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이니셜 게임

로고와 심벌보다 더 위력적인 게 있다면? 그건 패션 가문의 영문 이름에서 발췌한 두문자다. 알파벳에서 몇 개의 철자를 골라 짝짓고 나면 힘을 발휘하는 패션 이니셜 게임!

Louis Vuitton

Louis Vuitton

패션에서 이니셜, 혹은 모노그램은 전혀 새롭지 않다. 그건 페키니아 사람들이 이집트 문자로 22자를 만들 때부터 이미 시작됐을지 모른다. 시간을 빠르게 돌려 뉴 밀레니엄으로 가보자. 로고 광풍이 휩쓴 2000년대 초엔 알파벳 조합으로 된 상표와 문양들에서 고약한 냄새가 날 것처럼 남발됐다. 내가 패션 알파벳에 제대로 눈을 뜬 게 그때쯤. <GQ> 창간호 패션 칼럼으로 옷에 이니셜을 새기는 남자에 대해 다루면서부터다. 하지만 소맷단에 이니셜을 새긴 셔츠가 썩 근사해 보이진 않았다. 도살장 소 엉덩이에 찍힌 낙인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반면 피케 셔츠의 왼쪽 가슴에 조그맣게 MJ라고 자수를 놓았거나 GG 패턴의 지갑쯤은 그럴싸해 보였다. 말하자면 그때 나는 ‘뼛속까지 패피’로 변신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 후로 나는 두 개의 알파벳 철자를 결합시킨 알파벳 모노그램 게임을 새까맣게 잊고 지냈다. 대신 꽃무늬와 예술적 프린트에 꽂혔다. 그도 그럴 것이 패션 안에서 알파벳을 대대적으로 내세우는 게 속물적으로 보이는 풍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던 내가 다시 알파벳에 꽂힌 결정적 계기가 있었으니, 어떤 스타일리스트가 걸고 온 목걸이 때문이다. 손톱만한 크기의 금빛 ‘Cassandre’ 폰트가 헐렁한 티셔츠 목선과 쇄골뼈 사이에 달랑거리는 걸 보자, 그걸 목에서 낚아채고 싶어 손을 꽉 쥐어야 했다(루이 비통 ‘Me&Me’ 시리즈보다 조금 먼저 선보인 알파벳 펜던트).

나는 영어 초보자처럼 알파벳 공부에 빠지기 시작했고, 그 학구열은 구찌 쇼에서 한 번 더 불붙었다. 지난 1월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데뷔작인 구찌 남성복 컬렉션을 완성하기 위해 투입한 성분 가운데 앤틱 G 서체를 사이좋게 겹친 벨트였다! 가을 신상이 나오기 훨씬 전인 지난봄, 나는 엇비슷한 것이라도 장만해 허리에 두르고 싶은 마음에 구찌 매장으로 직행했다. 여러 더블 G 벨트가 세로로 길게 진열돼 있었으나 그만 관뒀다. 미켈레의 솜씨가 아니었기에.

 

