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시는 SNS를 타고

2016.03.17

by VOGUE

    시는 SNS를 타고

    시인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SNS 계정을 만들어라.
    단어는 일상에서, 표현은 유머와 위트를 담아, 문장은 짧을수록 좋다.
    단, 해시태그는 빼먹지 말자.

    “내목따고/속꺼내서/끓는물에/넣오라고/김부장이/시키드냐.” 이환천 시 ‘커피 믹스’는 행마다 네 글자라는 엄격한 율격과 강한 은유로 직장인의 복잡한 고충을 노래한다. “뭐가/뭔지” , “어디 갔어” <서울 시> 시리즈의 저자이자 시팔이 하상욱은 ‘연말 정산’과 ‘월급’에서 아예 네 글자만으로 삶의 엑기스를 담는다. “마음에 드는 옷은/매번 품절이고/마음에 드는 신발은/언제나 남자용이고/마음에 드는 가방은/너무 비싸고/마음에 드는 놈은/꼭 여자친구가 있지.” -‘그렇지 뭐’- 각운과 반전을 즐겨 사용하는 최대호의 시는 불안한 시대의 감성을 족집게처럼 집어낸다. 이들의 정체는 이른바 ‘SNS 3대 시인’. 창작 비결은 짧은 문장과 일상의 가벼운 소재, 유머와 반전의 수사다. 덕분에 추상적이고 지나치게 상징적인 데다 생경한 시어 때문에 머리 아픈 기존 시와 달리 이해하기 쉽다. 게다가 SNS를 통해 시를 발표하니 무료다. 시는 좋아하지만 시집은 안 사는 요즘, 디지털 세상에 나타난 신종 시가 새로운 문학 세계를 열고 있다.

    신춘문예의 좁은 문 대신 SNS의 광활한 기회를 노린 디지털 시인의 출현은 트위터에서 시작됐다. 140자의 제한은 적은 단어로 최대한의 효과가 필요한 시에 안성맞춤. 장문은 필히 ‘스크롤 압박 주의’를 다는 시대에 ‘짧을수록 좋다’는 모토는 중세 일본 시의 한 장르 ‘하이쿠(Haiku)’를 본받았다. 하이쿠는 일본 문인들이 주로 사계절의 감상을 5·7·5 형식으로 지은 한 줄 시. 중세의 고고한 절제 미학과 21세기 트위터의 140자 제한이라는 뜻밖의 만남이 성사되면서 외국에서는 이 신종 장르를 ‘트와이쿠(Twaiku)’ , 혹은 ‘마이크로 시(Micropoem)’라 부른다. 디지털 생태계가 그렇하듯 시 역시 소재나 형식의 제한은 없다. 물론 사랑 타령은 여전히 인기 소재지만 할머니의 흰머리, 방금 들은 노래, 여자 친구가 입은 옷, 옆집 개 짖는 소리 등 소소한 일상의 단면을 담거나 각국 언어를 아무렇게나 조합하는 등 범우주적 스케일을 허용한다. 완성은 출판사의 손길 대신 해시태그를 달면 끝이다. 적당한 팔로워만 있으면 문학계의 인정은 못 받아도 아마추어 시인은 될 수 있다.

    디지털 시의 세계는 차마 글 쓸 용기는 없지만 시인이 되고픈 소극적인 사람에게도 관대하다. 최근 문을 연 ‘포에트윗(Poetweet)’이라는 사이트는 타고난 재능이 없어도 창의적인 시 한 편을 뚝딱 제작해준다. 방법은 1910년대 말 미술계의 반항아 집단이었던 다다이스트들의 무작위 시 창작법과 비슷하다(다다 시는 신문에서 오린 기사를 가방에 넣고 흔든 뒤, 제비뽑기를 해서 만든다). 검색창에 트위터 계정을 입력하고 소네트(14행시), 론델(론도체 14행시), 인드리소(Indriso. 소네트와 비슷한 시) 중 한 가지 형식을 선택한다. 30초 정도 기다리면 프로그램이 트윗 기록을 뒤져 시를 완성한다. 내용은 앞뒤가 안 맞지만 제목과 양식은 그럴듯하다. 흥미로운 건 굳이 본인 아이디가 아니어도 된다는 점. 원한다면 미국 대통령이나 저스틴 비버의 트위터 계정 아이디를 적어도 상관없다. 단, 트윗 기록이 충분해야 한다.

    사실 디지털 세상에 나타난 별난 시 유행은 트와이쿠가 처음은 아니다. 인터넷이 세상에 등장할 무렵, 연필과 지우개의 구속에서 벗어난 여러 실험 시가 성행했다. 그중 하이퍼텍스트 시의 갈래였던 팬포엠(FanPoem)은 대표적인 디지털 시 장르였다. 유명 시인 작품에 본인의 시를 덧붙여 짓는 일종의 인터랙티브 작업인데, 선망과 참여라는 팬의 심리와 인터넷의 쉬운 접근성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과도한 상상과 욕망의 나래를 펼친 팬픽과 다르게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의 기능을 가늠해보는 현대 예술의 한 종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시 자체가 너무 어렵고, 완성작은 더 난해했다. SNS만큼 파급력이 있던 시절이 아니라는 것도 있지만 유머와 공감이 없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지금은 홈페이지도 문을 닫은 지 오래. 한때의 문학 장르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미지 못지않게 복제된 텍스트가 쏟아지는 상황에 유머와 공감은 디지털 시를 완성하는 하나의 코드다. 독자를 늘리고 싶다면, 반드시 고려해야 할 덕목이다. 하상욱이 쓰는 시어를 보면 사실 대단한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유머와 공감이 네 글자 안에 괄호를 하고 숨어 있기 때문에 대단한 것이다. 가령 ‘커피’는 “두근”이라는 단어를 네 번 반복할 뿐인데 무릎을 탁 치는 공감이 있다. 최대호의 시 역시 그렇다. 키츠만큼 사랑 소재가 많지만 내용은 시인과 독자들이 몰래 공유하는 일기장처럼 다정하다. 종종 위로까지 해준다. 이들에게 시는 자고로 진지해야 하고, 사물과 자연의 정수를 담아야 한다는 원대한 목표 따위는 없다. 사실 시가 웃기면 안 되는 이유가 따로 있을까? 시대 감성을 정확하게 담은 어휘라면 가벼운 디지털 시도 랭보나 릴케의 시처럼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환천의 페이스북 소개란은 디지털 신종 시의 정수를 딱 한 줄로 요약한다. “일기 쓰고 엔터만 잘 쳐도 시가 된다.

      에디터
      컨트리뷰팅 에디터 / 김지훈
      포토그래퍼
      HWANG IN 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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