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은 출판의 미래일까?

누구나 책을 쓰고 발행인이 될 수 있다. 필요한 건 컴퓨터 한 대뿐이다.
신간 <패션으로 영화읽기>의 저자 이숙명이 전자책 셀프 퍼블리싱의 가능성을 말한다.

메탈 뱅글은 캘빈 클라인 주얼리(Calvin Klein Jewelry), 반지는 엠주(Mzuu)

나는 책의 물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증식력이 어찌나 왕성한지, 조금만 방심해도 마구 불어나 책장을 미어터지게 하고, 가로로 눕기 시작하다가, 끝내는 오뉴월 잡초처럼 창궐해 먼지다듬이를 뿜어댄다. 출판사가 잘되려면 독서가가 아니라 수집가를 노려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변두리 전세 난민인 내게 수집은 사치일 뿐이다. 책의 물성에 전혀 애착이 없는 나 같은 부류는 추정컨대 한국 독자들 중 3~5%에 불과하다. 5조원을 헤아리는 한국 출판 시장에서 전자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 정도다. 아마존 킨들의 영향으로 미국에서는 전자책 점유율이 20%를 넘어섰지만 한국은 멀었다. 그럼에도 올봄, 나는 전자책 출판사를 차리고 첫 책을 출간했다. 전업 칼럼니스트로서 자본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사업이기도 했고, 문화₩예술 창작자들이 제작, 유통사에 ‘삥’ 뜯기는 게 늘 안타까운 사람으로서 내 필드에서만이라도 콘텐츠 직거래의 꿈을 실현해보고 싶었다. 평소 함량 미달의 책을 만나면 ‘겨우 이깟 것 때문에 나무를 자르고 탄소 발자국을 남겼나’ 화가 났던 탓도 있다. 인세의 바다에 통발을 여럿 던져두면 간혹 눈먼 노래미라도 잡히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물론 있었다.

시장의 데이터는 활자의 위기를 가리키는데 아직도 책을 쓰고 싶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하지만 책을 낸다는 건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나는 종이책 네 권을 집필했는데 계약금 외에 추가 인세를 받은 것은 한 권뿐이고, 한 권은 3년 만에 간신히 초판을 소진했으며, 나머지 두 권은 제작비도 못 건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엔 어느 출판사가 대형 온라인 서점에 일주일 동안 배너 광고를 걸었는데 그 책이 겨우 손가락으로 셀 만큼만 팔렸다는 흉흉한 소문을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작비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출판사에도, 상품성이 검증되지 않은 필자들에게도, 전자책은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도 만들 수 있는 게 전자책이다. html을 기반으로 한 제작 툴을 익히고, 표지 디자인을 하고, 출판사 신고와 사업자 등록, 정산 등 수십 가지 귀찮은 과정 끝에 한 달 수입이 500원에 그쳐도 실망하지 않을 자신만 있다면 말이다.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다. 아마존에서는 전자책 셀프 퍼블리싱으로 대박이 난 후 종이책을 계약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국내의 경우 인터넷 장르 소설을 논외로 치더라도, 자신의 여행기를 전자책으로 출판하거나, 저작권이 만료된 소설을 번역해 500~1,000원씩 올려 몇천만 원의 수익을 올린 저자들이 있다. 해외 셀프 퍼블리싱 플랫폼 스매시워즈의 마크 코커 대표는 독립작가들이 2020년 전자책 출판 시장의 50%를 장악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체인 밴드 시계는 캘빈 클라인 워치(Calvin Klein Watch), 반지는 엠주(Mzuu), 태블릿 PC는 아이패드 에어2(iPad Air2)

