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옷일까 남자 옷일까?

이건 여자 옷일까 남자 옷일까? 여성스러운 걸까 남자다운 걸까? 그런 분류는 패션에서만큼은 현대적인 태도가 아니다. 유니섹스, 앤드로지니, 젠더리스에 이은 21세기 ‘성 중립’에 대해.

 

청담동 구찌 쇼룸에서 나는 새로운 체험에 들떴다. 올가을 여성복과 남성복 프레젠테이션에 앞서 미리 입어본 옷이 이토록 흥분될 줄이야! 소매는 턱없이 짧았고(내 팔이 긴 편이라 해도 기존 남성복에 비해 짧았다), 어깨는 안쪽으로 좁혀 있었으며(근육 없이 뼈와 살로만 이뤄진 내 어깨에도 턱없이 좁았다), 셔츠는 블라우스처럼 하늘하늘하고 매끄러웠다(목에 스카프가 달린 새빨간 실크 블라우스까진 차마 입지 못했다). 모든 게 생전 처음 느끼는 비율이었고, 여태 입어본 남성복과는 전혀 다른 개념(톰 브라운이 팔과 다리 길이가 짤뚱한 옷을 만들지만 거기엔 전형적인 남성성만 존재했다). 기질상 나는 테스토스테론으로 충만한 인물이 아니다. 게다가 <보그> 패션 기자라는 여성 친화적인 일에 매진하다 보니 구찌 옷은 거부감 없이 내 몸에 착 감겼고 맘에 쏙 들었다.

며칠 후 생로랑 쇼룸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한쪽 옷걸이엔 3월 파리 쇼에서 본 올가을 여성복들(빳빳한 튤이 달린 베이비돌 드레스 등등)이 풍부한 볼륨을 과시하며 ‘나 좀 봐주세요’라는 투로 걸려 있었다. 반대쪽엔 여성복인지 남성복인지 애매모호한 옷들이 쫙 걸려 있었다(사이즈가 작아 보인 데다 심지어 쇼킹 핑크의 모피 코트까지). 하나씩 샅샅이 점검해보니 그건 1월에 공개된 남성복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에디 슬리먼이 처음 선보이는 유니섹스 컬렉션 ‘Psych Rock’. 눈에 불을 켜고 꼼꼼히 들여다보던 내게 홍보 담당자는 압축해서 설명했다. “Boy is Girl, Girl is Boy!” 그 가운데 8.5cm짜리 굽이 달린 남자 앵클부츠에 발을 밀어 넣으려고 하자 동행한 스타일리스트 친구는 “그거 신으면 안 만날 거야”라며 살짝 엄포를 놓았다. 패션 골수 축에 속하는 그녀의 눈에도 남자 하이힐은 한국 정서에서 용납하기 어려웠던 걸까? 에디 슬리먼의 디올 옴므 시절, 6.5cm 남자 하이힐 부츠로 맹렬하게 화보 촬영했던 그녀가?

사실 남녀 구분이 애매한 옷들은 내가 패션에 눈을 뜬 80년대부터 익숙하다. 당시 컬처클럽의 보이 조지는 여자보다 더 예쁜 얼굴과 미성으로 “카마 카마 카마 카멜리온”이라 속삭였고, 듀란듀란의 닉 로즈 역시 곱상한 얼굴과 메이크업으로 여자는 물론 남자들의 맘까지 흔들었다. 그들의 옷차림 역시 용모 뺨치게 파격적이었다. 세상은 그들을 ‘유니섹스’로 지칭했다. 90년대엔 앤 드멀미스터, 헬무트 랭, 질 샌더 덕분에 ‘앤드로지니’라는 낱말에 익숙해졌다. 그들의 창백하고 전위적이며 밋밋한 옷들은 남자든 여자든 다 똑같이 만들었다. 2000년대에 진입하자 패션계는 캐주얼한 유니섹스, 아방가르드한 앤드로지니에 이어 또 다른 용어를 사전에서 발췌했다. 에디 슬리먼이 디올 옴므를 하나의 현상으로 만들어 놓은 뒤 유행한 ‘젠더리스’가 그것. 이와 함께 남자 옷을 입는 멋쟁이 여자들 덕분에 ‘보이프렌드 진’이나 ‘보이프렌드 재킷’ 같은 옷이 떴다. 모든 영역의 경계가 희미해진 새로운 창세기에 성 구분은 ‘시즌리스’ 만큼이나 구태의연하게 여겨지게 됐다. 적어도 패션에서만큼은.

그리고 시작된 2010년대엔 모든 것을 아우른 사상의 흐름이 다시 시작되는 분위기다. 패션 전문가들은 ‘성 중립(Gender-Neutrality)’을 선언했다.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구찌 데뷔전을 지켜본 패션 저널리스트 사라 무어는 그가 양성성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분석했다. 그녀는 성 중립 선포를 위해 소년처럼 보이는 소녀들이 셔츠와 보이컷 팬츠를 입고, 소녀처럼 보이는 소년들이 푸시캣 리본 블라우스를 뽐내는 것을 예로 들었다. 또 알버 엘바즈는 올가을 랑방 패션쇼 보도 자료에 이런 문구를 남겼다. “호화로우면서도 엄격하다. 건조하면서도 따뜻하다. 불투명하면서 투명하고, 남성적이면서 여성적이다.” 그런가 하면 안토니 바카렐로는 에디 슬리먼식 접근으로 성 중립에 동참했다. 남녀에게 늘 평등한 ‘록 시크’가 그것.

