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트렌스젠더 모델, 안드레야 페직

2016.03.15

by VOGUE

    트렌스젠더 모델, 안드레야 페직

    젠더 유동성이 런웨이를 지배하고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보그〉가 안드레야 페직에게 패션계가 트랜스젠더 터닝 포인트에 도달했는지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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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어느 토요일 오후 마침내 뉴욕 패션 위크의 떠들썩함에서 벗어난 안드레야 페직(Andreja Pejic. 23세)은 바워리호텔의 조용한 로비에서 벨벳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세 명의 관광객이 고개를 돌려 이 플래티넘 금발 모델을 대놓고 쳐다보고있었다.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을 보는 것이 그들이 이 도시에 온 이유라도 되는 듯 말이다. 나는 페직이 런던으로 떠나기 몇 시간 전에 겨우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런던에서 자일스 디콘 2015가을 컬렉션에 설 예정이다. 그녀는 모델로 활동하면서 수십 번 런웨이를 걸었다. 그러나 완전히 성전환한 여자로 무대에 서는 건 자일스 디콘 쇼가 처음이다. “저는 사진 촬영이 더 좋아요”라고 대체할 수 없는 악센트로페직은 말했다. “런웨이에 서는 건 약간 스트레스예요.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그렇게 많은 트레이닝을 받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디자이너들은그냥 여자 모델들과 함께 던져놓고는 이렇게 말했어요. ‘이 힐 신어봐요!’”

    보스니아 전쟁이 일어나기 몇 개월 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안드레이 페직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녀는 이혼한 어머니, 할머니, 남동생과 함께 베오그라드 외곽의 난민 캠프로 도망쳤다. 그리고 1999년나토 주도의 폭격이 시작된 후 그들은 호주 멜버른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페직은 학교에서 돌아와 왕따를 피하기 위해 타고난 여성스러운 말투, 걸음걸이, 제스처를 고치려고 혼자서 연습을 했다. 키가 186cm에 달하고 신발 사이즈는 11인 페직은 어릴 때부터 모델 활동을 해왔다. “사춘기엔 그것을 멈추고 싶었어요. 발과 손이 너무 크고 턱 선이 너무 강한 게걱정이었거든요.” 그녀는 지금도 패션 일을 시작할 때 느끼던 안도감을 기억한다. 비슷한 비율의 모델들에게 둘러싸여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패션계에서 활동하는 모델들은 다 똑같아. 그러니 난 걱정할 필요 없어!”

    페직은 작년에야 성전환 수술을 했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있으면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이 약간 초현실적으로 느껴져서 계속 집중 해야 한다. 그녀에겐 남자다운 면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프라다 터틀넥과 필립 림 펜슬 스커트를 입은 페직은 내 여동생, 엄마, 나의 생물학적인 여자 친구들만큼 여성스럽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 노력의 산물이다. 2차 성징을 억제하는 합성 호르몬(처음엔 몰래, 그 후엔 엄마의 지원과 축복 속에서 복용했다)을 달고 살던 사춘기, 그리고 회복하는 데 두 달이 걸린 수술까지(물론 운 좋은 결과는 말할 것도 없고). 그녀는 사람들이 지닌 성별에 대한 본능적 인식과 싸우고 그것을 해체시켜버린다.귀족적 태도와 깜짝 놀랄 정도로 날카로운 광대뼈에도 불구하고 페직은 엄격함과는 거리가 멀기도 하다.

    1시간가량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경직되지 않은 고요한 표정을 유지했다. “사회는 당신에게 트랜스젠더가 될 수 있다고 얘기해주지 않아요.” 어린 소년으로서 겪었던 고통을 차분히 설명하며 그녀가 말했다. “게이로 사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그건 제게 맞지 않았어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글쎄, 어쩌면 이건(여자로서의 삶을 사는 환상) 네가 가끔 상상하고 싶은 것에 불과해. 그러니 사내아이가 되려고, 정상적이 되려고 노력해봐’라고 말이에요.” 열여섯 살 때 멜버른 맥도날드에서 일하다 발탁된(스카우트 담당자는 그녀가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몰랐다. 그저 그녀의 외모가 모델같다는 것만 알았다) 페직은 3년 후 파리에서 장 폴 고티에의 남성복 쇼와 여성복 쇼 무대에 모두 섰다. 그녀는 제레미 스콧, 톰 브라운, 그리고 마크 제이콥스에게 캐스팅됐다(물론 양성적 모델로). 올해 그녀는 메이크업 포에버 모델로 등장할 것이다. 이로써 그녀는 중요한 뷰티 광고를 따낸 최초의 트랜스젠더 모델 중 한 사람이 됐다.