대신 3월 파리 출장에서 미앤미 가운데 내 이니셜을 입양하리라 다짐했다. 그런 내게 여러 조언이 접수됐다. 서울에서 예약 주문을 마쳐야 하고, 어떤 이니셜을 살지 미리 정해야 하며, 샹젤리제 매장에서만 판매하니 방문 일정까지 알려달라나? 그러나 현지에 갔을 때 루이 비통의 또 다른 관계자는 꼭 그렇진 않다고 귀띔했다. 대형 백화점에 가면 즉석에서 살 수 있다는 풍문이 돈다고 했으니까. 이런 까다로운 절차와 소문은 미앤미 인기의 방증이었다. 그러나 미앤미 이니셜 입양은 포기했다. 다른 데 꽂히고 말았으니까. 그건 생로랑의 S였다. 에디 슬리만은 하우스의 이니셜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S에 세로 ‘짝대기’ 두 줄을 그어 달러 펜던트를 만들었다. 내친김에 매장에서 목에 걸어보니 안타깝게도 살짝 허풍을 보태면 숨이 턱 막혔다. 목에 댕강 걸려 초커처럼 보였으니까. 결국 이니셜 찾아 삼만 리는 멀티숍 메르시에서 알파벳 목걸이와 팔찌 등을 왕창 쇼핑하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대체 알파벳이 뭐길래? 왜 갑자기 패션 알파벳인가? 사실 특정한 때가 되면 스마이슨, 구찌, 비통 등등 브랜드 친구들로부터 내 이니셜을 새긴 간단한 선물(여권 지갑, 작은 수첩 등등)을 받곤 했다. 그러나 어딘지 형식적인 데다 기획을 위한 기획처럼 보여 고유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했다. 로고 신드롬이 득세하던 십수 년 전, 알파벳은 그저 브랜드의 권위와 명예를 과시하는 앞잡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패션에서 알파벳은 디자인의 고품질과 장인 정신을 구체화하는 데 쓰이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루이 비통이다. 비통 가문은 창립자의 이니셜을 따서 이런저런 형상과 결합한 모노그램 전법을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전유물로 활용하고 있다. 작년 말 ‘Celebrating Monogram’ 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기획할 땐 초대된 귀빈들의 이니셜을 죄다 모노그램 도형으로 제작해 그 앞에서 기념 촬영하게 했다. 당대 가장 세련되고 진취적 취향을 지닌 인물인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모노그램을 재조명하고 있다니! 그러니 나도 십수 년 전 눈을 흘겼던 셔츠 소맷단의 알파벳 자수를 너그럽게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주변을 살피니 온통 이니셜 천지다. <GQ>는 ‘Gentlemen’s Quarterly’의 두문자만 쏙 떼서 만든 제호. 책꽂이에 꽂힌 잡지들 중에도 이니셜이 허다했다. <V> 매거진은 ‘비저네르’에서 비롯됐고, <W>는 ‘우먼스 웨어 데일리’를 모태로 하며, <CR>은 카린 로이펠트의 이니셜. 그녀가 잡지를 낸다고 했을 때 어떤 제호가 될지 추측이 난무했다. 나는 당연히 그녀의 서명(파리 <보그> 재임 시절 ‘편집장의 글’에 썼던 손글씨 그대로)을 예상했다. 뭐 믿거나 말거나. 아울러 내가 <보그>를 통해 실시간 다루는 패션은 알파벳 이니셜로 패션 DNA 유전자가 구성됐다고 보일 정도다. 겐조는 K를 쾅 소리가 날 만큼 큼지막하게 가슴에 박아 티셔츠를 만들어 대히트를 쳤다. 또 수많은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둘째를 생산하거나 캠페인을 전개할 때도 이니셜만한 게 없었다. 캘빈 클라인의 cK는 말할 것도 없고, 미쏘니의 M은 물론, 요지 야마모토의 Y’s, 꼼데가르쏭의 CdG, 그리고 스티브앤요니의 SJYP 등등.

