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과 여배우, 임상수와 고준희

쓰디쓴 돈의 맛을 보여준 문제적 감독과 화려한 패셔니스타가 만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임상수표 본격 오락영화 〈나의 절친 악당들〉은 시작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임상수 감독은 낄낄대며 자신의 모든 로망을 실현시켰고 고준희는 배우로서 꽃을 피웠다.

고준희의 검정 톱과 시폰 소재 롱스커트, 구두는 모두 랄프 로렌 컬렉션(Ralph Lauren Collection), 페도라는 샤넬(Chanel). 임상수 감독의 화이트 셔츠와 데님 팬츠, 넥타이는 모두 마시모 두띠(Massimo Dutti), 데님 재킷은 마뉴엘 리츠(Manuel Ritz), 브라운 로퍼는 엑시드슈즈(Exceed Shoes), 안경은 클릭클락(Clic Clac).

고준희의 검정 톱과 시폰 소재 롱스커트, 구두는 모두 랄프 로렌 컬렉션(Ralph Lauren Collection), 페도라는 샤넬(Chanel). 임상수 감독의 화이트 셔츠와 데님 팬츠, 넥타이는 모두 마시모 두띠(Massimo Dutti), 데님 재킷은 마뉴엘 리츠(Manuel Ritz), 브라운 로퍼는 엑시드슈즈(Exceed Shoes), 안경은 클릭클락(Clic Clac).

임상수 감독은 여자를 좀 아는 남자다. 정확히는 여자의 욕망을 읽을 줄 안다. 페미니즘 논쟁의 단골 텍스트였던 98년 데뷔작 <처녀들의 저녁식사>부터 <바람난 가족>, <하녀>, <돈의 맛>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 속 여자들은 하나같이 솔직하고 대담하다. 팜므 파탈의 전형에서 벗어난 이 도발적인 여자들은 음흉하지도 음란하지도 않다. 낮의 세계에 속한 이들은 자유롭게 도시를 활보하며 남자들의 위선을 비웃고 그 뻔뻔한 낯짝들을 매섭게 할퀸다. 물론 이처럼 현실적인 여자들과 속물적인 남자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달콤한 로맨스로 흘러갈 리 없다. 그런 임상수 감독이 본격적인 오락영화를 만들었다. <나의 절친 악당들>은 의문의 돈가방을 쫓는 악당들과 우연히 굴러들어온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청춘 남녀들의 추격전을 코믹하게 그린액션 활극이다. 대략의 줄거리만 들어도 한국 사회의 폐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온 지금까지의 임상수표 영화들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손바닥 같은 세상의 병균들을 영화라는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우리 눈앞에 그 불편한 이미지를 쑥 들이밀며 심술궂게 낄낄대던 이 고약한 감독에게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어느 순간부터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간 것 같더라고요. 너무 진지하고 사회 비판적이라고 해야 하나? 어른들을 위한, 어른스러운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그렇게 쭉 해왔는데, 요번엔 젊은 친구들에 대한 얘길 한번 해보기로 한 거죠. 힘 빼고, 가볍고 재미있게. 그래, 나나 잘하자.” 그는 이번 영화에서 지금껏 시도할 수 없었던 모든 영화적 판타지를 실현시켰다. 숨 막힐 듯 밀폐된 공간에서 진행되던 이야기는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굉음으로 가득한 거친 바깥 세계로 나왔고, 주인공들의 평균연령도 확 낮아졌다. 임상수 감독의 영화 속에 액션이 등장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전 이제 앞으로 액션영화로 가려고요. 흐흐. 왜 여태 이런 걸 안 했나 몰라. 여태껏 못해봤던 귀엽고 장난스러운 것들 다 해본 것 같아요. 온갖 영화적인 잔재주들을 충분히 낄낄거리면서 구현했죠.” 청춘영화의 대명사인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내일을 향해 쏴라>처럼 우울한 현실 속에서 질주하는 청춘의 모습을 그렸지만, <나의 절친 악당들>은 그보다 훨씬 밝고 유쾌하다.

