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속 음식 이야기

패션이 요리와 사랑에 빠졌다. 번듯한 부엌이 자리하고 있는 주얼리 숍부터 근사한 디너 코스가 서빙되는 패션쇼, 그리고 에이프런 스타일의 유행까지. 향긋한 요리 향기가 가득한 패션 속 음식 이야기.

 

“뉴욕에 산다는 것은 언제라도 전화번호만 누르면 신선한 요리가 30분 만에 집 앞에 도착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패션 블로거인 린드라 메딘은 최근 패션 피플들의 주방을 공개하는 사이트, thefood-life.com에 요리에 관한 에세이를 썼다. “그래서일까. 난 결코 단 한 번도 요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단지 오븐 속에 테이크 아웃 메뉴판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곤 했다.” 그런 그녀의 삶이 바뀌었다. 벨바텀 팬츠를 세련되게 연출하는 방법을 골똘히 연구하는 데 익숙했던 골수 멋쟁이가 이제는 엄마의 레시피를 들여다보고 요리를 꿈꾼다. “건강한 음식에 대한 주변의 인기나 돈을 아끼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음식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 내 집이 결코 진짜 집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 때문인지 지난 6개월 동안 난 요리를 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분명 혼자가 아니다. 패션과 요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졌다. 15년 전 <섹스앤더시티>의 캐리 브래드쇼는 오븐을 옷장으로 이용하는 데 만족했지만, 요즘 멋쟁이들은 오븐에서 오트밀과 강황으로 만든 스콘을 굽고, 자신의 정원에서 딴 바질과 토마토로 신선한 카프레제 샐러드를 만든다(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새로 산 샤넬 백을 자랑하는 건 쑥스러울지 모르지만, 자신이 직접 칼질을 하고, 소금을 뿌려 만든 요리를 자랑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요리를 단아한 접시에 담아 SNS에 올리면 ‘하트’가 쏟아지곤 한다. 물론 요리와 음식에 대한 열풍을 패션계에 한정시킬 수는 없다. 자신이 먹은 음식을 찍어 올리는 ‘#먹스타그램’이란 해시태그를 검색하면 무려 1,900만 장이 넘는 사진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또 TV를 켜면 발라드 가수와 개그맨이 만담을 하면서 돼지 수육을 삶고, 스타 셰프들은 연예인의 냉장고를 뒤져 15분 만에 정체불명의 요리를 완성한다. 저 멀리 밀라노에서 5월 초 오픈한 올해의 엑스포 역시 그 주제가 음식. 그야말로 음식과 요리가 삶을 지배하는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새로운 세대의 슈퍼모델들도 등장했다. 샴페인과 마약이 선배 모델들의 주식이었다면, 새로운 세대의 슈퍼모델들은 건강한 삶과 요리의 즐거움을 설파한다. 칼리 클로스는 버터, 달걀, 우유를 사용하지 않은 건강한 쿠키를 만들어 팔고, 그녀의 베프인 조단 던은 <Well Dunn with Jourdan Dunn>이란 제목 아래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제이지가 제작한 이 프로그램은 자신의 모델 친구들을 게스트로 출연시키며 유튜브 채널에서 시즌 2까지 방영했다. 또 이사벨라 로셀리니의 딸인 엘레트라 위더만도 요리를 좋아하는 모델로, 미국 <보그>를 위해 ‘Elettra’s Goodness’란 요리 비디오 시리즈를 진행했고, 더 건강한 식단을 위한 캠페인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녀의 비디오 시리즈를 보면 그레이스 코딩턴과 감자를 썰고, 블레이크 라이블리와 패스트리를 반죽하는 위더만을 만날 수 있다.

 

“전 언제나 독특한 공간을 꿈꿔왔어요.” 요리와 패션이 만난 새로운 개념의 패션쇼를 선보이는 뉴욕의 인디 디자이너 레이첼 코미가 말했다. 그녀는 네 시즌째 소수의 관객들만을 브루클린의 한 예술 센터에 초대한다. 관객들이 간단히 칵테일을 즐기고 있는 동안, 그녀는 백스테이지에서 모델들의 옷매무새는 물론 셰프와 함께 메뉴의 준비 과정을 살핀다. 그리고 식사가 시작되면 관객들과 어울려 자리에 앉아 저녁 식사를 즐긴다. 3가지 코스가 서빙되는 동안 모델들은 식사 중인 관객들 앞을 가볍게 거닌다. “관객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누며 제 옷을 선보이는 것이 컬렉션에 현실적인 멋을 더하는 듯합니다.” 화려한 조명과 높은 데시벨의 음악이 가득한 캣워크보다는 저녁 식사라는 일상적인 배경 속에 컬렉션을 소개하는 것이 요즘 시대에 어울리는 선택이라는 것. 덕분에 그녀의 디너 초대는 뉴욕 컬렉션 중 가장 뜨거운 티켓이 됐다.

요리와 음식에 대한 사랑 덕분에 새롭게 태어난 공간도 있다. LA의 주얼리 디자이너 아이린 뉴워스(Irene Neuwirth)는 지난해 말 멜로즈 거리에 새 부티크를 오픈하면서 개성 넘치는 시설을 더했다. “부엌이야말로 제 꿈의 공간입니다.” 집처럼 꾸민 그녀의 매장 한편에 오븐과 싱크대, 냉장고 등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부엌을 마련한 것. 코를 자극하는 파스타 향기가 진동하는 주얼리 쇼핑이라니! “전 고객들이 친구 집에 오듯이 자연스럽게 저희 매장에 들렀으면 했습니다. 여기서 가끔 친구들과 고객들을 초대해 실제로 디너파티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파티에 다녀온 <뉴욕> 매거진 기자의 평은? “칵테일 타임이 끝나자 디자이너는 우리 모두를 옥상으로 초대했어요. 그곳에는 빈티지 패턴의 테이블보로 장식된 테이블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분 좋은 저녁 바람이 불어오는 옥상에서 즐기는 식사는 컬러풀하고 생기 넘치는 그녀의 주얼리를 닮아 있었죠. 그 모든 것이 요즘 모두가 바라는 캘리포니아 스타일 그 자체였습니다!”

