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가정식 테이블

오오쿠보의 친구 집에서 들이켜던 오차쓰케와 마레 지구의 골목 식당에서 맛보던 라타투이가 아찔하게 그리울 때가 있다. 미슐랭 레스토랑의 푸아그라와 상하이의 제비집 요리보다 흡족한 세계인의 진짜 가정식 테이블을 서울에서 찾았다.

여행의 맛을 뇌세포에 각인시키는 순간은 아라베스크 문양이 현란한 궁전과 박물관보다 해 질 녘 뒷골목 풍경처럼 소소한 우연에서 비롯될 때가 많았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미슐랭 레스토랑의 신묘한 코스 정찬이나 라스베이거스의 성대한 뷔페를 마주하면 신기하긴 하지만, 결국 오래도록 추억하게 만드는 맛의 감동은 현지에서 지나치듯 한술 떴다가 반해버린 소박한 가정식으로부터 시작됐다. 현지인들에겐 흔하디흔한 백반 상차림이 이방인의 외로움과 여행의 고단함을 덜어주고, 위로와 온기로 여행의 참맛을 일깨우곤 했던 것이다. 그곳의 가정식을 다시 음미하고 싶다면? 비싼 항공권을 끊을 필요는 없다. 서울 하늘 아래서도 바르셀로나와 교토에서 맛보던 그 가정식 테이블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니!

지난해 가을 한남동 골목에 문 연 ‘라운드 어바웃(Round About)’은 그야말로 일본식 가정식을 전면에 내세워 각광받고 있는 소박한 식당이다. 9,000원짜리 오차쓰케 정식을 후루룩 말아 먹고 나니, 오오쿠보의 친구 집에 온 듯했다면 격한 표현이려나? 밥에 녹차를 부어 먹는 오차쓰케는 일본에선 그야말로 평범 무쌍한 간단 가정식. 처음 맛볼 때만 해도 영 심심하다고 느꼈으나 점차 익숙해졌는데(특히 술 먹은 이튿날 아침!) 그 오묘한 오차쓰케의 풍미를 서울에서 재현해내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라운드 어바웃은 소문 자자한 도쿄 니혼바시의 덴푸라 맛집 ‘카네코 한노스케’에서 직접 공수해온 아게다마(튀김알)를 참기름으로 튀긴 뒤 가니시로 올려 오차쓰케의 고소함을 극적으로 살려내고 있다. 직접 맛보고 반한 일본 가정식을 소개하고 싶었다는 김태언 대표는 전형적인 전통식 대신 일본식 카레 오므라이스, 규동, 오차쓰케 같은 소박한 식단을 메뉴판에 적어 넣었다. 다행히 48시간 숙성시킨 카레와 아침마다 직접 만들어내는 돈가스까지 인기가 좋아 곧 2호점에 대한 꿈을 실현시킬 단계다.

테이블이 고작 다섯 개 놓인 작은 레스토랑 ‘다 파스타(Da Pasta)’는 오픈 4개월 만에 부암동에서 놓칠 수 없는 맛집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오랫동안 유학한 오너 셰프 목혜숙은 ‘이탈리아 가정식’을 간판에 내걸었다. 한국에서 먹는 예쁘게 장식된 파스타가 양부터 맛까지 현지와 너무 달라 이상할 정도였다는 그녀는 수수하고 푸짐한 가정식을 지향한다. 다 파스타의 대표 메뉴는 파지올리. 스튜와 파스타의 조합 같은 이 얼큰한 국물 파스타는 이탈리아에서 특히 겨울철에 집집마다 즐겨 먹는 영양식이다. 강낭콩과 렌틸콩, 페페론치니(매운 고추), 이탈리아 파슬리, 양파를 토마토소스에 넣고 되직하게 끓이다가 작은 별 모양의 파스타 스텔리네를 함께 넣고 한꺼번에 끓여내는 든든한 한 끼 식사인데, 건강한 매운맛에서 중독성이 느껴진다. 기존 파스타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카르보나라 역시 다 파스타에선 흥건하던 소스를 줄이고 담백한 재료를 더해 색다른 현지 맛을 일깨운다. 열혈 셰프는 벌써 여름철 별미로 냉파스타를 준비 중이다.