고준희는 소비 욕구를 자극하는 스타다. 너무도 화려하고 스타일리시한 나머지 자꾸 뭘 사고 싶게 만든다. ‘고준희 단발’, ‘고준희 운동화’.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준희가 하면 뭐든 유행이 된다. 연기를 할  때조차 고준희는 고준희로 빛난다. 모델처럼 근사한 몸매와 가늘고 긴 팔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면 허름한 골목길조차 눈부신 런웨이처럼 느껴진다. 반면 배우 고준희는 스타 고준희보단 존재감이 덜하다. 꽤 오래전 부터 여러 편의 드라마와 영화에 부지런히 출연해왔으나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 연기력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은 없지만 이렇다 할 화제를 모은 적도 딱히 없었다. 임상수 영화에 고준희가 출연한다는 소식은 그래서 뜻밖이었다. 쓰디쓴 돈의 맛을 보여준 문제적 감독과 소비주의 시대의 꽃이라 불리는 광고계 패셔니스타의 만남이라니! 게다가 그녀의 상대역은 연기 귀신 류승범이다. “사람들은 제가 뭘 입고 나왔는지에 대해 얘기할 뿐, 제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대가 없어요. 이 영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쟤가 이 판을 망치지 않고 잘했을까?’ 우려가 되겠죠. 저도 관객과 같은 마음이에요. 물론 부담이 커요. 하지만 제 입장에선 마이너스 될 건 없다고 봐요. 실망할 기대 자체가 없잖아요.” 고준희는 매우 솔직했다.

화이트 셔츠와 실크 소재 넥타이, 숄 칼라 베스트는 모두 바톤(Baton).

화이트 셔츠와 실크 소재 넥타이, 숄 칼라 베스트는 모두 바톤(Baton).

“첫날 촬영하고 준희 씨한테 살짝 반했어요. 크랭크인 하던 날이었는데, 하나는 성당에서 신부한테 자기 성생활에 대해 고해성사하는 코믹한 장면이었고, 또 하나가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혼잣말하는 좀 슬프고 심각한 장면이었어요. 그걸 아주 날씬하게 잘하더라고요. 군더더기 없이 싹~! 전 깜짝 놀랐어요.” “전 솔직히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날 아마 오후부터 비가 왔을 거예요. 야외 촬영인데 비는 내리지, 아직 9월이라 날씨는 후덥지근하고, 현장엔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게다가 첫 촬영인지라 꽤 긴장한 상태였거든요. 그땐 감독님 스타일도 잘 몰랐으니까. 어쨌든 기운은 좋았어요.” 임상수 감독은 그야말로 숨어 있던 뭔가를 발견한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영화를 찍으려면 감독과 배우가 단기간에 사랑에 빠져야 하거든요. 남자 배우든 여자 배우든 감독들이 반해야 돼요. 그래야 영화 찍는 게 재밌고, 더 멋있게 찍히는 거고. 막상 같이 일을 해보니 아주 재미있는 구석이 있더라고요. 예능 프로그램 나가도 잘할 거 같아. 웃겨요, 웃겨. 그걸 초반전에 깨달았어요. 안 그럴 것 같은데, 유머 감각이 있어요. 덕분에 내가 쓴 시나리오 속 나미보다 훨씬 더 유머러스해졌죠.”

사실 임상수 감독이 나미 역으로 고준희를 캐스팅한 건 단순한 이유였다. 사고 차량을 옮기는 레커차 운전수라는 현실적인 직업을 고준희처럼 비현실적인 외모를 지닌 인물이 연기한다면 꽤 근사한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어차피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매체이지 않던가. “사실 여태껏 제가 본 준희 씨 출연작 중에 연기를 기가 막히게 잘했다 하는 건 없었어요. 연기는 보통, 룩은 오케이! 저걸 한번 딱 멋지게 찍어보자는 생각이었죠.” 임상수 감독은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다. 그렇다고 의기소침해질 고준희가 아니다. “이런 얘길 첫 만남부터 대놓고 하셨어요. 되게 솔직하게 하시더라고요. 물론 저도 욕심이있었죠. 연기에 대한 갈증을 많이 느끼던 시기였어요. 개인적으로 임상수 감독님의 팬이기도 했고요.” 고준희는 임상수의 영화들을 전부 꿰가 찍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설렜죠.” 임상수가 부드러운 직설가라면 고준희는 따뜻한 현실주의자다. 둘은 확실히 궁합이 잘 맞는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도 그랬다. “감독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면 일단 한번 해봐요. 그리고 제가 하고 싶은 것도 해보죠. 단번에 아니라고 하시면, 그냥 아닌가 보다 해요. 사실 무안할 수도 있거든요. 지켜보는 스태프들도 많고. 순간 마음이 작아질 수도 있는데, 뭐 현장에서 더 좋은 거 찾으면 되는 거잖아요? 전 쉽게 상처받는 타입은 아니에요.”

