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의 신세계

뻔하디 뻔한 향에 흥미를 잃은 여자와 마초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은 남자.
해결책은 있다. 성벽을 뛰어넘는 순간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향의 신세계가 열린다.

반지는 젬 앤 페블스, 시계는 브레게.

반지는 젬 앤 페블스, 시계는 브레게.

남자 친구의 바지를 몰래 입은 것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보이프렌드 진과 항공 점퍼로 불리는 봄버 재킷이 여자들의 옷장 지분을 넓혀가고 있는 지금, 대놓고 여성스럽진 않지만 적당히 멋스럽고 편안하다는 게 이런 차림을 즐기는 그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향수 시장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활발히 보인다는 것! 매장에선 여전히 남자 향수, 여자 향수로 카테고리를 나누지만, 이젠 남자 향수를 찾는 여자, 여자 향수를 찾는 남자들을 만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난주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에서 공개된 아닉 구딸의 신제품 ‘릴 오 떼’의 남녀 향수는 병 디자인만 다를 뿐 내용물은 동일한 향으로 4월 출시를 앞두고 있다. “왜?”라는 질문에 담당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남녀 향수의 구분이 무의미한 시대니까요. 단단했던 성벽은 무너졌지만 이를 통한 의외성이 오히려 매력으로 작용할 수 있죠.” 토리 버치의 첫 번째 향수 ‘토리 버치 오 드 퍼퓸’의 탄생 비하인드 스토리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번 향수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만들었죠. 향수라곤 오직 겔랑의 ‘베티버’만 고집했던 아버지 덕분에 유년 시절 베티버에 눈을 떴고, 여성 향수의 향료로 적극 활용했습니다.” 

손모델 주민희도 요즘 남자 향수에 관심이 부쩍 많다고 말한다. “남편 몰래 존 바바토스 ‘아티산’ 향수를 슬쩍 뿌려봤는데 잔향이 끝내주더라고요. 그에게서 나는 향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굉장히 마음에 들었어요. 요즘도 적잖이 애용하죠.” 나 역시 연애 시절 남편에게 선물한 샤넬 ‘알뤼르 옴므’를 즐겨 썼던 남자 향수 마니아. 이제껏 향수병에 적힌 ‘뿌르 팜므’ ‘뿌르 옴므’ 네 글자에 갇혀 있었다면 그 무의미한 성벽을 뛰어넘어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향의 신세계를 만나보자. 올봄 향수 쇼핑을 앞두고 있다면, 여기 남자가 사용해도 근사한 여자 향수와 여자에게 더욱 매력적일 수 있는 남자 향수 리스트를 적극 참고하시라!

From His Scents

프레쉬 홍보팀 임태경 대리가 가장 좋아하는 향수는 베스트셀러인 ‘헤스페리데스’도, ‘씨트론 드 빈’도 아닌 남성용 ‘카바니스 샌탈’이다. 여자들이 쓰기에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묵직한 우디 향을 남기는 건 프레쉬 향수를 통틀어 이 제품만한 게 없단다. ‘이서진 향수’로 입소문 난 펜할리곤스 ‘쥬니퍼 슬링’의 베이스 노트엔 흑설탕과 블랙 체리가 사용됐다. 한마디로 여자가 사용해도 크게 거부감이 든다거나 겉돌지 않는다는 의미다. 멋쟁이들의 집합소, 분더샵 청담 뷰티 셀렉트숍 ‘라 페르바’에선 어떤 향수가 잘나갈까? “뉴욕에서 탄생한 하이엔드 퍼퓸 브랜드 아이데스 데 베누스타스의 ‘아이리스 나자레나’는 중성적인 옷차림을 즐기는 여성 고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오이예 뱅갈’도 남자들이 좋아할 법한 정향나무 잔향이지만 실구매자의 열의 아홉은 여성이죠.” 신세계 인터내셔널 화장품 사업부 이지나 과장의 설명이다. 대놓고 유명한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중성적인 잔향이 매력적인 제품으로는 아쿠아 디 파르마 ‘콜로니아 오 드 코롱’, 딥티크 ‘탐다오 오 드 퍼퓸’, 조 말론 런던 ‘블랙 베이 앤 베이’, 그리고 에르메스의 4월 신제품 ‘르 자르뎅 드 무슈 리’를 강력 추천한다.

From Her Scents

한국에서 장미 향수는 향이 좋고 나쁨을 떠나 ‘여자 향수’라는 인식이 강해 남자들에게 터부시돼왔다. 하지만 뿌리째 뽑힌 장미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야생 장미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니치 향수 브랜드의 로즈 퍼퓸들은 남자에게 멋스럽게 어울리는데, 그 대표주자는 르 라보 ‘로즈 31’ , 바이레도의 ‘로즈 느와’다. 알고 보면 두 제품 모두 남성을 겨냥해 나온 제품이지만 한국에서만큼은 여자들이 더 좋아한다니 어서 빨리 경험해보길! 목련꽃 향은 여자들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도 산산조각 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에디션 드 프레데릭 말의 ‘오 드 마그놀리아’는 부드럽다기보다 싱그러운 꽃향기에 가까워 남자들이 사용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뿐더러 체취와 어우러질수록 매력이 배가된다. 깔끔하게 다려진 와이셔츠에서 날 법한 상쾌한 잔향을 찾고 있다면 세르주 루텐 ‘로 오 드 퍼퓸’, 메종 프란시스 커정 ‘아쿠아 유니버셜’, 아닉 구딸의 4월 신제품 ‘릴 오 떼’를 테스트해보자. 포털 사이트가 추천하는 흔해 빠진 남자 향수와는 차원이 다른 향의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