스페인을 여행하고 돌아와 바르셀로나와 세비야에서 사흘에 한 번꼴로 먹던 파에야가 그리워질 무렵 소개받은 식당은 서촌의 ‘와이샵(Yshop)’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소 비싼 가격(3만2,000원)이 흠이지만 두 사람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의 새우 듬뿍 든 해물 파에야를 강건히 추천하겠다. 육수만 최소 3시간 우려낸다는 파에야는 와이샵의 젊은 주인 이은혜 씨가 바르셀로나 유학 시절 스페인 친구의 돌아가신 할머니 레시피 공책을 선물 받아 고스란히 적용한 식단이다. 색을 내느라 카레 가루를 섞어 쓰는 행위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 고유한 스페인 가정식 레시피를 따른 음식은 화려한 비주얼보다는 깊은 맛으로 승부수를 던진다. 최근 대대적인 인테리어 리뉴얼까지 마친 와이샵에서는 간단한 타파스와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스페인산 델리도 판매하고 있다. 각종 치즈와 하몽이 도열한 쇼케이스가 어찌나 유혹적이던지!

합정역 근방에 문 연 지 1년이 채 안 된 프랑스 가정식 레스토랑 ‘레 제페메르(Les Éphémères)’는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일시적인, 순간적인’의 의미가 담긴 단어 ‘레제페메르’는 프랑스 연출가 아리안 므뉴스킨이 이끄는 태양극단이 2006년 선보인 무려 7시간짜리(아이러니하게도!) 공연 작품 제목이기도 하다. 일상적인 한 끼 식사와 차가 따뜻한 추억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게 이름을 정했다는 조해미 셰프는 프랑스에서 10년 넘게 철학을 전공하고 뒤늦게 르 코르동 블루 파리에서 요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는 대학 후배인 바리스타 이유정 씨와 함께 레 제페메르를 운영 중이다. 파리 뒷골목의 브라세리에 들어선 듯한 레스토랑 공간부터 취향을 저격해오는데, 이곳엔 프랑스 음식 하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파인다이닝 코스는 없다. 대신 프랑스 가정식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는 야채볶음 라타투이와 <비정상회담>의 프랑스 대표 로빈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한 소고기 와인 찜 부르기뇽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싱싱한 채소를 아삭하게 조리해낸 솜씨가 일품인 라타투이에 리가토니 파스타 면을 함께 내는 든든한 식사는 프랑스 가정에서 가장 흔하게 먹는 스타일 아니던가. 계절마다 나오는 우리 식자재를 적극 사용하고, 시판되는 시럽이나 소스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니 셰프의 철학이 더욱 마음을 끄는 식당임에 분명하다.

얼마 전 <비정상회담>의 ‘가정식’ 주제 토론에서 타일러는 미국의 대표 가정식을 시리얼이라고 당당하게 소개했지만, 마카로니와 치즈를 듬뿍 넣은 북미 가정식 스타일 그라탱 요리 맥 앤 치즈가 궁금하다면 이태원역과 가까운 ‘리차드 카피캣(Richard Copycat)’에 들러보는 것도 좋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에서 그렇게 군침 돌게 만들던 쿠바 샌드위치도 먹음직하다.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 중인 미남 셰프 미카엘 아쉬미노프가 운영하는 ‘젤렌(Zelen)’은 우리나라에선 유일하게 불가리아 가정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너 셰프의 인기 덕에 문전성시를 이루는 이태원 본점이 부담스럽다면 상대적으로 한적한 한남동점에서 쫀득한 돼지고기 요리 스빈스코 브레타노를 주문하자. 독일인의 가정식 식탁이 궁금하다면 경리단길의 ‘더 베이커스 테이블(The Baker’s Table)’이 적당한 선택이 될 것이다. 3대째 빵을 굽는 독일인 미하엘 리히터가 구워내는 근사한 빵은 물론 송아지 안심으로 만드는 독일식 보드라운 돈가스 요리 슈니첼쯤은 먹어줘야 한다. 가정의 달 5월, 가정에서 만드는 것처럼 신선한 재료와 정성을 듬뿍 담아 만들어내는 한 그릇 음식이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테이블을 만들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