고준희의 검정 브라 톱과 빨강 스커트는 미우미우(Miu Miu), 금색 뱅글은 모두 이소리(Yi.sohri at Boon The Shop). 임상수 감독의 의상은 모두 본인의 것.

두 사람은 이번 영화를 작업하며 처음 만났다. 재작년 겨울이었다. 그전까진 매체를 통해서만 서로를 접했을 뿐이다. “사무실에서 만났어요. 건조하게. 원래 감독과 배우의 만남이란 게 다 그렇죠. 둘이 같이 밥이라도 먹은 건 엊그제가 처음일 거예요. 까칠하더라고요. 흐흐.” 임상수 감독의 짓궂은 농담에 고준희는 애교 섞인 불만을 표했다. “자꾸 이러시면 진짜인 줄 안단 말이에요~.” 두 사람은 시종 이렇다. 흰머리가 성성한 감독은 점잖은 체하며 싱글싱글 여배우를 약 올리고, 그럴 때마다 고준희는 귀엽게 투덜거린다. “전 사실 감독님이 좀 말수도 없고, 차가울 줄 알았어요.” 임 감독이 반문했다. “내가 안 차갑나?” “전혀요.” “약간 깍쟁이?” “하하. 아뇨.” “한때는 ‘매몰차다’ 이런 얘기도 많이 들었는데…” 임상수 감독이 보는 고준희는 성실한 배우다. “준희 씨는 연기에 대한 헝그리 정신이 있어요. 일단 자기가 먼저 덤비는 배우는 감독 입장에서 언제나 흥미를 불러일으키죠. 엊그제만 해도 그래요. 편집이랑 믹스도 다 끝났는데, 제 머릿속에 대사 한 줄이 삭 떠오른 거예요. 그 한마디를 위해 양수리까지 와줬어요. 이미 여러 차례 오간 터라 또 오라고 하기 미안했는데, 흔쾌히!” “그래서 그날 저 맛있는 거 사주셨어요. 둘이서 고기 먹었죠.”

극 중 나미는 고준희와 비슷한 면이 꽤 있다. 일단 솔직하다. “저 역시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사는 편이긴 하죠.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단 표현을 부끄러움 없이 하기도 하고요. 하고 싶은 걸 참진 않지만, 그래도 선은 지킨다는 게 나미와의 차이점이에요. 이를테면 여배우가 술 먹고 길에서 뻗으면 안 된다는 정도의 상식 선에서 벗어나진 않죠.” 나미는 액션영화 속 흔한 여주인공들 같은 민폐 캐릭터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위기를 헤쳐나가는 인물이다. 단발머리에 펑키한 옷차림으로 나쁜 악당들을 혼내준다는 점에선 만화 <원피스>의 밀짚모자 해적단 나미가 떠오르기도 한다. 임상수 감독이 이 만화를 봤을 리는 만무하지만 둘은 이름도 같다. 그리고 아주 독립적이고 고독한 여자다. 커다란 레커차를 몰고 악당들과 추격전을 벌인다는 설정은 <매드맥스>의 여전사 퓨리오사를 연상시키는 면도 있다. 나미 역시 기름때 범벅에 온몸은 멍투성이다. 이를 위해 고준희는 한동안 액션 스쿨을 다니기도 했다. “맞는 장면이 많아서 특수 분장을 꽤 세게 했어요. 멍이 잔뜩 들었다가 점점 빠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제대로 된 얼굴로 찍은 게 몇 개 안 돼요.”

임상수 감독은 과거에도 딱 한 번 청춘영화를 찍은 적이 있다. 가출 청소년들의 모습을 통해 세기말의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와 뒤틀린 기성세대의 모습을 보여준 <눈물>은 봉태규와 조은지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눈물>에 날것 그대로의 불편함이 있었다면, 이번 영화는 훨씬 보기 편하죠. 세련된 상업영화니까요. 물론 어른들을 경멸하는 그런 반항의 스피릿이 이 영화 안에도 있긴 해요.” 영화가 현실을 반영한다면 15년이 지난 지금의 모습은 어떨까? 임상수 감독은 젊은 배우들을 거침없이 망가뜨렸다. “건강하고 젊은 육체가 심하게 상처 입는 그런 장면들을 일부러많이 찍었어요. 청춘은 뭘 해도 예쁜 건데, 왜 이렇게 답답하게 억눌려 살아야만 되는 건지… 요즘 젊은 친구들이 무기력하고, 또 많이 힘들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씁쓸한 현실 그 자체로 끝났던 <눈물>과 달리 이번 영화는 주인공들의 판타지를 실현시킨다. 나미와 지누 일당은 거침없이 부조리한 틀을 깨부수고 박살을 내며 뛰쳐나간다.

