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고갈되는 패션계

유행이 소비되듯 건강과 영혼이 고갈되는 패션계.
금으로 만든 쳇바퀴 위에서 끝없이 달리는 다람쥐 같은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알렉산더 맥퀸패션계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디자이너들. 이들은 자살을 선택하거나(맥퀸, 스콧) 도망치거나(데카르넹) 재능을 소진하거나(샬라얀), 혹은 살아남기 위해 과감하게 반기를 들었다(빅터앤롤프, 장 폴 고티에).

처절한 미생은 종합상사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몸뚱이에는 정교한 무늬가 너울거리는 값비싼 디자이너 브랜드의 얇고 섬세한 실크 조각을 걸쳤지만 몸과 마음은 노숙자의 넝마처럼 남루하게 너덜거린다. 오상식 과장을 연상케 하는 충혈된 안구는 갈라진 강바닥처럼 터진 모세혈관이 빨간 금을 사방으로 뻗치고, 낯빛은 피곤과 스트레스에 절어 간 해독 능력이 떨어진 박 대리만큼이나 어둡고 칙칙하다. 폭발하기 일보 직전인 짜증과 시비의 수치는 사무실에 앉아서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눈치 없는 희생양이 걸리기만 탐욕스레 기다리는 마 부장 수준. 당신을 이토록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스마트폰? 체크. 마감-출장-마감-출장 연속인 스케줄? 체크. 가뭄에 마른 강바닥 긁는 기분으로 간신히 시즌을 이어가는 처절함? 체크. 매출 신장에 대한 압박? 체크. 밤낮없이 실시간으로 체크해야 하는 SNS? 체크, 체크!

존 갈리아노

‘패션 피로감(Fashion Fatigue)’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했을 땐 SNS에서 지나치게 소비되는 패션의 과잉을 뜻했다. 그러나 요즘은 말 그대로, 패션계에서 겪는 피로감이라는 뜻이 더 적절하게 느껴진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풍선처럼 모든 것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최고 속도로 내달리는 브레이크 없는 스포츠 카의 질주처럼 멈출 줄 모르니까. 그리고 지난 2월, CFDA가 전한 뉴욕 남성복 패션 위크의 출항 준비 소식은 반가움보다는 모두의 피로를 가중시키는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크리스토프 데카르넹

패션 위크가 하나 더 늘어난다는 것은 프레스들에겐 출장이 하나 더 늘고 (그에 따르는 리뷰 기사 역시), 디자이너들에게는 1년에 완성해야 할 컬렉션 수가(유럽에서 쇼를 하던 미국 디자이너가 도시를 옮길 수도 있겠지만, 분명 여성복 디자이너들 중에도 이참에 남성 컬렉션을 추가해야 되는 걸까라는 고민에 휩싸인 이가 있을 듯) 하나 더 늘었다는 뜻이다. PR들에게는 중대한 연중행사가, 아틀리에와 공장에는 엉덩이에 불붙은 것처럼 푸닥거리며 만들어내야 할 옷 한 세트가 추가됐음을 의미한다. 패션계에서 새로운 것’은 그 자체로 맹목적인 지지를 받을 만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입을 모아 제기하는 의문은 “과연 또 하나의 패션 위크가 답일까?”라는 것.

빅터앤롤프

얼마 전 빅터 호스팅과 롤프 스노렌이 전한 씁쓸한 소식은 그게 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아, 이 쌍둥이 같은 듀오의 전성기는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아름다웠던지! 90년대 말, 2000년대 초 런웨이 위에 둥실거렸던 동화적이고 예술적인 상상력의 결과물(99 F/W ‘바부슈카’, 2003 F/W ‘틸다 스윈튼’, 2005 F/W ‘베드타임 스토리’, 2007 F/W ‘더 패션쇼’ 등)은 이들을 가장 핫한 디자이너의 반열에 올려놨고, 매번 예상치 못한 놀라움으로 머리를 쭈뼛 서게 만드는 빅터앤롤프 쇼장에 들어가고 싶어 모두가 안달복달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들의 기성복 컬렉션이 눈에 띄게 상업화되면서(즉, 평범해지면서) 이들에 대한 관심도, 모두가 찬사를 보내던 그들의 기발함도 가파르게 꺾였고, 얼마 전엔 RTW 컬렉션을 없애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이 듀오는 2008년 가을 ‘노’ 컬렉션을 통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컬렉션(당시만 해도 겨우 시작일 뿐이었지만)에 대한 저항의 의지를 표현하기도 했다. “창의성에 있어서 제한적이니까요.” “RTW를 버림으로써 우리는 보다 많은 시간과 자유를 얻게 됐습니다.” 패션계를 호령하던 장 폴 고티에도 지난가을 동일한 내용을 발표했는데, 노장이 밝힌 이유 또한 다르지 않다. “상업적인 통제, 정신없이 이어지는 컬렉션! 자유도 없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하고 혁신을 시도할 충분할 시간을 가질 수 없습니다.” 패션 컨설턴트 장 자크 피카르는 이 심상치 않은 우연에 대해 “전세계 패션계의 흐름과 압박이 지나치게 심하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위에 적절한 스태프들을 갖추고 있어서 이 압박에 대응할 수 있는 이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디자이너들도 있으니까요.”

