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작은 집 짓기

2017.01.11

by VOGUE

    작은 집 짓기

    서울 도심 한복판에 그림 같은 내 집을 짓는다는 건 이룰 수 없는 로망일지 모른다.
    그 꿈 같은 일을 실행에 옮긴 이들이 있다. 영화 프로듀서 김종대와 인테리어 디자이너 권희라다.
    지난 3월 후암동에 협소주택을 완공한 이들에게 그 뒷이야기를 들었다.

    ‘협소주택 다이어트’라는 게 있다. 온종일 좁고 높은 계단을 수십 번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저절로 살이 빠진다는 신종 다이어트 비법이다. 만약 직접 집을 짓는다면 더 확실히 살을 뺄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한다. 집 짓기에 뛰어든 후, 우리 부부는 몸무게가 수킬로그램은 빠졌다. 줄어든 건 지방뿐만이 아니다. 살림살이도 저절로 최소화되었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들다 보면 자로 잰 듯한 가구 배치는 기본이고, 불필요한 물건은 저절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는 동안 우리 삶에 진정으로 중요한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덕분에 취향은 더욱 날이 섰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집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협소주택’이라는 단어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일본어의 한자를 우리 말 음 그대로 옮겨놓은 협소주택은 52년 일본의 건축가 마스자와 마코토가 지은 9평 남짓한 자택, ‘최소한 주택’이 그 시작이었다. 이후, 인테리어 잡지 이 2000년 창간 2호의 간판 기획으로 다룬 ‘협소주택 시리즈’가 인기를 끌면서 협소주택이라는 말이 일반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선 ‘자투리 땅에 싸게 지은 작은 집’을 통칭하듯 사용되지만 단순히 규모만 의미하진 않는다. 집을 지을 수 없을 만큼 협소한 땅에 최상의 기술력과 디자인의 힘으로 공간 활용도를 높인 주택이어야 한다. 땅콩주택과는 조금 다른 얘기다.

    예를 들어 건물과 건물 사이에 어중간한 틈이 있다고 치자. 도로 상황마저 열악해 레미콘이 들어갈 수 없고, 펌프카는 물론이거니와 포클레인이나 지게차도 꿈도 못 꾸는 그런 땅 말이다. 도저히 건물을 지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틈새 땅에 조립식 건물(Prefab)의 구조물로 멋들어진 3~4층의 고층 건물을 지으려면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때 전혀 좁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하는 게 또 디자인의 힘이다.

    그래서 협소주택은 공사비가 싸지 않다. 오히려 비싼 편이다. 건축주들 역시 대체로 건축 자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위 사람들이 집을 지으면 10년은 늙을 거라며 우리를 말렸다. 도심에서는 엄청난 민원이 쏟아져 나와 괴로울 거라고 겁을 주기도 했다. 무수히 많은 괴담이 우리를 붙잡았다. 하지만 나와 아내의 결심은 확고했다. 가장 큰 이유는 어린 딸을 아파트에 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 취향이 없는 그런 표준화된 환경에 아이를 밀어 넣기 싫었고, 층간 소음이라는 이슈도 한몫했다. 아파트에 살게 되면 부록처럼 따라오는 밑도 끝도 없는 교육 열풍 속에서 남의 아이와 우리 아이를 비교하고 싶지도 않았다. 영어 유치원에 보낸다든가 여러 학원을 뺑뺑이 돌린다든가 하는 식의 삶도 원치 않았다. 대신 아이를 위한 멋진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언어가 사고의 범위를 규정하고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듯, 공간에 대한 경험이 그 사람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에 홀린 듯 불나방처럼 불속으로 뛰어들고야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맘에 드는 집터를 발견한 게 2년 전 이맘때다. 솔직히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아 이런저런 동네를 구경만 하고 다녔다. 이태원, 경리단길, 해방촌, 합정, 상수, 연남동, 이화동, 성북동, 부암동… 짬 날 때마다 맛집을 찾아가는 식으로 동네 산책을 하는 묘한 취미가 생겼다. 그렇게 어슬렁거릴수록 아기자기한 휴먼 스케일의 복잡한 골목들이 마음을 끌었다. 뭔가 사람 사는 느낌이랄까? 신도시가 한 종류의 나무만 빼곡하게 심어놓은 화원처럼 지루하다면, 골목으로 이어진 동네는 무심히 핀 이름 없는 꽃들이 조화를 이룬 멋진 숲 같았다. 결국 우리는 후암동의 어느 좁은 골목길에서 걸음을 멈췄다. 30평 정도의 소규모 땅인 데다 경사로라 만만찮은 도전이 될 거라 각오했다. 공사 전에 우리가 들은 그 숱한 괴담이 대부분 사실이라는 걸 깨닫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도심에 집을 짓는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돈을 많이 들이든 적게 들이든 마찬가지다. 수개월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세세하고 정교한 도면을 그리고 또 그려도 소용없다. 도면조차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시공자를 만나는 순간, 모든 노력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테니까. 경험에만 의존해 집을 짓는 까막눈 시공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건 충격이었다. 우리나라엔 건설은 있어도 건축은 없다는 말을 실감했다. 애초에 서양의 건축양식을 들여올 때 기술만 받아들인 결과다. 건축이라는 말은 건설과 달리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이 강하다. 한 사회가 특정 지역에 정착하면서 쌓여온 문화적 체험이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건설 기술은 뛰어날까? 수년간 아파트를 중심으로 발달한 덕에 아파트에 관한 기술력은 충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택은 다르다. 이토록 열악한 환경에서 고난도의 협소주택을 짓는다는 건 한마디로 바보 같은 짓이다.

