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단정하게 똑 떨어지는 옷은 늘 유효하다. 하지만 패션의 진일보를 위해선 아방가르드한 접근을 거친 일그러진 이미지가 필수. 1990년대 전위주의가 2015년식 현실주의가 될 수 있을까?

 

3월 5일 파리의 밤, 유명한 게이 클럽 ‘Le Depot’는 인산인해. 밤 10시를 향한 데다 화장실 냄새도 슬쩍 났으며 조명은 어지러웠지만 누구도 투덜대지 않았다. 폭발 직전의 흥분이 도사렸으니까(파리 패션 위크의 거만한 인상에 한 방 먹이는 분위기!). 얼마 후 폭이 채 1m도 안 되는 런웨이에 빈티지 리바이스의 크롭트 진, 잘라서 이어 붙인 스웨트셔츠, 집채만한 크기의 땅에 질질 끌리는 외투, 현관 매트 같은 스커트 등이 휙휙 지나갔다. 캣워크 잣대에서 보면 모델들은 비정상적이었고, 옷들은 낯익은 듯 새로웠다. 익숙한 듯 새로웠다는 것처럼 패션의 모순이 또 있을까? 익숙하다는 건, 패션 현대사에서 90년대 전위주의를 떠올리게 했기에. 새로웠다는 건, 다들 현실주의에 목을 맨 나머지 비슷비슷한 옷이 판을 치는 시대에 더없이 참신한 디자인과 발상이었기에. 이 쇼의 이름은 베트멍(‘Vetement’은 프랑스어로 ‘의상’이라는 뜻)이다.

“당신이 갖고 있는 옷들을 진보적인 디자이너 그룹이 가져가 각각을 새롭게 재단했다고 상상해보라.” 베트멍을 향한 패션 피플들의 품평이다. 한때 정체불명으로 소문난 이 디자인 집단이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파리 쇼를 끝낸 뒤 8명 모두 ‘야후 스타일’ 취재를 위해 쇼룸에 나타난 것(우두머리인 벨기에 왕립 미술학교 출신의 뎀나 즈바살리아와 일당은 파리 10구 지하 쇼룸에서 일한다). 현재적 기준에서 볼 때 베트멍은 전형적인 파리 패션이 아니다. 성별 구분이 모호하고 다분히 해체적이며 형태가 불분명한, 다시 말해아방가르드한 그 옷은 우리가 영원히 잃을지 모르는 상표에 대한 그리움을 건드리고 있다. 마르탱 마르지엘라! 사실 매 시즌 혁신적이며 경계를 허무는 이런 옷을 최근 파리는 물론 전 세계 패션 수도에서 구경하기란 쉽지 않다. 다들 안전하게 재단된 외투와 꾸뛰르적 장식에만 골몰하고 있으니까.

 

보시다시피 우리에게 익숙한 옷의 정반대에 베트멍이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몇몇 주류 디자이너에게서 그런 전위적 습성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 이 옷들은 패션 골수들이 원하는 ‘일그러진’ 옷으로서의 결핍을 채우고 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마르지엘라가 충족시켜주던 부분이 이젠 사라졌으니 베트멍과 그런 옷에서 갈구하는 눈치. 사실 패피들은(디자이너, 기자, 스타일리스트, 헤어&메이크업 아티스트, 사진가, 홍보 담당자 등등) ‘웰메이드’된 옷도 원하지만 마르지엘라나 카와쿠보의 인습타파적 아방가르드를 탐닉해왔다. 똑 떨어지는 테일러링으로 재기에 성공한 셀린의 피비 파일로를 보자. 그녀는 몇 시즌 전부터 ‘아방’한 기질을 표출하는 중이다. 제프리 빈과 흡사해 논쟁을 일으킨 2013 F/W 시즌 코트, 꼼데가르쏭의 격자 장식 리얼리티 버전 같았던 2015 S/S 시즌 등은 그녀 안에서 끄집어낸 전위적 결과다. 또 가장자리가 실밥으로 너덜너덜한 외투나 한쪽 소매에 엉뚱하게 낀 대형 모피 토시, 소매 탈부착이 가능한 보송보송한 코트 등등.

로에베의 조나단 앤더슨 역시 마르지엘라나 카와쿠보 특유의 넝마 같은 디자인으로 스페인 가죽 명가의 이미지를 갈아엎고 있다. 젊은 피로서 패기를 과시하기 위해선 가죽이나 옷감을 난도질해 재구성한 뒤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는 것 만한 게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런가 하면 레이 카와쿠보가 야구 글러브를 만들듯 라이더 재킷을 일그러뜨려 가죽으로 스티치를 놓은 2005년 컬렉션은 올가을 아크네 스튜디오에 고스란히 전승됐다. 또 실타래처럼 몸을 휘감은 희한한 양감의 스웨터 역시 꼼데가르쏭풍의 일그러진 미학(똑 떨어지는 가죽 바이크 재킷과 단정하고 산뜻한 티셔츠 등으로 인지해온 소년소녀 팬들에겐 꽤 당황스러운 디자인일지 모른다).

피비 파일로, 조나단 앤더슨, 조니 요한슨 등 인기 절정의 디자이너들은 90년대 미니멀리즘이 다시 휩쓸고 간 뒤 본능적으로 아방가르드적 스릴을 원했다. 미국 <보그>는 패션 현대사에서 일그러지고 전위적인 디자인이 대세였던 90년대 말, 아방가르드한 쪽에 기웃대는 디자이너들을 보며 이렇게 분석했다. “약간이라곤 하지만 아방가르드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를 참조하는 건 패션이 창의적 활력소가 될 수 있다.” 보이지 않은 망치로 규격화된 수트와 스웨트셔츠 등을 망가뜨린 즈바살리아는 우리 시대에 하나의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베트멍에 대해 스스로 이렇게 정의한다. “여러분이 입고 싶어 하는 약간 쇼킹한 옷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매장이 쉽게 입을 수 있고 팔리는 옷들로 차고 넘치는 지금, 패션에 필요한 건 아방가르드적 성향의 일그러진 이미지다. 패션이 다음 단계로 도약하려면 쇼킹과 논쟁이 필요한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