인 첫째 채니는 보다 이성적으로 배우로서의 엄마를 바라본다. “어제는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친구가 그러는데 엄마 진짜 연기 잘한대.’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했는데, 기분이 참 뿌듯하면서도 묘하더라고요.”

학생 잡지의 모델로 처음 데뷔했을 때, 채시라도 지금의 딸과 같은 나이였다. “중학교 2학년 여름, 8월호였어요.” 응모 상품을 타러 잡지사에 들렀다가 바로 다음 달 표지 모델로 발탁된 사연은 유명하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그녀의 어린 시절 사진들은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또래보다 한 뼘쯤 큰 키에 새하얀 얼굴과 깡마른 몸을 한 채시라는 친구들 사이에서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미국 드라마의 슈퍼히어로 ‘원더우먼’으로 불렸다. 별무늬 팬티 차림으로 하늘을 날던 주인공은 미스월드 USA 출신의 린다 카터였다. “수업 중에 어디 불이 났다고 하면 친구들이 ‘원더우먼, 빨리 불 끄고 와’ 그랬어요. 하하. 그런데 전 그 별명이 좋았어요. 린다 카터가 무척 예뻤거든요.” 수줍음 많은 얌전한 여학생이었지만, 채시라는 단연 돋보였다. 선생님들은 유독 그녀를 예뻐했다. 공부 잘하고 성실한 데다 예쁘기까지 한 모범생이었으니 당연할 수밖에.

채시라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방학 중에 보낸 편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편지에 적힌 문구 때문이다.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칠 미인 시라에게.’ 그로부터 몇 년 후, 채시라는 정말 유명한 스타가 됐고, 그렇게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간절히 이 일을 바라거나 목표를 갖고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흘러갔죠.” 만약 딸아이가 모델이나 배우를 꿈꾼다면? 요즘 10대의 최고의 꿈은 TV에 나오는 스타가 되는 것이다. “글쎄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몰라도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다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모습만 보지만, 그 이면엔 얼마나 힘든 시간이 있는데요. 인내심 없이는 힘들어요. 버티는 힘이 있어야 오래가는 것 같아요.”

레이스 톱과 버튼 장식 롱스커트는 디올(Dior), 골드 스트랩 슈즈는 라펠라(La Perla with Giuseppe Zanotti).

레이스 톱과 버튼 장식 롱스커트는 디올(Dior), 골드 스트랩 슈즈는 라펠라(La Perla with Giuseppe Zanotti).

잔잔한 꽃 자수가 양옆에 들어간 슬리브리스 드레스는 디올(Dior), 블랙 쇼츠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프린지 장식 슈즈는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

잔잔한 꽃 자수가 양옆에 들어간 슬리브리스 드레스는 디올(Dior), 블랙 쇼츠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프린지 장식 슈즈는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

안타깝게도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현숙에게는 그런 운명적인 기회가 없었다. 감수성 풍부하고 춤 잘 추던 끼 많은 열일곱 소녀 곁엔 나말년(서이숙)이란 폭압적인 교사가 있었을 뿐. 노골적으로 자신을 미워하던 교사로 인해 우울한 사춘기를 보내야 했던 현숙에게 유일한 희망은 80년대를 풍미한 꽃미남 가수 레이프 가렛이었다. 채시라 역시 누군가의 열렬한 팬이던 시절이 있었다. “송승환 선배님을 좋아했어요. 연약한 청춘의 표상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연극 <아마데우스>를 할 땐 일부러 찾아가서 보기도 했죠.” 하지만 누구보다 그녀를 사로잡은 건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학창 시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외국 노래를 들으며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던 그녀는 마이클 잭슨의 뮤직비디오를 본 순간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세상에, ‘어쩜 저렇게 춤을 잘 추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니까요. 되지도 않는 걸 막 따라 해보기도 하고. 하하.” 마이클 잭슨이 한국을 찾았을 땐 그야말로 꿈이 이뤄진 기분이었다. “내한 공연은 두 번 다 갔어요. 96년에 첫 내한했을 땐 악수도 하고 같이 사진도 찍었는데… 공연을 기획하신 분이 무대 뒤에서 따로 자리를 마련해줬거든요. 아, 그때 찍은 사진을 못 받아온 게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쉬워요. 다른 사람 카메라였거든요.” 오랜만에 학창 시절의 우상을 떠올린 그녀는 하필 그날 카메라가 없었던 걸 거듭 안타까워했다. 만약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 시간 속의 그녀를 찾아가 손에 스마트폰을 쥐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제가 요즘 선후배들이랑 그렇게 사진을 찍나 봐요. 시도 때도 없이 사진을 찍는 저를 보고 김혜자 선배님이 ‘시라는 사진을 너무 좋아해’라고 놀리시기도 해요. 남는 건 사진뿐이잖아요.” 더 이상 마이클 잭슨을 볼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추억은 남는다. 2010년 ‘태양의 서커스’ 그룹이 <마이클 잭슨 원>을 공개했을 때 채시라는 딸과 함께 공연장을 찾았다. 채시라 역시 오랫동안 누군가의 마음속 빛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추억을 만들어가는 현재진행형 스타이기도 하다.