후세인 샬라얀

그러나 패션계 흐름을 무시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 분명 그들이 ‘날리던 시절’의 패션쇼는 입기 위한 옷보다는 굉장한 눈요깃거리에 대한 것이었다. 오늘날 쇼를 보는 사람들(쇼장에서든 온라인에서든)은 예술적인 공연 관람보다는 다음 시즌에 사람들이 거리에서 어떻게 입고 다닐지를 추측할 수 있는 쇼를 기대한다. 한때 레이 카와쿠보와 동급으로 언급되던 급진주의 디자이너 후세인 샬라얀이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한 시절을 풍미하던 패션 크리에이터들에게 필요한 건 컬렉션을 위해 충분히 생각할 시간. 그들은 하나같이 바빠진 스케줄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치 햄스터 쳇바퀴에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것과 같죠. 오늘날 우리는 점점 빨리 달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쓰러지는 사람들이 생기죠.” 샬라얀의 말처럼 알렉산더 맥퀸과 존 갈리아노, 크리스토프 데카르넹, 르웬 스콧 등 많은 이들이 선택과 결단의 순간에 실패했다. 패션계에선 패션 저널리스트 데이나 토마스(Dana Thomas)의 책 <신들과 왕들>에 대해 비극적인 패션 천재 맥퀸과 갈리아노의 삶을 원색적으로 다뤘다는 비난 일색이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이들이 술과 마약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압박과 스트레스의 하중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장 폴 고티에

그렇다면 ‘견뎌내고 있는’ 이들은 무사한 걸까? 온라인 패션 저널 <데일리 패션 리포트>는 2015 봄 시즌 뉴욕 컬렉션에 대해 혹평을 날렸다. 마크 제이콥스 같은 스타 디자이너뿐 아니라 프로엔자 스쿨러, 알투자라 같은 트렌드세터들까지, 하나같이 엇비슷한 주제와 디자인 일색의 컬렉션을 선보였다는 것. 기존 스타일에 약간의 변화만 가미하거나, 꽃무늬, 카무플라주, 팬시한 스포츠웨어를 몇 년째 우려먹고 있으며, 새로운 기술과 혁신에도 불구하고 디자이너들이 관습적인 일상에 머무르는 게 당황스러울 정도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들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부족한 시간과 한정된 자원이 잘게 나뉘어 결국 하향 평준화에 이른 것일 뿐. 하지만 프레스들은 입장이 완전히 다르다. 건조하고 시끄러운 비행기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시차 때문에 퀭한 얼굴로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린 노력이 하향 평준화에 그친다면? 오, 무의미하고 무의미하도다!

르웬 스콧

런웨이에 모델이 발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그 장면이 랜선을 타고 전 세계로 전파되는 세상. 쉽게 소비되는 시대에는 쉽게 소비될 수 있는 걸 만드는 편이 현명한 대처 방법일 수도 있다. PR 담당자는 SNS에 해시태그를 달아서(요즘엔 해시태그 문구까지 정해줄 정도) 올릴 것을 수차례 당부하는 것도 모자라 “페북, 혹은 인스타 포스팅 기대하고 있을게요!”로 작별 인사를 대신하는 요즘이니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항상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다잖아요. 대체 일은 언제 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SNS에 올라오는 건 정말 귀신같이 체크를 해대니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이제는 패션 에디터보다 블로거들이 정보를 전파하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어느 온라인 매체 에디터는 뉴욕 컬렉션의 리뷰를 쓰는 동안 파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또 다른 쇼 사진들이 페북 타임라인에 끊임없이 올라오는 걸 보면 욕지거리가 나올 지경이라고 토로했다. 물론 패션은 예술이 아니다. 그러나 가전제품이나 음료수처럼 미친 듯이 팔아치워서 이윤을 높이는 것만이 최우선도 아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자신의 전 직장에 대해 “그곳 사람들은 패션이 요구르트나 가구가 아니라는 걸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패션을 훨씬 더 복제 가능하고 평범한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물론 모든 경제활동은 돈에 대한 것이지만, 패션계에서 몸담고 있는 사람 중 돈 때문에 이 바닥에 발을 들인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게 사실. 금액이 많진 않지만, 즐기면서 돈을 벌 수 있는 게 가장 큰 매력인 이곳에서 다시 즐기면서 일하던 시절을 되돌아봐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