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품은 건물

헌 집을 허물지 않고 새집으로 변신시키는 ‘건물 재활용’이 일상에도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아주 창의적이고 근사한 스타일로 말이다.

소다미술관

소다미술관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는 한옥을 품은 양옥이 나온다. 대대손손 법조계에 종사하며 부자로 살아온 집안은 조상이 살아온 집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며 2015년 라이프스타일에 꼭 맞는 집으로 탈바꿈시켰다. 한옥 창살이며 서까래, 나무 기둥이 유럽풍의 앤티크한 소품과 고급지게 어우러진다. 세트이긴 하지만 드라마의 설정을 강조하는 영리한 장치이자 요즘 우리 건축계가 주목하는 ‘건물 재활용’이다.

스몰하우스빅도어

스몰하우스빅도어

요즘 유명세를 타고 있는 건물은 모두 ‘과거’가 있다. 정식 오픈을 앞두고 있는 ‘소다(SoDa)미술관’은 원래 대형 찜질방이었다. 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되어 주민들의 미움을 사던 찜질방은 이제 ‘지붕 없는 미술관’이 되었다. 찜질방 구조를 그대로 두고 천장을 드러내 컨테이너 박스를 올렸다. 산업폐기물 컨테이너 박스는 새 생명을 얻어 내부 전시실이 되었고, 공간 곳곳은 ‘누워서 보는 미술관’이 됐다. 휴식 공간에는 목욕탕 의자를 비치해둬 이 건물의 정체성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다. 을지로 도심 한복판 순결한 모습이 인상 깊은 호텔 스몰하우스빅도어의 과거는 54년 된 창고다. 건물의 외벽, 구부러진 담장, 복도의 천장, 옥상으로 올라가는 원형 계단 등 사무실이었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고 옷만 화이트 컬러로 갈아입었다. 호텔의 진지함을 내려놓고 갤러리, 비스트로, 루프 라운지 등을 활짝 열어놓아 오며 가며 들르는 이들이 많다. 예술가들을 영등포로 몰고간 ‘커먼센터’는 한때 중국집이었다. ‘룸’의 벽지며 거칠고 투박한 벽면은 아티스트의 작품에 집중하게 해주는 근사한 배경이 된다.
커먼센터

커먼센터

한 장의 추억으로 사라졌던 여관은 문화를 담아내는 공간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누르스름한 장판, 벽면 타일, 꽃무늬 벽지까지 살아 있는 ‘보안여관’은 지금 서촌에서 전시, 무용, 동네 프로젝트 등 다양한 생활 밀착형 예술 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엔 아이유×서태지의 ‘소격동’ 뮤직비디오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간장게장과 아귀찜이 주인공인 신사동 골목 어귀에서 창의적인 아우라를 내뿜는 ‘신사장’은 카페 겸 전시 공간이자 디자이너들의 숙소와 작업실로도 이용된다. 외관은 그대로 두고 영문 간판만 다시 달았음에도 세월을 품은 벽돌 덕분에 멋스럽기만 하다. 다락방과 안채 등 40년 전 건축 스타일을 볼 수 있는 구조 역시 공간의 존재 목적에 맞게 잘 살려냈다. 이들은 모두 헌집을 허물지 않고 새집으로 변신시켰다. 업사이클링, 리모델링, 리노베이션 등 업계 용어는 많지만 결국 모두 ‘건물 재활용’이다.

보안여관

보안여관

폐소된 한강정수사업소를 공원으로 바꾼 ‘선유도공원,’ 골프장, 교양관 시절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 건물 안의 건물을 설계한 어린이대공원 ‘꿈마루’, 물탱크가 있던 장소를 시인의 깊은 사색이 담긴 공간으로 변모시킨 ‘윤동주문학관’이 정부 차원의 접근이었다면, 이제는 건물 재활용이 일상생활에도 조금씩 자리 잡고 있다. 그것도 아주 창의적이고 착하고 근사한 스타일로 말이다. 비록 경제적인 이유로 시작해, 환경적인 이유로 당위성을 가졌다고 해도 이 두 가지 이유만이 건물 재활용의 미덕이었다면 이런 재미있는 공간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공간을 기획하고 채우는 자들에게 백지보다 때론 이면지가 영감을 주기도 한다. 지금 우리는 이들 건물에서 이야기를 찾아낸다. 그냥 미술관보다 사우나였던 미술관이, 단순한 레스토랑보다 공장이었던 레스토랑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머금은 공간에 서서 수십 년 전 당시의 현장감을 상상해본다.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에게 1930년대 문인들의 놀이터였던 보안여관은 완벽한 새로움이다. 혹자는 이를 복고 열풍과도 연결시킨다.

유타건축사사무소 김창균 대표는 단순히 낡은 건물을 살리는 것에서 나아가 유휴 공간을 활용하자는 움직임도 생기고 있다고 말한다. 더 큰 의미의 재활용이다. 단순히 통로 역할만 하던 울산 지하보도를 문화 예술 공간으로 바꾸고, 학교 복도를 북 카페로 바꾸는 식이다. 김창균 대표는 서울시립대 필로티 공간을 아치가 이어지는 멋진 휴게 공간으로 변신시키기도 했다.

신사장

신사장

도시도 태어나 성장하는 존재라고 봤을 때, 건물 재생은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단계다. 유럽에서는 이미 보편화된 방식이다. 공장, 발전소, 철도 등 산업 시대 유산을 갤러리, 학교 등으로 리모델링하는 작업은 산업 시대 종료 이후 예정된 수순처럼 따라왔다. 다만 우리는 재활용할 수 있는 건축물의 역사가 짧다. 한옥이라는 건축양식이 어느 순간 단절되었고 서양의 근대건축이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 건물을 부수거나 재생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이제 서울에 건물을 새로 지을 땅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해결해야 할 과제 역시 많다. 변신해야 할 곳이 자기 삶의 터전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의 경우, 마을의 원형을 유지하는 리모델링을 주장하는 정부와 뉴타운식 개발을 원하는 주민들 사이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당인리발전소도 똑같은 논점으로 첫 삽도 뜨지 못했다. 

 

아직 무조건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말하긴 이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합리적이고 착한 가치는 언제나 환영받는다는 사실이다. 경제 논리에 따라 놀랍도록 비슷한 건물이 가득한 나라에 시간을 품은 건물이 만들어내는 생기가 반갑다. 과거를 살았던 건물이 익숙한 듯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덕분에 거리의 표정이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