촬영을 위해 발렌시아가의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그녀를 보고 우리는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몸의 라인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시스루 주름 장식의 섹시한 드레스는 그녀의 군살 없는 허리와 날씬한 팔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두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잘 관리된 몸매였다. 44사이즈의 이런 타이트한 의상은 요즘 모델들도 소화하기 힘들다. 포즈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유, 좋아라! 하하. 원래 모델로 이 일을 시작했는걸요. 화보 촬영하는 건 지금도 즐거워요. 운동이오? <천추태후> 끝난 후부터 정두홍 무술 감독님이 운영하는 헬스장에서 일주일에 한두 번 PT를 받고 있긴 하지만 특별한 건 없어요. 다만 항상 바른 자세를 유지하려고 하는 건 있어요. 제 꿈이 무용가였잖아요. 발레리나를 동경해서 어릴 때부터 늘 스트레칭을 했어요. 몸에 긴장감을 주는 거죠.”

촬영을 하며 또 한 번 놀란 건 미리 제시한 촬영 컨셉에 맞춰 직접 준비해온 속옷이었다. 의상에 따라 바꿀 수 있도록 색깔과 형태도 다양했다. 이토록 철저히 준비하는 배우는 정말이지 드물다. “이런 옷은 실루엣이 중요하잖아요. 미리 준비해야 촬영 때 편하죠. 오늘은 미비한 편이에요. 급하게 오느라 밴에다 속옷 주머니를 두고 내렸거든요. 이 정도는 기본이죠.” 후회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그녀는 엄마 역할에 있어서도 소홀한 법이 없다.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아휴, 몰라.’ 이게 잘 안 돼요, 전. 준비물이며 숙제며 한 번쯤은 꼭 확인해야 하고, 책 읽어달라는 아이의 요구를 무시할 수가 없어요. ‘다 때가 있는 거니까’ 하고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죠. 그래야 제가 만족해요. 안 그러면 직무 유기 같거든요.” 결코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법 없이 철저히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채시라의 모습에서 그녀가 출연한 모 의류 광고가 떠올랐다.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한때 유행어가 될 만큼 유명했던 그 카피를 읊자 채시라는 유쾌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하하. 정말 저하고 딱 맞는다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

섹시한 레이스 레오타드는 서리얼벗나이스(Surreal But Nice), 블랙 슬립은 라펠라(La Perla), 구슬 귀고리는 디올(Dior).

섹시한 레이스 레오타드는 서리얼벗나이스(Surreal But Nice), 블랙 슬립은 라펠라(La Perla), 구슬 귀고리는 디올(Dior).

섬세한 시스루 주름 장식이 옆선을 장식한 섹시한 롱 드레스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레드 스틸레토 슈즈는 지니 킴(Jinny Kim).

섬세한 시스루 주름 장식이 옆선을 장식한 섹시한 롱 드레스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레드 스틸레토 슈즈는 지니 킴(Jinny Kim).