    페직의 성공은 트랜스젠더 정체성의 문화적, 정치적 주류화와 딱 맞아떨어지고, 그것을 상징하게 됐다. “지금은 좀더 많은 카테고리가 있습니다. 그건 좋은 거예요. 우린 마침내 젠더와 성적 취향이라는 것이 좀더복잡하다는 걸 깨닫고 있습니다.” 몇몇 사람이 페직에게 성전환이 그녀의경력을 망칠 수도 있다고 경고할 만큼 젠더 유동성에 대해 축적된 관심은크다. “‘오, 너만의 특별함을 잃어버리게 될 거야. 너는 더 이상 관심을 받지 못할 거야. 세상에 예쁜 여자는 넘치거든!’이라는 얘기를 정말 많이 들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가끔 패션계 주자들이 던지는 돈에만 관심있는 조언은 심한 편견이 되곤 했다. 어느 에이전트는 페직에게 “트랜스젠더보다 양성적 모델이 되는 게 낫다”고 조언했다. 그녀는 그런 목소리를 무시했다. 그리고 자신의 모델 커리어에는 냉소적인 카메오 캐스팅 이상의 것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중요한 건 이것이 단순히 하나의 상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녀는 다른 모델들이 할 수 없는 것들을 해왔어요. 그녀는 오랫동안 남성과 여성 사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왔습니다.” 작년까지 페직을 담당했던 DNA 모델 매니지먼트의 남자 모델팀 공동 책임자 진 코건은 말했다. “안드레야는 종종 여성복 모델을 하며 남자 모델로 멋진 이력을 쌓아왔어요. 그녀는 그걸 해냈습니다. 그게 많은 사람의 눈을 뜨게해줬고, 세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했어요. 우리는 앞으로 몇 년간 그녀의 영향을 목격하게 될 겁니다.”

    패션계의 성적 모호함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대공황 시절 마를린 디트리히의 턱시도와 멋지게 쓴 모자를 생각해보라. 다이앤 키튼이 <애니홀>에서 입었던 구겨진 수트, 몸의 굴곡을 모호하게 만드는 캘빈 클라인진 차림의 케이트 모스는 어떤가. 지난 몇 년 동안 여성들의 옷장은 남자들에게도 활짝 열려 있었다. 칸예 웨스트는 킬트를 입었고, 릴 웨인은 레오퍼드 프린트 레깅스를 입고 랩을 했다. 해리 스타일스와 저스틴 비버는여성용 진을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성의 경계를 뛰어넘는 이런 옷 입기는 본능적이며 가끔 즉흥적이고 미적인 선택으로까지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시뇽 헤어스타일과 매치된 얼굴의 피어싱과 꾸뛰르 드레스의 주름밑으로 보이는 타투만큼 전혀 쇼킹하지 않다.

    바로 지난 겨울 구찌, 프로엔자 스쿨러, 샤넬은 남자들을 여성복 런웨이에 내보냈다. 지방시, 조르지오 아르마니, 생로랑, 라프 시몬스, 모스키노는 반대로 남성복 쇼에 여성들을 캐스팅했다. 구찌의 새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남자 모델들에게 여성복을 입히기로 한 선택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순수한 기록이었다”고 말했다. “분류하고 꼬리표를 붙이는 것을 뛰어넘어 자유에 대한 강한 지지라고 할 수 있어요.” 뉴욕에서 활동 중인 파티 홍보 담당자이자 게이인 레이디팩도 동의했다. “흑인이라는 것이 트렌드가 아니듯 트랜스젠더도 트렌드가 아닙니다.” 프로엔자 스쿨러의 라자로 헤르난데즈는 이렇게 표현했다. “더 이상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요. 남자와 여자의 구분은 사라지고 있어요. 적어도 미적으로는요. 디자이너는 문화를 반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우리 문화의 큰 단면입니다.”