한국의 전자출판은 아직 시작 단계다. 아마존의 국내 진출이 기대를 모았지만 ‘코키리북’이라는 해괴한 이름을 보니 인지도 확보에만 수년은 걸릴 듯하고, 2015년 도입된다던 디지털 교과서는 정부의 방관으로 흐지부지되고 있다. 하지만 태블릿으로 <뽀로로>와 <겨울왕국>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전자책에는 텍스트와 그림뿐 아니라 음악과 영상도 삽입할 수 있다. 같은 책을 읽는 독자들이 밑줄 그은 문장을 공유하고, 해설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독서는 공감각적 체험으로 진화할 것이다. “현시대에 종이 책을 고집한다는 것은 종이 시대에 양피지를 고집하는 것과 같다.” 페이퍼크레인에서 발행할 다음 전자책의 저자, 영화감독 조원희의 말이다. 동의한다. 물론 아직은 과도기인 만큼 팔리는 책도 한정적이다. 예스24의 경우 전자책 베스트셀러 20위권에 ‘19금’ 딱지 붙은 소설만 12권이다. 연예인 섹스 비디오가 한국 인터넷 발달의 촉매제였듯, 전자책 시장도 육욕을 먹으며 자라는 중이다. 어쩌면 이 시장을 부흥시키기 위해 필요한 건 정부의 지원이 아니라 한국판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일 것이다. 하지만 전자책 헤비 유저들이 모인 리디북스의 베스트셀러 순위는 양상이 다르다. 인문서, 에세이, 문학 서적, 학습서 등이 고루 포진해 있다. 내 책 <패션으로 영화읽기>가 여섯 권 팔린 날 여성 분야 1위, 문화₩예술 분야 7위에 오른 걸 보면 규모가 크진 않겠지만 말이다.

아직 불확실한 시장이지만 그래도 도전해보고 싶다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매달 개최하는 전자책 셀프 퍼블리싱 강좌를 권한다. 나 역시 전자책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거기서 배웠다. 자기 콘텐츠를 가진 저자들, 프리랜스 기획자들, 기존 출판사 편집자들이 강의를 들으러 온다. 제작 기술의 기본도 배울 수 있다. 그 밖에는 일반적인 종이책 출판과 다를 게 없다. 책을 기획하고, 글을 쓰고, 교정, 편집, 서점 등록, 마케팅 등을 하면 된다. 쓰고 보니 허망하다. 한강을 다 메울 만큼의 카페인과 니코틴을 흡입하고, 영어 포럼 100만 개를 뒤지고, 각종 IT 기기와 씨름하고, 관공서를 들락거리고, 수십 통의 메일을 쓰고, 초조하게 기다렸던 날들이 단 한 줄로 정리가 되다니!

전자책이든 종이책이든 결국 중요한 건 콘텐츠다. 사람들은 늘 묻는다. “그게 팔려요?” 일반론을 말하는 거라면, 종이책이 안 팔리는데 전자책이 팔릴 리 없다. 독립출판인들은 오늘도 먹고살기 위해 사보 교정을 보고, 대학 교수들의 누더기 같은 원고를 윤색하고, 중소기업 사장들의 자서전을 대필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책을 내는 이유는 책이 좋기 때문이다. 콘텐츠에 대한 욕심과 애정이 동력이 되지 않으면 출판은 불가능하다. 전자책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건 내가 할 소리는 아니다. 애초 나의 목표는 조용히 시간 때울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출판사의 컨셉도 따로 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점점 뜻을 같이 하는 저자들이 모여들었고, 마침 기획된 원고가 모두 영화에 관한 것이라 자연스럽게 ‘영화 책 시리즈를 내는 부티크 출판사’라는 것으로 맥을 잡았다. 방향성이 생기니 기획이 더 수월해졌다. 육아 때문에 경력이 단절된 번역가 친구에게 내년에 개봉할 할리우드 영화의 원작 소설 번역을 부탁했고, 대중성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평론가의 책도 출간하기로 했다. 전자책은 가벼워야 팔린다는 게 상식이지만, 가벼운 책이라고 다 팔리는 건 아니다. 그럴 바엔 수익을 떠나 즐겁게 만들 수 있는 책을 내자는 것이 궁극의 목표가 되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노래미도 잡고 우럭도 잡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