눈물범벅이 돼 마스카라가 흘러내리고 립스틱이 번져도 프로는 아름다운 법이다. 정의의 몽둥이를 들고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남학생들 앞에 나타난 현숙은 섬뜩하리만큼 망가진 모습이었음에도 오지랖을 발휘한다. 가로등 불빛을 받은 얼굴은 땀과 눈물로 번들거렸고, 화장은 엉망이었다. 그 방송이 나간 다음 날, 뉴스 연예란엔 ‘채시라, 조커인 줄’, ‘조커 뺨치는 비주얼 쇼크’, ‘아줌마 조커’ 등이 머리기사로 떴다. <배트맨>의 악당 그 조커 말이다. “재미있잖아요! 안 그래도 분장하면서 우리끼리 ‘조커같지 않냐?’고 했는데, 역시 보는 눈은 같은가 봐요. 하하. 전 왜 그 느낌이 그렇게 좋아 보일까요? 멋있어 보이고. 잘 시도하지 않은 걸 했을 때 희열감이 있나 봐요. 장미희 선배님이 ‘시라는 망가지는 연기를 두려워 안해서 참 좋네’라며 칭찬해주시기도 했어요.” 91년도 신문 인터뷰에서도 채시라는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여명의 눈동자>에서 정신대에 끌려간 위안부 여옥이 되어 정글을 헤매고 다닐 때였다. 스물세 살의 채시라는 “예쁜 탤런트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속이 상한다”고 했다. 외모 대신 연기력으로 평가받고 싶다는 뜻이었다. “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화장하면 여배우는 다 예쁘죠. 안 예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보단 배우 본연의 모습을 보여줬을 때 더 돋보인다고 생각해요.”

40대 후반에 들어선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운 여배우다. 반짝이던 눈빛은 깊어졌고, 표정은 더욱 풍부해졌으며, 감정엔 세밀한 결이 생겼다. 휘청대는 인생 속에서 분투하는 주인공 현숙이 아무리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도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 건 배우가 가진 경험과 연륜이 주는 힘일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자유롭게 화면을 활보하는 채시라를 이제야 만나게 된 건 조금 아쉽기도 하다. 2000년대 이후, 특히 사극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그녀는 한동안 카리스마 넘치는 진취적인 여성을 주로 연기해왔다. 조선시대의 야심가 인수대비 역을 두 차례(<왕과 비>, <인수대비>)나 맡았고, <해신>에서는 미모와 지략으로 시전의 상권을 쥐락펴락했다. <천추태후>에서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여걸이었다. 2년 3개월의 공백기를 갖기 전, 마지막 작품이었던 <다섯 손가락>의 채영랑 역시 차가운 야망을 지닌 상류층 여성이었다. 시청률은 물론 작품 자체에 있어서도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강한 여성’이라는 고정된 이미지에 갇히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작품은 채시라에게 더 특별하다.

<착하지 않은 여자들>은 그야말로 착하기만 하진 않은, 당찬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다. 남을 질투하거나 앙심을 품기도 하고, 때로는 실수도 저지르며,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쁘다고 말할 순 없는 보통의 인간. 남들과 다른 점이라면 자신의 감정에 좀더 솔직할 뿐이다. 이 개성적인 여자들은 순종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꽤 용감하게 살아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인간적이다. 어느 순간 뒤틀려버린 인생의 길에서 과거를 향해 제 몫의 권리를 요구하는 현숙은 잃어버린 세월을 보상받을 수 있을까? “결국 현숙이 극복해야 하는 건 자기 자신이겠죠. 계속 과거에 얽매여 살기엔 너무 억울하잖아요? 행복해져야죠. 인생은 짧으니까.” 그럴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건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기꺼이 사랑해주는 친구나 가족 같은 존재들이다. “저 역시 가족에게서 굉장히 큰 위로를 받고 그들을 의지했어요. 많은 부분을 해소할 수 있었고요.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에게도요. 가족은 그런 존재인 것 같아요.”

그녀가 흘러간 추억의 스타가 아닌, 대체 불가능한 톱 배우로 건재할 수 있는 건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 덕분일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새로운 얼굴로 다가오는 이 매력적인 배우의 인생은 지금 또 한 번 황금기를 맞았다. 기존의 틀을 훌쩍 넘어선 그녀는 이제 어떤 역할도 못할게 없어 보인다. 새벽 4시부터 시작되는 다음 날 촬영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며 채시라는 활기차게 말했다. “건강하게 잘 유지만 한다면 얼마든지! 전 요즘은 할리우드가 부럽지 않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