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시간의 기록자, 미술가 장민승

이미지 과잉의 시대엔 눈이 멀기 쉽다.
유행을 좇는 카메라들 틈에서 치열하게 세상의 진실과 마주한 젊은 작가들이 있다.
미술가 장민승과 포토 저널리스트 양영웅, 다큐멘터리 사진가 홍진훤, 영화감독·사진가 최원준.
우리의 부주의한 시선이 놓쳐버린 삶의 풍경을 포착해온 소외된 시간의 기록자들이다.

 

무의식의 풍경화

장민승은 하나의 수식어로 한정될 수 없는 전 방위 예술가다. 스무 살 무렵,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를 시작으로 <달콤한 인생>, <주먹이 운다> 등 20여 편의 영화음악 작업에 참여했고, 한때는 황신혜밴드의 멤버였다. 가구 디자이너이자 공연 기획자, 사진가이기도 하며, 현재는 설치미술가로서 그 영역을 확장하는 중이다. 지난 2월엔 세월호 사건의 아픔을 담은 ‘보이스리스(Voiceless)’로 제15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수상했다.

Jang Min Seung

<수성십경(In Between Times)>은 2009년 여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1년 동안 진행한 작업입니다. 원래 전부터 뉴타운 예정 지역을 비롯한 철거 현장을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버려진 가구, 그중에서도 주거와 집기가 서구화되기 시작할 무렵에 만들어진 것들을 찾아 사진을 찍는 일종의 디자인 리서치를 틈틈이 진행해오던 중이었죠. 그런데 우연히 인왕산 계곡 근처의 옥인시민아파트에서 어릴 적 제가 살던 집과 거의 비슷한 실내장식을 유지한 공간을 발견하게 됐어요. 그 순간, 신비롭게도 제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던 기억과 어떤 이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서른을 갓 넘긴 저는 깊은 슬럼프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강렬한 끌림에 따라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사소한 관심사가 어느새 생계를 해결하는 직업이 된 순간 늘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려왔어요. 뮤지션, 영화음악 프로듀서, 공연 기획자, 가구 디자이너, 설치미술가… 그런 직업적 경험을 통해 발견한 문제의식을 다양한 매체로 표현해왔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한 가지 뚜렷한 방향을 지속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어요. 폐허가 된 아파트와 그곳에서 바라본 풍경, 그리고 밖에서 들려오던 물소리는 매우 명상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제 작업실 역시 키 큰 나무들과 산새들에 둘러싸인 매우 조용한 곳입니다.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네요. 하루하루 달라지는 자연의 변화를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환경이다 보니 그런 감수성이 작품 활동에도 영향을 주는 듯합니다.

옥인시민아파트는 1971년 서울시가 1세대 도시 정비 정책의 일환으로 세운 최초의 서구식 공동주택입니다. 한때 아파트가 있던 자리는 ‘물소리가 아름다운 계곡’이라 하여 수성동(水聲洞)이라 불렸고,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은 효령대군과 안평대군의 옛 집터이기도 했던 이 일대의 풍경을 화폭(<수성동>)에 남기기도 했습니다. 저는 옥인시민아파트 9개 동(총 291세대) 가운데 10세대를 선별해 별도의 연출 없이 내부 공간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특별한 카메라를 사용하진 않아요. 프로젝트에 따라 필름 카메라는 물론 아이폰 카메라부터 2억 화소 멀티샷 디지털카메라까지 최종 프레젠테이션의 방향에 맞춰 활용하죠. 요즘 제 휴대폰 사진첩에는 개들과 뒷산을 산책하며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습니다.

올해는 제주도에서 <저기, 저어그-Over There>라는 실험 영화를 만들고자 합니다. 제주의 어원이라는 출처 미상의 설에서 차용한 제목이에요. 4월부터 시작해 1년 간 촬영하고 6개월의 후반 작업을 거칠 예정이죠.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저의 오랜 파트너인 정재일 음악감독과 함께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나 록 밴드를 결성했던 정재일(당시 그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어요)과는 이후 각자의 길에서 활동하며 공연 기획자와 출연자로 만나거나 함께 상업 영화 음악을 만들기도 했어요. 2009년부터는 장민승+정재일이라는 팀을 만들어 미술과 음악,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매체의 경계적 위치에 있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죠. 제 인생 최고의 예술적 동지입니다.

카메라를 잡지 않을 땐 집중해서 음악을 듣거나 그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냅니다. 문학 작품이나 고전 영화를 보기도 하죠. 세월과 국경을 초월해 이어져온 문명의 유산을 보고 들으며 오늘을 느끼는 경험은 강렬합니다. 최근엔 새 영화 작업 때문에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을 읽으며 슈베르트의 ‘마왕’을 듣는 중입니다. 상상 속에서 전쟁 장면을 돌려보죠. 언젠가는 금강산과 묘향산의 풍경을 제 카메라에 담아보고도 싶습니다. 과연 통제와 감시 없이 북한의 산과 강을 유람하며 사진 찍을 수 있는 날이 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