지난 파리 컬렉션에서도 알파벳은 ‘하트 뿅뿅’처럼 유난히 도드라졌다. 발렌시아가 쇼에서 여러 신소재보다 더 눈에 띄었던 건,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이니셜을 따서 만든 B 혹은 CB 브로치. 샤넬의 CC는 2.55 백에서 벗어나 올림머리를 고정하기 위한 헤어핀으로 응용됐고, 루이 비통은 니콜라 시대에 들어 L과 V의 각도를 딱 맞춰 철커덕 맞아떨어지는 새로운 가방 잠금장치를 개발했다. 하긴 그동안에도 알파벳이 패션 주인공이 될 징조가 꽤 있었다. 버버리 프로섬의 작년 가을 쇼는 모델들이 자신의 이니셜이 박힌 망토 차림으로 나오며 끝났다. 리카르도 티시는 하우스 설립자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위베르 드 지방시의 이니셜을 발췌해 HDG 컬렉션을 전개 중. 또 로마 숫자로 유명한 티파니는 전설의 멋쟁이 주얼러 엘사 페레티가 디자인한 알파벳 펜던트를 보유하고 있다(고사리 새싹처럼 구불거리는 디자인이 일품). 서울에서도 스타일리스트 박혜라의 주얼리 브랜드 ‘H.R’에서 이니셜 반지를 맞춰 여러 개 끼고 다니는 멋쟁이들이 늘고 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나는 패션 안에서 ‘딱!’이다 싶은 내 이니셜을 찾지 못한 채 알파벳을 다룰 새 일거리를 얻었다. <보그>와 구찌가 함께하는 한국 패션학과 장학생 선발 프로젝트가 그것(학생 일곱 명에게 1년 치 장학금을 선물하고, 두 명이 밀라노 구찌 쇼를 참관하며 인턴십을 경험한다). 구찌 아카이브에서 꺼낸 실기 콘테스트의 주제는? 작년엔 플로랄, 재작년은 뱀부. 그렇다면 올해는?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정권을 잡은 지금, 그의 두 차례 런웨이에서 기사회생한 GG 문장이 퍼뜩 떠올랐다. 그래서 과거급제 시험을 치를 때 두루마리를 쫙 펼쳐 시제를 알리듯, 학생들에게 알파벳 일곱째 글자를 시험 문제로 제시하자 패션학도들 특유의 기발한 발상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나만의 알파벳은 영영 얻을 수 없는 걸까? 타투 숍에서 이를 악물고 내 이니셜 SKH라도 손가락에 반지처럼 새겨야 하는 걸까(나와 영문 이니셜이 같아 잡지에 표기할 때 “너는 성을 뒤로 빼!”라고 후배에게 압력을 행사하게 만든 바로 그 알파벳 세 글자)? 고맙게도 토즈를 통해 내 이니셜을 패션에 새길 수 있게 됐다. ‘고미노 클럽’이라는 메이드 투 오더 프로젝트에서 드라이빙 슈즈를 맞추는 과정이었다. 현대백화점 본점 토즈 매장의 친절한 직원은 수많은 가죽과 꼬임 장식 가운데 맘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한 뒤, 맨 마지막 질문으로 이니셜을 어디에 어떤 식으로 표기할지 물었다. 각각의 요소들을 선정할 때만큼 선택의 여지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SKH로 할지 KH만 할지, 철자 사이에 마침표를 넣을지 말지, 그리고 발등인지 옆인지 위치를 정하는 순간엔 괜히 떨렸다. 머리 위나 왼쪽 가슴이나 손목이 아닌, 가장 낮은 데 자리 잡을 나만의 신중하고 정교한 표식이었으니까. 그건 옛날 옛적, 로고를 향한 대책 없는 욕망과는 다른 감흥이었다. 패션을 활용한 나 자신의 은밀한 풍자였다고나 할까.

디자이너의 개성적이고 독창적 형상이나 색감, 문양에 의해 브랜드를 인지하는 것도 좋지만, 바야흐로 상표를 구성하는 브랜드 활자에 의해 가치가 부여되고 있다. 이제 더는 이니셜을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낙인 찍힌 주홍글씨처럼 불명예로 만들지 않기를. 물론 맞춤 핸드백, 수트, 여행용 트렁크에 브랜드 머릿글자가 아닌 제품 주인 이름의 머릿글자를 새기는 일이 참신한 서비스는 아니다. 고야드, 안야 힌드마치, 롱샴 가방은 물론, 레이밴 선글라스 케이스, 심지어 제이크루 속옷의 팬티에서도 주인의 이름이 눈에 띌 정도니까. 이쯤 되면 브랜드 상표는 당신의 이니셜에 밀려 기를 못 펼지 모른다. 가만 있자, 그렇다면 그 물건은 내 브랜드인 셈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눈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언젠가 내 브랜드를 론칭할 때 알파벳 세 개를 어떻게 조립하면 좋을까?’ ‘어떤 폰트를 고를까?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은 헬베티카?’ ‘에르메스 H 버클처럼 그 자체로 영원성을 지닌 패션의 상징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래서 요즘 묵상하는 게 있으니, 1966년 이후 보테가 베네타의 신조가 된 문구다. “When your own initials are enoug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