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위치 산책

빵 두 조각에 햄, 달걀, 그리고 채소 조금. 이 별거 없는 메뉴가 다시 뜨겁다.
4월의 피크닉을 재촉이라도 하듯 인기몰이가 한창이다.
볕 좋은 오후, 서울의 샌드위치집 몇 군데를 돌았다. 봄날의 근사한 산책이 완성됐다.

뉴욕에선 크로넛이, 도쿄에선 팬케이크가, 서울에선 팝콘과 마카롱이 한바탕 디저트 열풍을 일으킨 뒤, 지금 다시 서울의 인기 메뉴는 샌드위치다. 관람 전 ‘공복 주의’ 타이틀을 달고 입소문을 탄 영화 <아메리칸 셰프>의 쿠바 샌드위치가 불을 지폈고, 스트리트 푸드에 대한 열기가 한몫 더했다. 간편하게 한입 베어 끼니를 해결할 수 있고, 햄버거보단 건강해 보이니 요즘처럼 바쁜 시대에 맞춤형 요리다. 실제로 얼마 전 갤러리아백화점 식품관 ‘고메이494’는 오픈 이후 2년간의 인기 메뉴 랭킹을 발표했는데, 입점 레스토랑 ‘카페 마마스’의 그릴드 샌드위치가 당당히 상위권에 올랐다. 전체 레스토랑의 샌드위치 총판매량은 하루 평균 600여 개. ‘고메이494’는 이 기세를 반영해 맛집으로 유명한 바닷가재 샌드위치집 ‘랍스터바’를 지난해 말, 베트남 샌드위치 반미를 파는 ‘레호이’를 지난 3월 기간 한정 팝 스토어 형태로 오픈했다. 별 새로울 것도, 다를 것도 없는 메뉴가 유행을 한 바퀴 지나 새삼 다시 테이블 정중앙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거하게 차린 한 상보단 트렌디한 테이크아웃 푸드를 즐기는 ‘투고-메이(To-Gourmet)’족들이 일으킨 새로운 구르메 시장이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에서 샌드위치는 한 남자의 인생을 바꾼다. 주인공 칼 캐스퍼(존 파브로)의 레스토랑 마로우는 마이애미에서 가장 핫한 스폿이고, 그의 시그니처 메뉴인 에그 캐비아, 초콜릿 라바 케이크 등은 토 하나 달 것 없는 맛이지만, 칼은 샌드위치 하나 들고 주방을 나선다. 시그니처 메뉴를 지루하다 혹평한 기사, SNS 난동으로 크게 한 번 덴 후 삶의 방식을 바꾼 것이다. 그는 답답하고 콧대만 높은 레스토랑의 키친을 나와 푸드 트럭을 장만하고, 샌드위치를 만들며 미국을 일주한다. 예약 리스트를 받고 기다리는 셰프가 아니라, 직접 발품을 팔며 찾아가는 셰프로의 전환이다. 다소 소원한 관계였던 아들과 함께 빵을 굽고 길거리 사람들과 대화하며 배를 채우는 ‘요리 라이프’. 이 소탈하지만 진실한 스토리가 쿠바식 샌드위치 쿠바노스를 궁금하게 했다. 모호 소스에 재운 돼지고기와 쿠바식 프레서 플란차로 눌러 파삭하게 구운 빵에서 두 부자의 훈훈한 맛도 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서울에선 <아메리칸 셰프>의 입소문을 따라 이미 쿠바노스를 만들고 있는 가게가 몇 곳 있었는데, 영화의 감흥을 가장 비슷하게 살려준 건 경리단길 시장 근처의 320 리브레다. 본래 디자인 사무소 320이 테이크아웃 카페처럼 운영하던 곳을 업종 변경해 차린 이곳은 돼지고기가 들어간 쿠바노스, 모호 샌드위치 등 간단하게 먹고 마실 수 있는 메뉴를 판다. 영화 속 장면, 유튜브 동영상, 구글을 참고해 레시피를 만들었다는데 매콤하면서 깔끔한 맛이 제법 그럴듯하다. 버터 발라 구운 빵의 고소함이 머스터드, 오이 피클의 시큼한 스파이스를 적절하게 눌러준다. 공간은 10명 정도 들어서면 가득 찰 정도로 비좁은데, 그래서 더욱 푸드 트럭의 뉘앙스를 내고, 쿠바의 술과 모히토 메뉴도 있어 주인장과 몇 마디 주고 받으며 흥을 즐길 수도 있다. 좀더 다이닝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을 찾는다면 이태원역 근처의 아메리칸 프렌치 레스토랑 리버틴도 선택지다.

