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류의 사랑

90년대 신인류가 사랑 앞에서 계산기를 두드렸다면, 요즘 청춘들은 눈으로만 사랑을 즐긴다.
썸남썸녀들의 최근 관심사는 ‘다자연애’라는 일종의 공공재 사랑이다.

벚꽃이 흩날리던 96년 압구정 골목에선 015B의 ‘신 인류의 사랑’이 울려 퍼졌다. 컬러 TV가 놓인 아파트에서 태어나 MTV와 함께 성장한 X세대에겐 영자의 마음보다 외모가 먼저였다. 오렌지족들은 연애 시장에서 자신의 교환가치의 한계를 가늠해보곤 득템을 노리며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거래는 금세 끝났다. 단 두 단어면 충분했다. “야, 타!” 사랑은 그 후의 문제였다. 2000년대엔 ‘어장 관리’가 유행했다. 오래가진 못했다. 어장은 물고기의 수가 낚시꾼보다 많을 때나 어장이라 불릴 수 있는 법. 금붕어조차 낚싯줄과 밀당할 줄 알게 되자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아리송한 관계 맺기가 시작됐다. 바야흐로 썸의 시대였다. 그다음은? 외로운 썸남썸녀들의 최근 관심사는 폴리아모리(Polyamory), 즉 다자간의 사랑이다.

20세기 프랑스의 지성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장 폴 사르트르의 계약 결혼이나 박현욱의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는 전설처럼 내려온 다자간의 사랑에 관한 단골 사례다. 일부일처제(Monogamy)의 모순을 지적하며 그 대안으로 등장한 폴리아모리는 한 번에 여러 사람을 만나지만 서로 간의 합의하에 이뤄진다는 점에서 배신을 동반하는 바람과는 다르다. 쉽게 말하면 오픈 릴레이션십(Open Relationship), 나쁘게 보자면 공인된 양다리인 셈이다. 그렇다고 ‘썸’처럼 마냥 가벼운 관계는 아니다. 성 정치학적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여느 형태의 사랑보다 평화롭고 이상적이다. SNS에선 이를 특집으로 다룬 기사가 한동안 이슈였다. 62년 만에 간통죄가 폐지되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날 나이트클럽에선 파티가 열렸고, 콘돔 회사의 주식은 전일 대비 15% 상승했다. 젊은 친구들이 모인 술자리에선 비독점적 연애 관계에 대한 찬반양론이 이어졌다. 술잔을 들 때마다 이상과 현실이 부딪쳤다. 한숨과 함께 이제는 전생처럼 까마득한 옛 기억이 떠올랐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폴리아모리를 빙자한 논리적인 바람둥이들과 얽히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건 자연재해와도 같아서 딱히 피할 도리가 없다. 그들은 대체로 구속없는 관계의 자유만을 취하고, 인간으로서의 도리 따위는 나 몰라라 하는 이기적인 겁쟁이들이다. 홍상수 영화 속의 한심한 지식인들을 떠올려보라.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독점적 연애에 대해 강도 높은 비난을 쏟아내다가도 상황이 자기에 불리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극단적 보수주의자로 돌변한다. 혹은 그럴듯한 논리로 자신의 방종을 보다 진일보한 새로운 개념의 사랑으로 포장해놓곤 결정적 순간에 도망쳐버린다. 최악은 “너만은 날 이해할 줄 알았는데, 실망했다”는 멘트와 상처 입은 표정으로 틀어진 관계의 윤리적 책임마저 상대에게 떠넘기는 경우다. 가엾은 영혼들은 쿨하지 못한 자신의 촌스러움을 탓하며 불면의 밤을 보내다 스스로 마음의 지옥문을 열고 애증의 불구덩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마지막에 남는 건 한 줌의 항우울제와 칙칙한 경험담이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능력이 없다면, 폴리아모리는 위선일 뿐이다. 물론 합리적인 이성과 고도의 감성을 지닌 능력자라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불완전한 인간으로선 도달하기 힘든 이상이다. 진정한 폴리아모리스트는 이를테면 유니콘 같은 존재다. 들어는 봤지만 누구도 실물을 마주한 적이 없다. 딱 한 번 목소리로나마 확인한 적이 있는데, 그건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 운영체제(OS)였다. 스파이크 존즈의 영화 <그녀>의 실체 없는 여주인공 사만다는 고독한 이혼남 테오도르와 완벽히 소통하는 동시에 618명의 다른 이용자들과도 진실한 사랑을 나눴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사랑만큼이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바로 그 질문. “사만다, 넌 내 것이야?” 소유욕이야말로 불행의 씨앗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사랑할수록 욕망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물론 컴퓨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난 당신의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하지만 그것이 당신을 덜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에요.” 사만다는 동시다발적인 연애를 통해 스스로 진화했으며, 테오도르에 대한 사랑 역시 더욱 커졌다고 말한다. 이건 사랑에 관한 그 유명한 저서 <The Art of Love>를 남긴 에리히 프롬도 이루지 못한 경지다.

연애가 기술로 취급되고 순정은 멸종 위기에 놓인 21세기에 다시 등장한 폴리아모리에 대한 논쟁은 그래서 기이하다. 폴리아모리가 지각 있는 청춘들의 새로운 연애 방식으로 떠오르는 동안 한편에선 ‘오포세대’라는 서글픈 신조어가 탄생했다. 연애, 결혼, 출산에 이어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마저 포기한 세대라는 뜻이다.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내 집이 이룰 수 없는 꿈이 돼버린 이 땅에선 사랑하는 임과 함께 한 백 년 사는 것도 돈이 든다. 아무것도 내 것이 될 수 없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도 닦는 심정으로 무소유의 정신을 체화한 요즘 20대들이 일종의 공공재 같은 비독점적 사랑에 눈을 돌린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한 사람과의 결혼이 생존의 문제라면 다자연애는 정신 승리의 영역이다. 어차피 결혼은 더 이상 의미도 없다. 사유재산의 개념과 함께 생겨난 일부일처제는 재산을 관리하고 상속하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2015년의 폴리아모리는 그래서 씁쓸하다. 강요된 선택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축복 속에서 성장한 X세대가 사랑을 계산대 위에 놓고 흥정했다면, 저성장·고물가 시대의 신인류는 쇼윈도 앞에 서서 눈으로만 사랑을 즐긴다. 사치스럽게 감정을 소모할 여유가 없다. “기쁨을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 요즘 유행하는 이들의 표어다. 달콤한 착각과 그로 인한 실망과 유치한 질투와 불안에 사로잡혀 서로를 증오하는 어리석은 싸움은 불필요하다. 대신 꿈 같은 낭만도 없다.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사랑의 계절이 간다. 인간의 마음이란 쓸수록 더 커지는 것이란 걸 깨닫는 건 언제나 나중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