“그런데 전 이런 청춘을 보내본 적이 없어요. 회사를 다닌 적도 없고, 나미와 지누처럼 어두운 환경에서 성장한 것도 아니고. 삶의 굴곡이 별로 없어요. 그냥 적당히 계속 그만그만하게 살다가 아빠의 반대를 무릅쓰고 배우를 하게 된 거죠. 저희 아빠가 공군 출신인데 대단히 보수적이시거든요.” 알려져 있다시피 고준희는 학창 시절 교복 모델 선발대회에서 상을 받은 바 있다. 연예계 관계자들의 제안이 이어졌지만 연기자 생활을 시작한 건 아버지의 당부대로 대학에 들어가고 난 후부터였다. “솔직히 내 딸이어서 예쁜 거지, 남들이 봐서 예쁠 정도는 아니라는 거예요. 너무하죠. 고등학교 때 딱 그 얘길 듣고 그랬어요. ‘나도 안다. 나도 그렇게 안 예쁜 건 아는데, 좀 이 시대가 팔다리가 긴 애들을 원한다.’ 사실 제가 시대를 잘 만나서 카메라 앞에 설 수 있게 된 거긴 하죠. 옛날 배우들 같은 컴퓨터 미인은 아니니까. 근데 전 왠지 될 것 같았어요.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었죠.” 원래 고준희는 음악을 했다.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계속해온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전공으로 삼길 내심 바랐던 것. 임상수는 그런 고준희를 보고 ‘엄친딸’이라고 했다. “‘엄친딸’은 아니고요. 엄친딸 스타일, 그러니까 ‘st’죠.”

반면 임상수 감독의 청춘은? “저요? 아휴. 제 청춘은 그냥 폐허죠, 뭐.” 이번 영화에서 그는 기성세대 악당 중 한 명으로 깜짝 등장한다. “‘개저씨’라고 하죠? 이런 영화를 찍으면서 전 아닌 척하고 있지만 제가 정확히 그 개저씨 제너레이션이에요. 그래서 저도 그 일원으로 출연해요. 왜들 그렇게 됐는지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영화 밖에선 전 젊은 사람들 편입니다.” 그의 영원한 페르소나 윤여정 역시 이번에도 어김없이 출연했다. 원래 처음 시나리오엔 없었던 인물이다.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번엔 역할이 없다고 말씀드렸죠. 밤에 술 먹고 헤어지려고 하는데 ‘그래도 내가 니 영화에 지나가는 거라도 한 컷 나와야 되지 않겠냐.’ 그러시더라고요. 의리 같은 거죠. 그래서 집에 와서 대사가 아주 많은 한 신을 썼어요. 아마 찍을 때 고생 좀 하셨을 거예요. 뭐 워낙 재미있게 잘하셨지만.” 샘 오취리도 눈에 띄는 출연자다. 한국에 온 흑인 이주 노동자로서폐 차장에서 일하는 야쿠부 역할이다. 힘없는 인턴 직원 지누, 그리고 나미와 같은 밑바닥 젊은이인 그는 비겁하고 악랄한 어른들에게 도전하는 착한 악당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자기도 시나리오를 읽고 울컥한 게 있었나 봐요. <비정상회담>으로 유명해지고 난 후에도 꼭 출연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하고 성실해서 뭐든 할 수 있는 친구예요.”

검정 시스루 크롭트 톱은 발렌시아가(Balenciaga), 술이 달린 스커트는 프로엔자 스쿨러(Proenza Schouler at Boon The Shop).