    이성의 옷을 입는 것과 양성성은 트랜스젠더와 분명 다르지만, 그들은 관용과 수용의 지표로 여겨질 수 있다. 그리고 페직은 오늘날 활동 중인 유일한 트랜스젠더 모델이 아니다. 이네스 라우(Ines Rau)는 알렉시스 비타를 위해 포즈를 취했다. 아리스 완저(Arisce Wanzer)는 오프닝 세레모니 광고에 등장했다. 리카르도 티시의 어시스턴트에서 뮤즈가 된 레아 T(Lea T)는 지방시 모델로 활동해왔다. 티시가 2010년 가을 광고에 레아 T를 캐스팅했을 때 그것은 부분적으로 그녀의 수술비에 도움이 됐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녀가 트랜스젠더이지만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라고 티시는 말했다. “그녀는 은행가가 될 수도 있고, 약사가 될 수도 있고, 뭐든 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우연히 모델이 된 것뿐입니다.” 현재 그녀는 레드켄 홍보대사다.

    뉴욕에서 활동 중인 트랜스젠더 아티스트이자 연기자인 저스틴 비비안 본드에게 이런 가시성은 중요하다. “트랜스젠더들은 가족 안에 역할 모델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밖으로 눈을 돌립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아주 작은 힌트를 볼 수만 있어도 당신은 실재하게 됩니다. 그것이 아주 중요해지고 있어요.” 바니스 2014년 봄 광고를 위해 17명의 트랜스젠더 모델(라우를 포함)을 카메라에 담은 브루스 웨버는 그 경험이 자신의 삶을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그 광고가 단순히 사진으로 끝나지 않은 게 중요했어요. 우리는 영상과 소책자에 그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광고를 위해 꾸며낸 게 아니었어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용기에 엄청난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정치적 면에서는 트랜스젠더에게 동등한 기회(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 주택, 일터에서의 차별 방지)를 보장해주는 게 미국의 차세대 시민 권리 운동이 될 것이다. 동성 결혼에 대한 태도가 사람들이 예상하던 것보다 빠르게 바뀐 것처럼 지난해에 트랜스젠더들에게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1월 국정 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트랜스젠더라는 단어를 공개적으로 사용한 첫 대통령이 됐다. 올해 3월 웰즐리 여자 대학은 여성으로 살고 있고 스스로를 여자라고 밝힌 지원자를 받아주기로 했다. 의료보험은 트랜스젠더 배제를 철회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스탠퍼드, 하버드, 예일 등을 포함한 미국 62개 대학이 재학생들에게 호르몬 치료와 성전환 수술을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그 목록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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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an-Paul Gaultier 2014 S/S

    DKNY 2014 F/W

    한편 <Transparent>와 <Orange Is the New Black> 같은 드라마는 주류 시청자들에게 트랜스젠더들의 삶을 정상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런 관심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TV 채널 퓨즈는 남자에서 여자가 된 두 명의 카바레 가수에 대한 시리즈를 준비 중이다. 작년에 <타임>지 커버에 등장한 여배우 라번 콕스는 새로운 CBS 드라마의 파일럿 방송에서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트랜스젠더 변호사로 캐스팅됐다. 그리고 최초로 트랜스젠더 수술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에 관한 영화인 <The Danish Girl>(오스카상을 수상한 에디 레드메인이 주연을 맡았다)은 시상식 시즌에 맞춰 11월 개봉 예정이다. 이런 진전은 세대적 특징이라고 PFLAG(Parents, Families and Friends of Lesbians And Gays) 정책 담당자 디에고 산체스는 말한다. 그는 하원의원 바니 프랭크의 전고문이었으며,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공개한 미국 의회 최초의 상급 직원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훨씬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현재 힘 있는 위치에 있을 만큼 나이를 먹은 겁니다.”

