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도 드레스가 되나요?

앞자락을 살짝 들고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을 끌며 공주처럼 입성해야 주목받던 레드 카펫. 이 패션 잔치에 이단이 출현했다! 과연 바지를 입어도 레드 카펫을 밟을 수 있을까?

 

10여 명의 여기자가 일하는 6월 초 <보그> 편집부. 공통점이라면 다들 7월호 잡지를 만드느라 맹렬히 일한다는 사실, 그리고 죄다 바지 차림으로 마감한다는 사실(임산부 여기자 두 명만 제외!). 입구는 하나지만 출구가 두 개인 바지는 입출구가 하나인 치마에 비해 활동성이 좋은 게 사실이다. 가브리엘 샤넬은 이 점에서 힌트를 얻어 1900년대 초 남자 바지를 여자에게 입혀 코르셋 일색의 옷차림으로부터 해방을 선언했다. 이브 생 로랑 역시 1960년대에 여자들의 이브닝 룩이었던 드레스 대신 남자의 전유물이었던 턱시도를 보란 듯이 입혔다(가브리엘과 이브라는 패션 위인들 사이엔 바지를 여자의 몸과 옷장으로 옮겨와 복식 자유 독립을 일으켰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역사적으로 복식 좌표에서 드레스의 근원인 치마와 정반대 지점에 놓인 품목이 바지다. 그것은 보폭을 벌려 용맹스럽고 활기차게 걸어야 하는 남자에게 딱이었다. 반면 무릎을 맞대고 다소곳이 앉아 있어야 조신하다고 여겨지던 시대의 여자에게 바지는 썩 적절치 않은 옷이었다. 하지만 가브리엘과 이브가 일으킨 복식 혁명 이후, 바지를 입은 여자는 더없이 진보적이며 진취적인 이미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 바지가 치마의 고유 영토이자 신성불가침으로 인식되던 붉은 양탄자까지 정복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연말도 아닌데 유별날 정도로 전 세계 요지에 레드 카펫이 자주 깔렸던 올해 상반기를 돌이켜보자(토니 상, CFDA 시상식, SAG 어워드, 칸 영화제, 메트 갈라 파티, 아카데미, 골든 글로브 등등). 바지 입은 여자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물론 공식 석상이나 몇몇 시상식을 위한 레드 카펫에서 턱시도 차림의 여자는 꽤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논하는 바지는 턱시도의 아랫도리가 아니다. 드레스 뺨치는 바지다.

지구 최고의 멋쟁이들로 바글대는 메트로폴리탄 패션 전시를 위한 갈라 파티에서 바지 혁명이 일어났다. 꾸뛰르 드레스에나 쓸 법한 옷감으로 튜브 형태의 바지를 만들어 두루마리 휴지 같은 시폰 장식을 늘어뜨린 다이안 크루거(샤넬), 차이나 칼라의 민소매 톱에 옆트임이 들어간 무릎 길이의 단정한 스커트 아래 똑 떨어지는 흰 바지를 입은 리야 케베데(3.1 필립 림), 스페인 투우사 분위기가 물씬 나는 비즈 프린지의 새빨간 볼레로 재킷에 같은 옷감의 날렵한 팬츠, 여기에 검정 새틴 벨트와 장식 줄을 늘어뜨린 시에나 밀러(타쿤), 격자의 교차점에 스팽글을 단 시폰을 검정 파이핑이 들어간 흰색 라운지 웨어와 함께 입은 제나 라이언스(제이크루 파자마 세트를 변형한 듯) 등등. 리한나, 킴 카다시안, 비욘세 등이 계단을 청소하고 남을 듯한 치맛자락이나 알몸뚱이라고 해도 될 시스루 드레스를 입고 ‘끼’를 부릴 때, 바지 차림의 여인들은 더없이 세련되고 현대적으로 보였음은 물론이다.

파자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번 메트 갈라의 레드 카펫에서 가장 우월했던 팬츠 룩은 사실 따로 있다. 당대 최고 패션 이야기꾼으로 불리는 미국 <보그> 그레이스 코딩턴의 옷차림을 보시라. 마이클 코어스가 만든 만다린 이브닝 파자마 수트 차림으로 붉은 머리를 휘날리는 그녀에게 모두의 관심이 쏟아지는 건 당연했다(엄밀히 말하면, 마이클 코어스가 새로 기획한 파자마 수트 컬렉션이자 전시 스태프들이 입었던 유니폼 중 하나다). 만인이 인정하는 스타일의 대가는 짐을 싸서 공항으로 떠날 때도 이 옷차림이었다. 지금껏 그 누구도 저 높은 곳을 날던 붉은 양탄자 위의 옷을 지상으로 끌어내리지 못했으나, 그레이스 코딩턴은 파자마 정장 한 벌을 입고선 ‘Runway to Reality’가 아닌, ‘Red Carpet to Reality’를 실현시킨 것이다.

 

한편 올인원, 다시 말해 상의와 하의가 이어진 옷은 흠잡을 데 없이 재단된 채 레드 카펫에서 활용됐다. 이미 스텔라 맥카트니나 피비 파일로 같은 멋쟁이 여류 디자이너들이 스스로 레드 카펫에서 시도했던 검정 테일러드 올인원이 줄리아 로버츠와 제나 라이언스에 의해 부 활한 것. 로버츠는 광고 모델로 계약했던 지방시와의 인연을 이어가듯 리카르도 티시가 디자인한 검정 올인원을 입고 SAG 시상식에 나타났다(어깨와 허리를 강조한 나머지 잠수복 같았다). 또 메트 갈라에서 흰색 파자마의 신분 상승을 보여준 라이언스는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주름 잡은 테일러드 올인원으로 또다시 파격을 가했다(한때 피비와 스텔라가 입었던 테일러드 올인원과 흡사하다). 빈틈없이 잘 차려입어야 하는 오스카나 메트 갈라와 달리, 힘을 쭉 빼고 최대한 멋스럽게 입는 게 관건인 패션 시상식의 경우 바지는 한층 적극적으로 활약할 수 있다. CFDA 시상식에서도 에이믈린 발라드와 사스키아 드 브로우 같은 ‘쭉쭉빵빵’한 모델들이 와이드 팬츠로 롱스커트 효과를 내며 맵시를 과시했다(키 170cm 이상의 여인들이라면 이런 속임수를 시도할 만하겠다).

얼마 전 스텔라 맥카트니는 서울에 들러 분더샵 청담에 자신의 아카이브를 공개했다. 2002년부터 시작된 시그니처 컬렉션을 통째로 가져오는 대신, 최근 5년간 제작한 레드 카펫 드레스 중 14벌만 골라 6월 14일까지 전시했다. 똑 떨어지는 바지를 잘 만들기로 소문난 인물답게 레드 카펫 드레스 가운데는 그웬 스테파니와 카라 델레빈이 입은 바지도 포함됐다(작년에 메트 갈라에서 흰색을 입었던 카라는 올해엔 검정 바지를 입었다). 우리 시대 멋쟁이들이라면 한 번쯤 꼭 입고 싶은 바지를 만드는 디자이너가 레드 카펫을 위해서도 바지를 만들었다니! 아울러 그레이스 코딩턴이 재치와 실용성 만점의 파자마 차림으로 레드 카펫을 지상으로 착륙시켰다니! 조만간 레드 카펫에 치맛바람이 아닌, 바짓바람이 휘몰아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