사랑에 빠진 감독과 배우들이 만난 영화 촬영 현장은 예측 불허의 피곤한 전쟁터라기보단 단란한 가족 소풍처럼 따뜻했다. “이번에 감독님한테 반한 게, 짜증이 날 법한 상황에서도 화를 내신 적이 없어요. 어른답게 늘 중심을 지키셨죠. 그러니 현장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요.” 고준희는 빈말을 할 줄 모른다. 먼저 다가가 살랑거리며 속에도 없는 말로 감독의 환심을 사는 일 따위엔 관심이 없다. 임상수 감독은 첫 만남에서 바로 이런 그녀의 스타일을 간파했다. 지금까지의 영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 여자의 마음을 읽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이 노련한 감독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그래서 고마웠어요. 전 억지로 뭘 하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요. 어색한 분위기를 띄워보겠답시고 헛소리를 계속하다 보면 아예 아무 말도 안 하느니만 못한 꼴이 되니까. 저한테 굳이 그렇게 안 해도 된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래서 고준희의 칭찬은 모두 진심이다. 그걸 아는 임상수 감독은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있는 곳인데 내 집 같아야 일할 맛이 나고 아이디어도 많이 나오죠. 저만 해도 그래요. 배우들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저임금에 시달리는 어린 스태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평생 영화를 해온 입장에서 당장 그 친구들의 상황을 바꿀 수는 없어도 기분 좋게 일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 정도는 제가 할 수 있잖아요. 나이 드니까 그런 게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고준희 역시 현장에서 매일 뛰어다니는 스태프들을 위해 운동화를 한 켤레씩 선물했다. 센스 넘치는 패셔니스타답게 취향껏 고를 수 있도록 옵션도 다양하게 준비했다. 영화 제목 따위가 큼직하게 박힌 단체 티셔츠는 개인의 차이와 선택을 존중하는 임상수 영화 현장과 어울리지 않는다.

고준희는 최근 트레이드마크와도 같던 단발머리를 짧게 잘랐다. “제가 4년동안 계속 단발머리로 살았잖아요. 그전에 머리를 길러보기도 했는데, 목이 길어서 저 혼자 기른다고 생각하지, 남들은 다 단발이라고 생각하더라고요. 결정적인 건 스타일리스트 언니의 말이었어요. 냉동 인간 같다고. 하하. 그래서 잘랐어요.” 최근에 열린 제작 보고회에서는 금발이었지만 지금은 다시 어두운 갈색이다. “짧은 머리에 노랗게 염색까지 하면 사람들이 절 못 알아볼 줄 알았거든요. 어차피 공개됐으니 더 이상 자유롭게 놀진 못할 거 같아 다시 평범하게 돌아왔죠.” 이 엉뚱한 여배우와 지난 한 철을 보내며 <나의 절친 악당들>이라는 유쾌한 연애를 한 임상수 감독은 이번 영화 이후, 고준희를 보는 영화계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질 거라 확신했다. “감독들의 마음을 제가 알잖아요. 보다 좋은 시나리오를 갖고 준희 씨에게 덤비겠구나 싶어요.” 사실 <바람난 가족>의 문소리도 당시만 해도 신인이나 다름없었다. 모델 출신의 진희경 역시 <처녀들의 저녁식사> 전까진 연기력으로 그리 인정받는 배우는 아니었다. 황혼의 나이에 접어든 후에야 칸영화제의 레드 카펫을 밟게 된 윤여정은 또 어떤가. 스타 메이커 임상수의 말이니 믿어도 좋을 것이다. “감독이라면 자기가 만든 스토리를 100% 잘 끌고 가고 싶은 욕심이 있죠. 그와 동시에 나랑 같이 일하는 배우의 퍼텐셜이랄까,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잘 끌어내는 것도 감독의 역할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난 재밌었던 것 같아요.”

물론 여기에 영화가 흥행하기까지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임상수감독에게 이번 영화는 여러모로 도전이었다. 오락영화는 그의 전공 분야가 아니니까. 게다가 한국에서 오락영화가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좋은 점수를 받은 사례는 극히 드물다. “오락영화를 날씬하게 뽑아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웃기게 하려다가 펑크가 많이 나는 거니까. 제가 좀 나이에 비해 철이 덜 들긴 했지만, 실제로 젊은 친구들이 어떻게 볼지가 궁금해요. 두고 봐야죠.” 임상수 감독은 힘들게 살아가는 청춘들이 이 영화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 고준희는 <나의 절친 악당들>의 히든카드다. 그 카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영화가 나와봐야 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거다. 요즘 임상수 감독은 고준희라는 이 담백하고 어여쁜 여배우에게 푹 빠져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