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치타

괴물 같은 아이들이 나타났다. 랩이라는 신인류의 언어로 무대를 장악한 이들은 누구보다 자유롭고 개성이 넘친다.
요즘 제일 잘나가는 다섯 명의 래퍼를 만났다. 뜨거운 비트를 타고 세상을 향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국 힙합 신의 역사는 이제부터다.

점퍼는 레오나드(Leonard), 핑크 브라톱은 폴앤앨리스(Paul&Alice), 옐로 가죽 스커트는 코치(Coach), 실버 네크리스는 크롬하츠(Chrome Hearts), 실버 링은 모두 엠주(Mzuu), 스틸레토 힐은 슈콤마보니(Suecomma Bonnie).

치타가 <언프리티 랩스타> 무대에 등장했을 때, 왕좌의 세대교체를 예감했다. 포유류 가운데 가장 빨리 달린다는 치타만큼 빠르고 선명한 랩, 선천적 스왜그가 있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로운 무대, 하지만 이 모든 소란스러움에 무심한 표정까지. 인류에 치타라는 새로운 종이 등장한 것만 같았다. 방송 첫 번째 미션부터 1등을 하기 시작한 치타의 존재감은 금방 휘발될 것이 아니었다. ‘내 이상형은 나보다도 더한 색기, 굳이 말 안 해도 백날 나불대는 새끼’ 일명 ‘-끼 라임’으로 제시, 강남과 함께 버벌진트의 ‘My Type’을 거머쥐었고, 실제 자신의 경험을 담아낸 ‘Coma 07’로 공연장을 눈물바다로 만들고 다음 날 음원 차트를 올킬했다. 방송 내내 화제의 중심에서 내려오지 않던 그녀는 <언프리티 랩스타> 최종 트랙의 주인공이 되며 두 달간의 여정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지금, 음원 차트에 천지개벽이 일어난 듯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 어디서든 치타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혹자는 여성 래퍼를 두고 ‘소수 직군’이라고까지 표현했는데, 드디어 여성 래퍼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암흑기 같았어요. 저는 항상 준비되어 있는데 현실적인 여건이 도와주지 않아서 고민이 많았죠. 나이도 이제 스물여섯 살이고, 이 바닥에서 10년 가까이 했는데 이름을 널리 알린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계속 음악을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기에 출연 제의를 받았어요.” 2010년 그룹 ‘블랙리스트’로 데뷔했고, 2년 뒤 크러쉬와 함께 ‘마스터피스’ 라는 그룹으로 앨범을 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그녀다. 지난 10여 년 동안 여성 래퍼는 윤미래 이후로 대가 끊긴 것만 같았고, 비인기 장르였다. 사실 어릴 때부터 춤추고 노래하는 걸 좋아해 고등학교 자퇴까지 한 그녀가 랩을 하게 된 건 방송에서 밝혔듯 인공 뇌사 상태까지 몰고 갔던 교통사고 때문이다. “사고로 노래를 온전히 하기 힘들어졌어요. 하지만 음악은 해야겠기에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무작정 달려들었어요. 그러다가 힙합에 조금씩 빠져들었죠. 감정을 예술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데 희열감을 느꼈어요. 여성 랩만으로 이뤄진 노래가 거의 없었고, 틈새시장이라고 생각했어요.(웃음) 나만 잘하면 언젠가는 빛을 볼 거라고 막연하게 믿었죠.” 한눈팔지 않은 집념에 예리한 통찰력까지 겸비한 셈이다. 치타는 출연한 여성 래퍼 아홉 명 중에서 유일하게 실력과 인성에 대한 논란도 없었다. 특히 정확하게 꽂히면서도 맛도 잃지 않는 랩은 독보적이다. 멍석이 깔릴 날을 기다리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얘기를 가사로 풀어내고, 온전히 전달해내는 데 집중한 시간들이 쌓인 결과다. 오로지 발음을 위해 연기 학원을 다니고 책을 낭독해서 모니터링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리고 제가 하드웨어가 좀 독보적이에요. 갖고 있는 엔진 자체가 좋아서 남들이 모방하기가 좀 힘들죠.(웃음)”

재킷은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 흰색 슬리브리스는 쟈딕앤볼테르(Zadig&Voltaire), 블루 패턴 쇼츠는 이로(Iro), 스타킹은 월포드(Wolford), 골드 목걸이와 팔찌, 링은 오데뜨 뉴욕(Odette New York at Beaker).

“여긴 꽃 피울 자리 없는 정글, 난 꽃이 되길 거부해 맹수가 됐지 덤블” 같은 차진 가사도 놀라웠지만, 치타가 정점을 찍은 곡은 역시 ‘Coma 07’이었다. 뇌사라는 설명하기도 힘든 경험을 부활시킨 건 강인한 정신력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 실제로도 치타는 사람들이 그 노래를 통해 위안을 받길 바랐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저 사람은 저렇게 힘든 일을 겪었는데도 지금 무대 위에서 멋지게 랩을 하고 있잖아. 나도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생각하길 바라며 가사를 썼어요.” 하지만 무명 시절이나 지금이나 음악의 방향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다. 반드시 가사에 담고 싶은 주제도 없다. 음악을 하면서 뭔가를 정해두는 건 독이자 틀이라고 생각한다.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을 담아낼 뿐이다. 매 미션마다 직접 했다는 헤어&메이크업과 스타일링도 연장선에 있다. “헤어, 메이크업, 패션은 모두 음악의 한 부분이에요. 저에겐 모두 공통 집합체, 말하자면 하나의 장르 같아요. 제가 쓴 가사가 잘 전달될 수 있게 스타일링하는 것뿐이에요.” 짧게 자른 머리, 서예가도 못 따라갈 아이라인, 그 사이를 메우는 음영 섀도가 치타의 상징이 되었지만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얘기다. “옷도 굉장히 많은 걸 시도하는 편이에요.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신고 나가기도 하고, 완전 하이패션으로 올 드레스업 하고 혼자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기도 해요. 상황에 들어맞지 않는데 재미있는 부조합 상황, 일명 ‘상황 콜라보’를 하고 놀아요.”

요리, 제트스키, 등산, 쇼핑, 동물 등 좋아하는 게 정말 많고 이런 관심사는 가사 쓰는 데 ‘영감님’을 불러주는 주문이 되어준단다. 치타는 언제 낚일지 모르는 이야기를 위해 항상 엔진을 켜두는 래퍼다. “제 인생을 영화로 보면 <언프리티 랩스타>는 예고편이에요. 예고편보다 더 재미있는 본편을 만들어냈으면 좋겠어요.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죠.” 5월 말 치타는 ‘어쨌든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음반으로 다시 무대에 설 예정이다.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고, 이야기를 완성시켜줄 모습으로. 수천수만 번의 랩을 뱉고 삼킨 치타가 눈부시게 빛나는 비트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