    UCLA의 윌리엄스 연구소에 따르면 가장 자주 인용되고 있는 미국내 트랜스젠더의 수는 70만 명이다. 이것은 아주 낮은 추정치다. 해마다 전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하는 사람의 수(500명 정도)도 마찬가지로 즉흥적 계산이다. 많은 트랜스젠더가 수술을 원치 않거나 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미국에서는 소수의 의사들만 성전환 수술을 하고 있다). 사람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일단의 통계 수치는 2011년 이뤄진 전국 트랜스젠더 차별 조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조사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중 90%가 직장에서 차별을 겪은 적이 있다고 말했고, 20%가 집을 구할 때 거부당했으며, 41%는 자살을 시도한 적 있다고 한다. 최근 실시된 두 가지 설문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90%가 레즈비언, 게이, 혹은 양성애자인 사람을 알고 있다고 말한 반면, 트랜스젠더를 알고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8%에 불과했다. 그 숫자들은 감정이입의 격차를 암시한다. 시스젠더(Cisgender. 출생 시 부여받은 성별과 본인이 인식하는 성별이 일치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최근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용어. 트랜스젠더의 반대말)인 나는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런 격차는 분명 존재한다. 자기 자신처럼 느껴지지 않는 몸을 갖고 태어나 그 몸 안에 갇혀 살도록 강요받는 건 참을 수 없을 거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이 남자처럼 느껴지는 게 어떤 건지 정확히 아는 건 훨씬 힘든 일이다. 이런 문제들이 공론화되긴 했지만(타블로이드 신문에서 브루스 제너의 성전환 과정을 지켜봤지만) 그 것은 여전히 말하기 복잡한 주제다. 전문용어는 포괄적이고, 게다가 라틴어 접두사로 가득하기에 가장 호의적인 사람들도 불쾌감을 줄까 봐 두려워한다. 그런 문제에 대해 잘못 얘기하는 것은 어느 개인의 특질을 부인하는 것이다. 누가 그러고 싶겠나?

    그러나 내가 얘기를 나눠본 신인 디자이너 지지자들 사이에선 젠더 유동성은 그냥 어깨 한번 으쓱하고 지나갈 정도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에크하우스 라타(Eckhaus Latta)를 이끌고 있는 마이크 에크하우스와 조 라타(둘 다 27세로 그들의 쇼는 첼시 갤러리 오프닝에 참석할 가능성이 높은 골수 관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수년 동안 서로의 옷을 입어 왔다. “우리에게 그건 무슨 선언 같은 게 절대 아니었어요. 그저 내 몸에는 이런 형태가 어울려, 정도이죠”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들의 디자인(기대하지 않은 컬러 조합으로 디자인된 다양한 질감의 레이어들)은 종종 트랜스젠더 친구들이 모델이 된다. 예를 들어 아티스트 줄리아나 헉스터블과 여배우 하리 네프 같은 사람들 말이다. “우리는 모델은 어떠해야 된다는 기준을 깨는 비규범적 생각에 마음을 활짝 열고 있어요. 그렇다고 오‘ , 이 옷은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담고 있어!’ 같은 건 절대 아닙니다”라고 라타는 말했다. “트랜스젠더는 우리에게 새로운 게 아닙니다”라고 에크하우스는 덧붙였다. “이런 게 세상이고 그들은 그냥 우리 같은 사람입니다.” 역시 27세이며 후드 바이 에어(CFDA 어워드 후보에 오른 스트리트웨어 브랜드)의 설립자 셰인 올리버는 자신의 디자인을 ‘새로운 세대를 위한 옷장’이라고 여긴다. 그는 자신의 옷에 반영된 정치에 대해 확신하는 동시에 심드렁하다. “젠더 유동성은 그것과 많은 연관이 있어요. 저는 제 옷들이 시장성이 없다거나 우주 공간에서 온 것처럼 보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올리버가 만드는 것과 같은 그런 옷을 입고 전통적인 성 역할에 못마땅해하는 날이 곧 올 수도 있지만 아직 우리는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다. “3~5년 안에 자신이 트랜스젠더라고 공개한 사람들이 군에 복무하는 것을 보고 싶어요”라고 PFLAG의 산체스는 말한다. “저는 학교에 다니는 어린 트랜스젠더들이 운동을 하고, 클럽에 가입하고, 자신의 젠더와 일치하는 화장실을 사용하는 걸 보고 싶습니다. 10년 안에 사람들은 트랜스젠더를 현재 게이나 다른 인종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겁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흥미로우면서도 걱정스러운 것은 겉보기에 피할 수 없는 미래와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곳 사이의 간극 때문이다. 트랜스젠더들이 더 많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호기심과 관찰의 대상이다. 아직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심문을 받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를 가진 개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안드레야에게 이 얘기를 꺼냈을 때 그녀 역시 이 문제를 치열하게 생각해왔다는 것을 암시하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런 성전환 사실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누가 나를 사랑하기나 할까? 이 모든 것이 공개된다면 남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후엔 ‘나는 성공했고 내가 성취한 것에 만족해. 내가 부끄러워할 일은 없어.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그건 당신 마음이야’라고 생각하는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에디터
    앨리스 그레고리(Alice Gregory)
    포토그래퍼
    PATRICK DEMARCHELIER, GETTY IMAGES/ MULTIB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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