요리 솜씨가 뛰어난 패션 디자이너는 뉴워스뿐만이 아니다. 피터 솜은 미슐랭 스타 셰프 밑에서 디저트 셰프로서 견습 생활을 거쳤고, 아제딘 알라이아는 파리의 쇼룸을 찾는 손님들에게 푸짐한 가정식 요리를 대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만약 그들의 레시피가 궁금하다면, 100명이 넘는 미국 패션 디자이너들이 자랑하는 비장의 레시피가 담긴 <아메리칸 패션 쿡북>을 추천할 만하다. 아이작 미즈라히는 트러플 버섯 스파게티 레시피를 공개했고, 토리 버치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안달루시안 가스파초 요리법을 알려준다. 손맛이 뛰어난 한국 디자이너들 역시 종종 기자와 손님들을 위해 근사한 요리를 직접 선보이기도 한다.

 

“패션 디자이너들은 바느질과 실을 가지고 하나의 분위기와 룩을 창조하는 데 뛰어난 장인들이죠.” 디자이너들 중 뛰어난 요리 실력을 자랑하는 이들이 많은 데에 대해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 회장인 스티븐 콜브는 이렇게 평했다. “그들은 단순히 옷과 액세서리 그 이상을 창조하죠. 그들은 상상하는 라이프스타일의 모든 요소들 말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떤 휴가를 즐기는지, 어떻게 테이블을 놓는지, 어떤 음식을 먹는지가 모두 그들의 비전에 포함됩니다.” 10 꼬르소 꼬모 카페, 분더샵의 ‘루브리카’, 에르메스의 ‘마당’ 등 서울의 내로라하는 패션 숍에서 그에 어울리는 레스토랑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알라이아의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그 드레스가 어울리는 공간에서 식사를 즐기는 것은 이제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 되었기 때문. 최근 밀라노에 오픈한 폰다지오네 프라다 건물에도 영화감독 웨스 앤더슨이 디자인한 카페가 오픈했다.

파리 외곽의 샤토, 로마의 팔라초, 알프스 산맥의 별장, 뉴욕의 펜트하우스 등 전 세계 곳곳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무수히 많은 디너파티를 가졌던 발렌티노 가라 바니는 최근 <At the Emperor’s Table>이란 책을 펴냈다. ‘황제의 테이블’이란 제목답게 그 속에는 토마토로 꽃송이를 만드는 방법과 염소젖치즈로 커스터드 디저트를 만드는 법,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정중하게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방법이 담겨 있다. 물론 모든 것을그가 직접 준비하지는 않는다. 전 세계 어디서든 그와 함께하는 전속 셰프 조나단 수린(Jonathan Surin)과 집사 마이클 켈리(Michael Kelly)의 솜씨다. 그렇지만 취향과 감각만은 온전히 발렌티노의 것. “테이블을 준비하는 것은 아름다운 이브닝 드레스를 만드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가 자신의 책에 대해 설명했다. “드레스에 리본과 러플을 장식하는 것처럼 테이블 위에는 꽃을 놓지요. 무언가로 장식한 정성이 깃든 테이블이 언제나 낫거든요.”

 

요리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디자이너들이 주방에서 영감을 얻은 스타일을 선보이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올봄 다양한 버전으로 등장한 에이프런이 바로 그 증거. 자크무스의 스트라이프 홀터넥 톱과 화이트 에이프런은 마르세유 해변의 웨이트리스를 연상시켰고, 질 샌더의 네이비 랩스커트는 영화 <아이엠 러브>에서 주방에서 금지된 사랑에 빠지는 틸다 스윈튼에게 어울릴 법했다. 그랑 팔레에 샤넬 카페를 오픈한 샤넬의 칼 라거펠트 역시 쇼에서 다양한 에이프런 스타일을 선보였다. 샤넬의 새하얀 레이스 에이프런 스커트는 기름이 튀고 소스가 넘치는 주방보다는 발렌티노의 파티에 더 어울릴 듯했지만 말이다. “전 에이프런을 사랑합니다.” 2년 전 자신의 작품을 모은 아카이브 전시를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공개한 미우치아 프라다는 이렇게 말했다. “에이프런은 제 작업 속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테마 중 하나죠. 그 이유는 에이프런이야말로 여성의 관용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에이프런은 여성의 관용보다는 삶을 더 ‘맛있게’ 살고자 하는 여성들의 욕망이지만 말이다.

매달 이태리 <보그> 화보를 통해 시대를 대변하는 이미지를 창조해온 사진가 스티븐 마이젤은 지난 5월 커버에 스테이크 접시와 누워 있는 신인 모델을 등장시켰다. ‘Food for Thought’라는 제목의 그 화보 속엔 음식과 함께 포즈를 취한 모델들이 등장한다. 어쩌면 마이젤은 먹을 것에 집착하는 요즘 세태를 한번 비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미우미우의 브라톱과 스커트를 입은 모델이 먹다 남긴 파이는 그리 식욕을 돋우진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건 음식이 패션계 최고의 화두로 떠올랐다는 사실. ‘Culinary Delights’란 이태리 <보그> 커버 제목처럼 요리가 주는 환희로 가득한 패션 세상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