 

이제 디자이너들에게 중차대한 사안은 성별이 아니다(그렇다고 여성복과 남성복이 나뉘지 않는 건 아니다). 우리가 옷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이미 샤넬과 함께 여자로 사는 즐거움을 설파 중인 셀린은 칸예 웨스트의 마음까지 뒤흔들었다. 그가 원하는 건 어떤 여성복이나 특정 남성복이 아니다. 자신에게 어울리면 그만이다. GD도 마찬가지다. 그가 요즘 생로랑과 함께 줄기차게 입는 샤넬? 퍼렐 윌리엄스와 카라 델레빈이 ‘파리-잘츠부르크’ 컬렉션 광고에 함께 출연해 전설의 트위드 재킷을 공유하고 있다. 바야흐로 패션에서 중요한 건 남녀 간의 상호교환이나 호환성, 공유의 개념이다. 이런 성 중립성은 얼마 전 복귀했다가 점진적으로 사라지는 90년대 미니멀리즘의 후폭풍이다. 꽃무늬와 프릴 등 여성적 이미지로 점철됐던 패션은 90년대 미니멀리즘에 의해 꼬리를 내렸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미니멀리즘의 속성 덕분에 패션은 근원과 본질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이와 맞물려 기본에 충실한 ‘놈코어’가 기를 폈다). 미니멀리즘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어울린다. 성 중립성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성 구분이 모호한 옷들은 상대적으로 더 입기 편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옷일수록 우리 몸을 덜 속박하며, 그 결과 완벽한 신체 조건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이런 경향에 의미를 더 부여한 인물은 조나단 앤더슨이다. 그는 ‘Shared Wardrobe’라는 개념을 도입, 패션의 성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의 개념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유니섹스와의 차이. “기존 유니섹스 아이템은 성별 구분 없이 남녀 모두를 위해 디자인되고 모두를 위해 제작됐습니다. 그러나 ‘Shared Wardrobe’의 경우 남자 옷은 남자를 위해, 여자 옷은 여자를 위해 디자인됐지만, 각각이 다른 성에게서도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것. 그래서 입거나 신거나 들었을 때 누구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거죠.” 모든 남녀를 위한 건 아니지만 ‘누구라도 좋아할 디자인’이라는 것. 두 번째는 양방향성. “기존 젠더리스 컨셉의 방향은 남자에서 여자로, 남자의 아이템을 여자들이 차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그러나 ‘Shared Wardrobe’의 방향성은 남자가 입고 싶은 여자 옷, 여자가 들고 싶은 남자 가방입니다.” 여성복 옷감이나 장식을 사용한 남자 옷, 바지가 주를 이루는 여성복 등도 해당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 얼마 전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 집필진이 ‘성적 중립성’을 지닌 단어를 새로 싣겠다고 전했다. 트랜스젠더나 자신의 성을 밝히길 원치 않는 사람들을 위해 ‘Mx’라는 단어를 추가하겠다는 것. 또 스웨덴 학술원 역시 남자(Han)나 여자(Hon)가 아닌 대명사 ‘Hen’을 쓰기로 했다. 시대상을 패션으로 기록하는 미국 <보그> 최신호에는 이런 경향의 화보와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생로랑, 랄프 로렌, J.W. 앤더슨, 구찌, 라프 시몬스, 프라다, 드리스 반 노튼, 지방시, 랙앤본 등을 입은 모델들은 서로 옷을 바꿔 입어도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단, 지방시, 프라다 스커트는 제외). 아울러 MCM 모델로도 유명한 안드레아 페직이 토니 굿맨의 스타일링 아래 패트릭 드마쉴리에 앞에 선 채 대대적으로 데뷔를 마쳤다(작년 1월 <보그 코리아>를 위해 사진가 홍장현 앞에 섰던 그녀!).

성적 중립성과 성적 유동성이 패션을 지배하는 현상을 보며 앤더슨은 이렇게 고백한 적 있다. “저는 남성복과 여성복을 나누는 일이 아주 힘들다고 생각해요.” 그에겐 여자 옷과 남자 옷에 각각 빨강과 파랑 스티커를 붙여 나누는 일이야말로 어색한 일이다. 그의 말대로 여성복과 남성복의 분리가 의미 없어진 지금, 내가 굽이 8.5mm인 생로랑 앵클부츠와 스카프가 달린 빨강 구찌 블라우스를 착용한다면? 뼛속까지 패피인 스타일리스트 친구는 또 뭐라고 잔소리할지. 패션 자웅동체와 맞닥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헐!” 혹은 “헉!” 할지 모르니 맞받아칠 준비나 해야겠다. “요즘 디자이너들은 남자를 위해, 여자를 위해 옷을 제작하진 않아. 그저 인간을 위해 만들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