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한 네이비 룩

양념이 지나쳐 텁텁해진 우리의 패션 입맛을 깨끗하게 환기시켜줄 아이템이 필요할 때. 프리폴 컬렉션의 네이비 룩 들이 현실적인 패션의 깔끔한 멋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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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네이비 룩을 제안한 셀린의 피비 파일로. 네이비는 올여름 가장 시원한 컬러다. 셔츠와 팬츠, 흰 구두, 숄더백 모두 셀린(Cèline).

패션은 환상을 먹고 산다. 우리는 생로랑의 금빛 실크 미니 드레스를 보고 밤새 클럽에서 몸을 흔드는 불량 소녀들을 상상하고, 발렌티노의 불가사리 프린트 맥시 스커트를 보고선 카프리 섬으로 요트 여행을 떠나는 아가씨들을 떠올린다. 이 아름답고 환상적인 이미지는 패션이라는 거대한 공장을 움직이는 에너지가 분명하다. 하지만 리무진을 타고 레드 카펫으로 직행하는 소수를 위한 옷들이 때로 지겨울 때가 있다. 내일 당장 사무실로 출근하고, 가게 문을 열고, 학교로 향해야 하는 현실 속 여자들을 위한 옷은 없을까?

만약 단 한 가지 컬러가 현실적인 패션을 대변해야 한다면, 그건 단연코 네이비의 몫이다. 2015년 프리폴 컬렉션을 준비하던 디자이너들은 여성들의 이런 아우성에 귀 기울이곤 네이비로 명쾌하고 신선한 해답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더 로우의 올슨 자매가 선보인 목은 감싸고 팔은 드러낸 기다란 튜닉 드레스엔 그리 복잡한 계산이 담겨 있진 않다. 그저 일상적인 옷을 찾는 고객들을 위한 완벽한 옷. 누군가는 여기에 물 빠진 데님 팬츠를 매치해 편안함의 지수를 높일 테고, 누군가는 하얀 롱스커트를 매치해 시원한 멋을 연출할 것이다. 물론 이 튜닉 하나만 입어도 충분히 멋지다. 클로에의 금장 버튼 장식 와이드 팬츠도 마찬가지. 회의실로 출근하는 여성이라면 빳빳한 흰 셔츠를 매치해 근면함을 보여줄 것이고, 휴가를 떠나는 여성은 하늘하늘한 실크 캐미솔로 자유분방함을 표현하지 않을까. 말하자면, 전 세계 여성들이 취향과 TPO에 맞춰 마음껏 변주할 수 있는 컬러가 바로 네이비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 넓은 네이비색 바다를 어떻게 헤엄쳐야 할까? 패션사를 살피면 근사한 네이비 룩이 등장하게 마련. 프랑스 해군 군복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샤넬의 네이비 룩은 지금도 종종 라거펠트에 의해 런웨이에 재등장하곤 한다. 이브 생 로랑이 1972년 가을 컬렉션에서 선보였던 ‘올 네이비 룩’은 요즘 줄리 드 리브랑이 디자인하는 소니아 리키엘의 옷과 묘하게 닮아 있다. 하지만 매력적인 네이비 룩을 찾기 위해 구글에서 ‘Navy Style’ 등의 검색어로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다. 멋지게 네이비를 소화하는 여성은 우리 주변에도 충분히 있으니까.

 

지난 2월 데릭 램 쇼가 열리던 첼시의 한 갤러리에서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미국 기자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혹시 저 아가씨 누군지 아세요?” 방금 전만 해도 미국 동북부를 강타한 혹한 때문에 동상에 걸린 시카고의 시어머니 흉을 보느라 바쁘던 수다쟁이 여자가 가리킨 인물은 늘씬한 체구의 동양 여인. 아래로 갈수록 펼쳐지는 네이비 팬츠에 부드러운 실크 소재 네이비 블라우스를 입은 여인은 온통 새하얀 갤러리 속에서 유난히 시원하게 돋보였다(게다가 쇼장 밖 혹한 때문에 대부분 관객들은 거대한 패딩과 모피 코트 차림이었으니 더더욱!). 아마도 키 큰 아가씨는 일본 홍보 우먼일 거라 답하자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너무 멋지지 않나요? 저도 봄이 오면 저렇게 입고 싶네요!” 오지랖 넓은 그녀의 감탄에 동의하면서 재빨리 그녀의 모습을 촬영해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 여자 너무 멋지지?”

사실 ‘감색 마이’라 부르던 교복 재킷을 입고 자란 우리는 이미 네이비를 훌륭하게 소화할 수 있는 감각을 갖고 있다. 그래도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면, 디자이너들의 프리폴 룩북을 살펴보면 된다. 발렌티노의 듀오 디자이너는 밤하늘 별자리를 프린트한 A라인 스커트와 후드 재킷을 더해 사랑스러운 스타일을 완성했다. 코튼 소재 셔츠에 플리츠 스커트를 매치한 엘리자베스앤제임스의 제안은 얼마나 쿨해 보이는지! 만약 좀더 아방가르드하게 연출하고 싶다면 J.W. 앤더슨의 프리폴 컬렉션을 살펴보자. 벨벳 소재 벨바텀 팬츠와 다이아몬드 패턴 터틀넥의 매치는 분명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쇼핑에 나선 여자들에게 큰 호응을 불러일으킬 옷은 셀린의 피비 파일로가 선보인 룩. 새 컬렉션의 룩북을 들고 <보그> 사무실을 찾은 셀린 홍보팀은 26번 룩을 가리키며, 셀린 고객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옷이라며 기대를 드러냈다. 동그란 황동색의 커다란 단추가 포인트인 네이비 블라우스와 앞주머니에 바느질을 더한 통 넓은 네이비 팬츠라니! 현대판 B사감에게 어울릴 듯 엄격함과 세련미를 동시에 갖춘 ‘셀린 우먼’을 위한 준비된 유니폼이었다. 프랑스 정찬 코스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어뮤즈 부쉬(Amuse Bouche)’라는 단어가 익숙하다. 식사 전이나 코스 사이에 식욕을 돋우거나 입안을 환기시켜주는 작은 요리를 뜻하는 단어. 패션 어뮤즈 부쉬가 있다면 바로 그 옷! 잃었던 패션 입맛을 깔끔하게 되살려주기에 더없이 완벽한 요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