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중년 여자들의 드라마

억척스러운 엄마가 아니다. 막장 드라마 속 악녀도 아니다.
지금 안방극장에선 그저 평범한 중년 여자들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불륜, 복수, 시월드 등 빤한 굴레를 벗어난 여자들의 진짜 이야기. TV가 흥미진진해졌다.

평생 한 번도 같은 집단에 속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행여 엘리베이터에 단둘이 갇힌다 해도 말 섞지 않으려 마지막 순간까지 눈치만 볼 것 같다. SBS <풍문으로 들었소>의 최연희(유호정)와 KBS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김현숙(채시라) 얘기다. 뿌리가 친일파였다는 것만 살짝 눈감으면 ‘누대 명문’ 자손이자 전직 장관 딸로 사랑과 호사를 원 없이 누리며 자라 부모가 골라준 신랑감과 정혼, 대형 로펌 대표 아내로 우아하게 살아온 최연희는 신분제가 폐지된 한국 사회에서도 자타 공인 완벽한 귀부인이다. 반면에 바람나 집 나간 아버지 소식은 사망 통지서로 듣고, 공부 잘하는 언니에게 엄마 관심을 빼앗겨 천덕꾸러기로 자라다 고등학교 때 퇴학당하고 스무 살에 사고 쳐서 결혼한 것도 모자라 결국 이혼에 사기까지 당한 김현숙의 인생은 어디서부터 하자 보수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뿐이다. 하지만 이 극과 극의 두 여자가 요즘 월화, 수목 밤의 주인공이다.

최연희에게 악몽이 시작되는 건 막 서울 법대 합격 통지를 받은 아들 인상(이준)이 만삭의 소녀 서봄(고아성)을 집에 데려오고, 그 “행색이나 뭐나 도무지 인상이랑 스치지도 않게 생긴” 아이가 자신의 침실에서 덜컥 출산을 하면서부터다. 게다가 순하기 그지없고 처신이 요즘 애들과는 달라 기대가 컸던 아들은 처자식에 눈이 멀어 반항을 하고 몰래 혼인신고까지 하려 든다. 이 시점에 대개의 드라마 속 시어머니라면 서봄에게 물이나 주스를 끼얹거나 돈 봉투를 집어 던지며 악다구니라도 할 법한데, ‘빤스’라는 단어조차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할 만큼 교양으로 철갑을 두른 최연희는 울며 겨자 먹기로 결혼을 허락하고 속상해서 잉잉 울어버린다. 예의 바르긴 한데 말대꾸 따박따박 하는 며느리를 향해 울분을 터뜨리다가도, “압도적으로 아름다우시다”는 칭찬에 신나 패물을 갖다 안기는 어린애 같은 구석은 심지어 사랑스럽기조차 하다. 아들에 대한 애정과 가문의 품격에 대한 자부심이야 모든 일일, 아침, 주말 드라마 속 사모님들의 공통점이지만, 갑질조차 품위 있게 하려다 개복치처럼 여리디여린 멘탈 때문에 거품 물며 파르르 쓰러지는 ‘큰 사모님’은 분명 새로운 시월드의 문을 열었다. 물론 시어머니 노릇만이 최연희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얄미운 동창이 남편의 과거 애인이라는 걸 잊지 못해 신경을 곤두세울 때도, 영 뜨겁지 않은 부부 관계 개선을 위해 사향 주머니까지 준비했다가 또 자존심을 다쳤을 때도 아닌 척하다 히스테리를 부리고 마는 이 귀부인의 마음 깊은 곳엔 해소되지 않은 욕망이 파묻혀 있다.

김현숙의 경우는 더욱 특이하다. 과거의 상처를 잊지 못해 복수를 꿈꾸지만, 그 대상은 매정하게 자신을 버린 첫사랑 같은 게 아니라 고교 시절의 담임 교사다. 마음 둘 곳 없이 방황하던 사춘기 시절 학교 담 넘어서 레이프 가렛의 ‘팬질’ 좀 하러 갔기로서니 정학을 내리고, 증거도 없는 도둑 누명을 씌워 퇴학시켜버린 교사 나말년(서이숙)에 대한 미움과 분노는 30여 년 가까이 지난 현재에도 김현숙을 지배한다. 자상하고 능력 있는 전 남편도, 박사까지 마치고 대학 강의를 맡은 자랑스러운 딸도 그의 우울과 혼란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결국 자살 시도까지 한 끝에 자신의 인생을 되찾기 위해 퇴학 무효 처분을 받아내기로 한 현숙은 탄원서를 쓰고,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며 생기를 되찾는다.

 

“난 이 언덕을 넘어야겠어. 설사 안 된다 해도 나한텐 이 과정이 중요해”라는 다짐은, 사람에겐 나이와 상관없이 자기만의 싸움과 치유해야 할 상처가 있음을 확인시킨다. 아나운서로 성공했지만 나이 들며 메인스트림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현숙의 언니 김현정(도지원) 역시 마찬가지다. 고생하는 엄마에게 착한 딸이 되기 위해 한눈팔지 않고 공부했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일에만 매달려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젊은 후배들에게 자리를 빼앗겨버린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역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한직인 정오 뉴스를 맡고 대타로 시그널 녹음을 하며 목이 메어도 현정이 자존심을 지키는 길은 일을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해내는 것이다.

신데렐라 이혼녀, 헌신적인 엄마, 못된 시어머니, 복수, 혹은 불륜에 얽힌 악녀 등 중년 이상의 여성 캐릭터들이 틀에서 찍어낸 듯 비슷비슷하게 소비되는 안방극장에서 이처럼 개성 강하고 얄팍하지 않은 여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건 정성주와 김인영이라는 두 여성 작가 덕분이다. 대표작 <아줌마>를 비롯해 <아내의 자격>과 <밀회> 등 수많은 작품에서 가짜 지식인과 기득권의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풍자해온 정성주 작가는 최연희를 통해 한층 더 세련돼진 ‘갑’들의 태도 이면의 속 내를 폭로한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 시리즈에서 일하는 30대 여성의 고민과 성장을 위트 있게 그리고 <태양의 여자>에서 자매 간의 애증을 밀도 높게 담아냈던 김인영 작가는 <착하지 않은 여자들>을 통해 20대에서 60대에 걸친 모녀 3대의 인생과 각자의 자아 찾기를 따라간다.

그 결과 우리는 <청춘의 덫> 이후 유호정이라는 배우의 재능이 온전히 빛을 발하는 작품을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됐고, 독기를 빼고도 귀신같은 채시라의 연기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이 여자들과 함께하는 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못내 아까울 만큼, 드물고도 반가운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