    건축 허가를 받기 위한 설계만 6개월이 걸렸고, 시공사를 선정하느라 다시 3개월을 흘려보냈다. 각종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던 8개월여의 공사 기간을 극복하고 마침내 이사한 게 최근 일이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그 기나긴 시간과 모진 풍랑에 휩쓸려 다닌 사연을 다 털어놓자면 밤을 새워도 부족하다. 바보 같은 짓이었음은 분명하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부주의하고 심사숙고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힘든 일도 많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공공의 적들이 등장한 덕에 부부 사이도 더욱 돈독해졌다. 우리의 선택을 지지해주는 부모님 역시 큰 힘이 되어주었다. 처음엔 작은 집에 3대가 모여 사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마음고생을 함께하다 보니 그런 것쯤은 하찮은 문제가 되어버렸다.

    요즘 딸아이는 지친 기색도 없이 온 집 안을 놀이터 삼아 하루 종일 위층과 아래층을 뛰어다닌다. 아이를 볼 때마다 우리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이사 온 날, 아이에게 전 집이 좋은지 지금 집이 좋은지를 물어보았다. 아무 망설임도 없이 아이는 지금이 더 좋다고 답했다. 40평대에서 15평으로 크기가 반 이하로 줄었고, TV도 없지만 불편함보다 재미가 크다. 특히 4층의 커다란 커튼 월 아래 공간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밖으로 소풍이라도 나온 것마냥 파란 하늘이 주변에 펼쳐지는 탓이다.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공간이 있다는 걸 아이도 자연스럽게 느끼는 듯하다. 비록 작고 불편할지는 몰라도, 대신 따스한 자연을 얻었다. 그곳에서 해와 달, 바람과 구름, 그리고 별빛의 도움을 받으며 아이는 풍요롭게 커갈 수 있을 것이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근처 골목길에서 우연히 집을 바라본 적이 있다. 다사다난하던 17개월간의 사연을 담은 채, 말없이 선 집은 마치 혼자 석양을 즐기는 듯했다.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던가? 그 그릇에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가 담길 것이다. 집의 크기는 중요한 게 아니다.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1인당 최저 주거 기준은 14㎡라고 한다. 3인 가족이라면 약 12평에 충분히 살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렇다. 만약 우리가 32평 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계단과 엘리베이터 등 공용면적이 전체의 약 20%를 차지한다. 나머지 공간은 대형 와이드 TV와 큼직한 소파, 침대 따위의 덩치 큰 가구의 몫이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사람에게 필요한 건 자신이 묻힐 한 평 남짓한 땅뿐이다. 필요 이상으로 크고 화려한 집의 무게에 눌려 삶이 엉망이 되어버리는 것보단 어떻게 사는 게 자신에게 맞는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각자의 취향이 반영된 집에 살아보는 게 더 의미 있지 않을까? 그런 집이 많아질수록 행복한 개인도 늘어날 것이다.

    사실 우리 부부는 협소주택이란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정작 중요한 의미는 거세되고 규모에만 초점을 맞춘 듯한 느낌 때문이다. 단순히 공사비가 적게 드는 작기만 한 집을 지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알아가는 탐구 여행의 결과로 도달하게 되는 나만의 공간과 삶과 이야기가 있는 집이어야 한다. 몇 년 전, 땅콩집이 유행할 때 동네 집 장사들이 유사한 컨셉의 싸구려 땅콩집을 마구잡이로 지어 결국 전 재산을 투자한 거주자들만 큰 피해를 입은 것과 같은 상황이 또다시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애정과 고민 없이 지어진 흉측하고 비좁은 집에 갇혀버리는 일이 없기를! 그런 식으로 왜곡된 협소주택을 일본에서는 ‘미니도타테(ミニ戶建て)’라고 부른다. 집 가(家) 자가 아니라 집 호(戶) 자를 써 비하한다. 집 장사들이 땅을 쪼개고 또 쪼개서 협소하게 만든 후, 대충대충 비좁게 지어놓은 집이라고 보면 된다.

    불필요한 기름기를 쫙 뺀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보자는 의미에서 시작한 우리의 협소주택 프로젝트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집이라는 건 그냥 두면 점점 비대해지는 물건이라는 걸 살수록 느낀다. 모든 것이 집안에 다 있을 필요는 없다. 차라리 도심의 편리함을 최대한 활용해보려고 한다. 거창한 서재를 만드는 대신, 가까운 도서관을 이용하고, 부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형 냉장고를 버리고 가까운 재래시장을 활용해 그때 그때 신선한 재료를 구입하는 식이다. 운동 효과는 덤이다.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저절로 몸이 건강해진다. 우리는 이 집을 ‘디자인 하우스’라고 부르고 있다. 작아도 내 취향이 반영된 집에서 살고 싶다면, 꼭 이 바보 같은 집 짓기에 동참해보길 권한다. 공간이 우리의 삶을 쾌적하게 디자인해주는 그런 시너지 효과를 분명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에디터
    글 / 김종대(영화 프로듀서)&권희라(인테리어 디자이너), 피처 에디터 / 이미혜
    포토그래퍼
    HWANG IN 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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