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의 유머감각

근육이 웃긴다.
위압적인 기세로 링과 코트, 그리고 운동장을 호령하던 스포츠 스타들이 지금 TV 예능을 장악했다.
의외의 활약이고, 반전의 웃음이다.

서장훈은 요즘 거의 TV에 산다. 매주 월요일엔 Mnet 신인 발굴 진흥 프로그램 <야만TV>의 사회를 보며, 토요일 밤엔 예능 토크쇼 <세바퀴>에 나와 춤도 추고 노래도 한다. 최종 5인 후보에서 탈락하긴 했지만 <무한도전>의 새 멤버를 뽑는 ‘식스맨’ 프로젝트에서도 그는 강력한 후보였다. <마녀사냥>과 같이 솔직함이 필요한 19금 프로그램에선 발군의 입담으로 활약하고, 지누션의 컴백 싱글 뮤직비디오에선 덩치의 비주얼로 화면을 압도한다. 전직 농구 스타의 예상치 못한 후반전이다. 그는 4월 말 첫 방송되는 tvN의 오락 프로그램 <고교 10대 천왕>의 MC로도 발탁됐다. 그리고 그 못지않게 요즘 예능에서 주가가 높은 건 추성훈이다. 서장훈만큼 다작은 아니지만 그는 지난해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사랑이 아빠로 등장해 인기를 누렸고, 지금까지 꾸준히 브라운관에 단골 출연하고 있다. 오지 생존 프로젝트 <정글의 법칙>에선 파이터로서의 기량을 발휘했으며, 얼마 전 종영된 <삼시세끼-어촌 편>에선 이틀 밤 게스트로 나와 섬 생활을 체험했다. 유도, 이종격투기 등 스포츠 중에서도 가장 거칠고 험한 세계에서 뒹굴었던 남자의 번외 편으론 꽤나 힘을 덜어낸 모양새다. 확실히 지금 근육이 예상치 못한 활약을 하고 있다.

모래판에서 샅바 싸움을 하던 강호동은 예능의 스타가 됐다. 그의 뒤를 이어 최홍만 역시 TV 쇼의 링으로 진입했다. 삼성의 간판타자 양준혁은 <1박 2일> 게스트를 거쳐 현재 TV조선 <애정통일 남남북녀>에서 가상 결혼 생활 중이며, 코트를 누비며 농구 공을 튕겼던 연세대, SK나이츠의 수비수 석주일은 요즘 <유자식 상팔자>에서 굴욕의 아빠 체험을 하고 있다. 마치 본경기 이후 예능의 연장전이 이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예능 속 전직 스포츠 스타들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들은 주로 덩치로 시청자를 놀라게 했고, 거인의 ‘웃픈’ 에피소드로 방송 분량을 뽑아냈다. 가령 키 217cm의 최홍만이 무대에 나와 걸 그룹 춤을 추고 152cm의 코미디언 김신영을 들어 보일 때, 그건 빤한 웃음을 노린 연출이었다. 이들은 오락 프로그램 속 어엿한 예능인이라기보다 깜짝 놀랄 세상의 진기 명기에 가까웠고, 그래서 대부분 단발성으로 등장했다 사라졌다. 서장훈은 이 서커스의 묘기를 바라는 반응이 얼마나 지겨웠으면 라디오 프로그램 <두시탈출 컬투쇼>에 나와 “생수병 들고 있는데 ‘요구르트병인 줄 알았다’는 말을 수백 번 들었다”고 하소연했다. <우리동네 예체능> <정글의 법칙>과 같은 체육 프로그램에 나와 힘을 쓰거나, 보통의 현실에 쇼크를 주는 걸리버 역할을 담당하는 딱 그 정도. 다소 아쉽긴 해도 이게 지금까지 운동을 졸업한 전직 선수들의 TV 속 자리였다.

예능은 캐릭터 싸움이다. 별나거나 거대한 외모로 웃기는 건 초반전에 한한다. 운동선수 역시 몇 번의 비주얼 쇼크, 혹은 힘자랑 이후엔 나름의 캐릭터를 보여줘야 장수하는 법이다. 그래서 강호동은 거의 호통에 가까운 대화법으로 쇼의 골목대장이 되었다. 양준혁은 다소 비굴한 아저씨의 옷을 입고 <1박 2일>의 멤버로 활약했다. ‘모두 까는’ 해설로 인터넷 농구 중계에서 캐릭터를 다진 석주일이 아줌마 수다에 가까운 입담으로 오지랖의 예능인이 된 것 역시 스포츠 스타 출신 예능인의 모범 사례다. 그리고 누구보다 지금 이 캐릭터 놀이에서 앞서 있는 건 서장훈이다. 최홍만 못지않게 큰 키와 덩치의 소유자인 그는 그저 또 한 명의 걸리버로 스쳐 지나가기 쉬웠지만,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아리송하게 선을 긋는 묘한 태도가 빤하지 않은 예능 스타를 낳았다. 가령 서장훈은 <세바퀴> MC석에 앉아 “매주 나가고 있는 게스트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라디오스타>에 출연해서는 자신은 방송인, 예능인이 아니라고 우겼으며, <무한도전> ‘식스맨’ 프로젝트 편에 나와서는 “어차피 욕먹은 거 뭐라도 하고 욕먹기 위해 출연한다”고 변명했다. 그러니까 그는 자칭 연예인 아닌 연예인, 방송인 아닌 ‘셀럽인’, 그리고 출연자 아닌 참여자인 거다. 몸집의 위세로만 보면 폭탄 같은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낼 것 같은데 실상 하는 말들은 겸손투성이다. 모두가 과장하기 바쁠 때 서장훈은 축소하고, 웃음을 위해 떠벌리느라 안달 난 쇼의 무대에서도 그는 추스르느라 정신없다. 서장훈이 유일하게 부정하거나 정정하지 않았던 직업은 부동산 임대업자다. “사회 정의에 맞는 수준의 임대료를 받는” 착한 건물주 예능인 서장훈은 분명 지금까지 없던 캐릭터다.

<삼시세끼> 시리즈의 나영석 PD는 ‘어촌 편’에서 추성훈과 촬영한 뒤 모 인터뷰에서 “다음 시리즈를 기획한다면 꼭 다시 한 번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현장에 적응한 그가 보여준 모습이 흥미진진했으며, 다소 뒤늦게 열리는 예능감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란다. 근래 스포츠 선수 출신 예능인들의 활약상은 분명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포맷 덕이기도 할 것이다. 순발력과 재치로 승부해야 하는 무대 위에서 유리한 건 당연히 전업 코미디언들이었다. 하지만 최근 예능의 주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고, 그 안에서 스포츠 스타들은 나름의 매력을 어필할 시간을 부여받았다. 딸 바보 파이터 추성훈, <아빠! 어디가?>의 꼬마 스타 윤후의 열혈 팬 서장훈 같은 건 꽤 오랜 시간의 드라마가 쌓여야 가능한 캐릭터들이다. 아쉽지 않을 정도의 인지도와 예능인으로선 신선한 페이스를 담보한 근육의 전직 스포츠 스타들. 이들이 지금 예능 펀치를 날린다. 요즘 TV가 보다 다채롭게 보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