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책장

책을 읽는 당신 귓가에 음악이 깔리고, 눈앞에 영상이 펼쳐진다.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교과서를 펼친 건 아니다.
지금 출판계는 당신의 오감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분주히 만들어내고 있다.



하루키는 자꾸만 메모하게 하는 작가다. 하루키가 말하는 일상의 행복은 작지만 확실하다는 걸 알기에 그가 책에서 언급하는 레시피, 음악, 책, 인물 등을 찾아보지 않고는 못 배긴다. 이런 독자들의 허기진 마음을 들여다본 걸까. <1Q8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출간될 당시 문학동네와 민음사에서는 책 속 수록곡을 모아 CD를 제작, 독자들에게 읽고 듣는 기쁨을 안겼다.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그리고 리스트의 ‘향수’는 소설의 배경음악이 돼주었다. 출판사의 영리한 마케팅은 독자들을 하루키의 깊은 심연의 세계로 안내했다. 출판사가 나서서 텍스트와 함께 음악을 제공한 올인원 만찬이었다. 독자들의 달팽이관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지금 출판계는 책 속 음악 듣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소설을 음악으로 표현해 소설에 음악을 입힌다. 은행나무 출판사는 1~2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라이트 소설 ‘노벨라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북 사운드트랙’을 내놓았다. 뮤지션이 소설을 읽고 느낀 감성을 음악으로 풀어낸다. 일종의 음악으로 쓴 리뷰다. <노벨라 사운드> 북 사운드트랙을 기획한 편집자이자 뮤지션 헤르츠티어는 독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독서와 공감이라는 측면에서 시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향기를 맡으면 오래전 기억과 감성이 되살아나잖아요. 인간은 특정 기억을 감각의 방에 보관해두는 습성이 있는 것 같아요. 책의 텍스트가 독자의 이성과 감성의 문을 두드린다면, 북 사운드트랙은 독자의 감성과 상상력의 문을 함께 두드리는 거죠. 음악은 책에서 이미 말한 이야기도, 아직 말하지 않은 이야기도 전달해줍니다.” 소설을 읽고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을 음악적으로 풀고, 이 지점에서 독자, 작품, 작가가 소통한다. 독자들은 “음악을 들으면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떠오른다”고 댓글을 남기며 반기고 있다. 은행나무 출판사는 정유정 작가의 소설 <28> 출간 당시에도 북 사운드트랙을 낸 바 있다. 트루베르, 리터, 이지에프엠 등 인디 뮤지션들이 참여, 등장인물들을 테마로 다섯 곡을 담았다. 책을 읽기 전, 아니면 읽은 후에 들어도 좋은 음악이었다. 틀어놓고 읽으면 텍스트에 집중해 어느새 들리지 않다가도, 무의식에 남아 인물들의 잔상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북스피어 출판사는 이런 작업에 북 OST라는 타이틀을 단다. 미야베 미유키의 미스터리 소설 <홀로 남겨져>의 북 OST를 만든 건 싱어송라이터 박기영이었다. 출판사는 “영화 OST처럼 책을 읽을 때 감정 이입할 수 있는 BGM을 만들고 싶었다”고 전한다. 박기영이 두 달 넘게 고민해 만들어낸 곡 ‘Dreams’는 소설과 달리 스산하지도 무섭지도 않다. 소설을 읽고 음악을 듣고 있으면 스크린에서 자막이 올라가고 있는 것 같다. 소설에 나온 대사, 제목, 어느 하나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Dreams’라는 곡은 소설을 담아냈다. 텍스트가 공중에 흩뿌려지며 소설 속 장면들이 그려지는 신비로운 경험을 독자들에게 선사했다. 나아가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출판사도 생겨났다. <빡쳐! 연애>를 출판한 라온북은 음반과 동시에 뮤직비디오도 공개했다. 미국과 유럽에서 북 사운드트랙은 OST에 가깝다. 텍스트와 관련된 효과음, 특정 장면의 배경음악 등을 담아 하나의 앨범으로 만든다. 독자들은 영화 OST 음반을 사듯, 책 OST도 기꺼이 구입한다. 은행나무 출판사 편집자 헤르츠티어는 이런 현상을 두고, 책의 물성 변화이자 책의 확대라고 덧붙였다. 

 

소설이 종이를 벗어나 웹으로 가면 더욱 자유로워진다. 이때는 작가도 직접 나선다. 웹소설이나 웹툰에 BGM이 자동 재생되는 건 이제 공식이 됐다. “노래도 좋고 이야기도 좋지만, 그중에서 가장 좋은 건 노래를 들으며 이야기를 읽는 일.” 작가 김연수가 한 말이다. 김연수는 작년 12월 파스텔뮤직과 함께 ‘노래를 들으며 이야기를 읽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컴필레이션 앨범 <사랑의 단상>의 수록곡을 듣고 어울리는 짤막한 소설을 연재했다. 모바일을 통해 연재된 옴니버스형 소설에는 창가의 화분, 연인의 집 담벼락, 꽃철이 지난 꽃잎 등 소설 장면 장면의 사진도 담겼다. 작품 소개란엔 “파스텔 앨범과 김연수의 소설이 만들어내는 공감각적 환상 속으로 초대한다”는 말이 쓰여 있다. 예고편으로 자리잡은 북트레일러는 책 소개와 동시에 독자들의 머릿속을 소설 속 한 장면 속으로 옮겨놓는다. 책을 둘러싼 콘텐츠는 이제 하나의 감각에서 다른 영역의 감각을 불러내고 있다.

몇 년 전 출판계는 듣는 책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희망을 품었다. 책 읽을 시간이 없으니 들을 시간은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단순히 시각을 청각으로 바꿔놓은 콘텐츠는 매력이 없었다. 오히려 상상할 구석을 빼앗아갔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을 제외하고, 요즘 오디오북을 듣는 가장 큰 독자층은 배우의 팬들이다. 배우들은 재능 기부로 오디오북에 참여하고, 팬들은 이들의 숨결을 가까이 듣고 싶어 기꺼이 이어폰을 꽂는다. 출판계는 이제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느끼고 즐겨서 읽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고자 한다. 출판사와 작가는 책이라는 하나의 콘텐츠를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재미있는 시도를 하고 독자들은 이를 즐긴다. 우리에게 책 한 권을 두고 토론하며 밤을 지새우는 비장한 낭독회 문화는 없지만, 배우가 연극처럼 소설 속 대화를 연기하고, 뮤지션이 소설을 입은 음악을 연주하고,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북 콘서트’는 있다. 책을 낭독하는 느릿한 삶의 호흡은 없어도 팟캐스트를 들으며 책을 씹고 뜯고 맛보는 일상 속 욕구는 있다. 그렇다고 책을 읽기보다 책을 감각하는 시대가 활짝 열린 건 아니다. 책 만들기의 연장선이자 의미 있는 시도이다. 책이 감각의 다발이 되어 당신을 이야기 속으로 이끈다. 이제 당신이 감각의 책장을 넘길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