쿠바 샌드위치, 쿠바노스와 함께 지금 가장 주가가 높은 샌드위치는 베트남 스트리트 푸드인 반미다. 본래 식민지 시절 프랑스 사람들이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는 빵인데, 동남아의 거리 음식을 속 재료로 쓴 덕에 보통 샌드위치에서 맛볼 수 없는 풍미를 즐길 수 있다. 바게트에 돼지고기, 채소, 고수 등을 넣고 칠리 소스를 뿌려 먹는다. 무엇보다 독특한 건 함께 들어가는 반숙한 달걀 프라이와 채 썰어 넣는 당근. 노른자의 담백함이 칠리 소스와 어울려 고소하게 마무리되고, 자잘하게 씹히는 채소의 식감이 맛에 신선함을 준다. 경리단 인근 소월로에 ‘레호이’라는 이름의 베트남 요리집이 있는데 이곳의 반미가 꽤 맛있다. 돼지고기의 육즙이 각 재료의 맛, 그리고 소스의 풍미를 적절하게 잡아준다. ‘레호이’는 이미 유명세를 타 경리단 추로스 길에 2호점을 냈고, 지난 3월 19일까진 ‘고메이494’에 팝 스토어를 열어 샌드위치 메뉴 세 종류를 판매했다. 베트남 현지에선 한국에서의 이 열기가 궁금해 공영 방송사에서 취재진도 다녀갔단다. 경리단길 2호점에선 돼지고기, 닭고기, 새우 등 메인 재료에 따라 골라 먹을 수도 있다. 이태원 메인 길의 샌드위치집 ‘라이포스트’ 역시 반미를 판다. 호밀을 가게 이름으로 쓰는 곳답게 이곳은 무엇보다 빵이 맛있다. 보통의 바게트보다 식감이 쫄깃해 다른 재료와 쉽게 어울린다. 단, 이곳의 반미는 전체적으로 향이 강해 호불호가 갈리며, 우리네 ‘시장 고로케’와도 비슷한 맛이라 달콤한 담백함을 원한다면 레호이의 반미가 더 좋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커리부르스트’에 들렀다. 매번 지나치기만 하던 가게인데 강한 커리 향에 발걸음을 멈췄다. 요즘 가게가 한두 곳씩 생기기 시작하는 베를린발 요리, 커리부르스트는 일종의 오픈 샌드위치다. 굵은 소시지를 불에 구워 커리를 얹고, 그걸 바게트 빵과 함께 먹는다. 쿠바 샌드위치에 더해지는 유카 칩 대신엔 감자튀김을 더하고, 모히토나 테킬라 대신 맥주를 함께 마신다. 커리부르스트는 본래 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의 노동자들이 즐겨 먹었는데, 이제는 영국의 피시 앤드 칩스처럼 대중적인 길거리 음식이 됐다. 독일 현지에선 커리가 아닌 ‘커리 케첩’이라 할 정도로 토마토 풍미가 강한 커리 소스를 쓰며, 소시지는 한 번 삶은 뒤 기름에 굽는다. 경리단 메인 삼거리에서 그랜드 하얏트 서울 방향으로 3분 정도 걸으면 ‘커리부르스트’가 있다. 거의 ‘박스 숍’ 형태의 아주 작은 가게로, 맛은 평균 이상이다. 테너를 전공한 성악가 출신의 사장이 독일에서 유학하며 익힌 레시피를 그대로 서울에 가져왔다. 얼핏 보기엔 좀 못생긴 가게지만, 테너 출신 셰프의 풍모가 편안해 잠깐 앉아 수다 떨고 싶게 된다.

샌드위치는 사실 특별할 수 없는 요리다. 노동자들이 식사 시간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 먹기 시작한 음식이니 애초에 맛이나 풍미를 논할 요리는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그 간단한 레시피는 좀더 편하고 친근한 테이블의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아메리칸 셰프>의 칼이 트럭에서 대화를 나누며 아들과의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한 것처럼, 샌드위치를 사면서는 가게 차창 너머로 괜스레 한마디 건네고 싶어지는 거다. 바빠서만 집어 드는 빵이 아니다. 봄날의 샌드위치엔 분명 마음 일렁이게 하는 길거리의 훈훈한 사람 냄새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