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

달콤한 소주 대첩

2016.03.15

by VOGUE

    달콤한 소주 대첩

    소주가 과일에 빠졌다. 이젠 독하고 쓴맛에 들이켜던 소주가 아니다. 요즘 소주에선 유자, 석류, 그리고 블루베리 맛이 난다.

    WOO_041-2a

    최근 고깃집엔 새로운 숨은 메뉴가 하나 생겼다. 써놓고 팔진 않지만 문의하면 내준다는 ‘처음처럼 순하리’다. 지난 3월 말 롯데주류가 새로 출시한 소주인데 이 복병의 초록 병이 판매 세 달여 만에 1,000만 병이나 팔렸다. 도수를 보통의 소주보다 크게 낮춰 14도로 순화시켰고, 유자청 농축액을 섞은 뒤 유자 향 합성착향료로 향을 더했다. 일견 패키지는 다소 촌스럽고 90년대 대학가에서 크게 유행하던 과일 소주와 다름없어 보이는 맛인데 SNS에선 구하지 못해 안달이다. 본래 부산, 경남 지역을 타깃으로 출시된 제품이기에 서울, 경기 지역에선 발매 초부터 구하기 힘든 술로 소문이 났고, 이후 품귀 현상의 붐을 타고 지금 술집에서 가장 핫한 제품이 되었다. 이 기세에 롯데 주류는 지난 5월 “원래 강릉 공장에서만 제조하던 걸 군산 공장까지 확장해 전국 판매망을 갖췄다”고 발표했다. 맥주의 계절 여름에 등장한 주류 시장의 의외의 다크호스다.

    롯데주류의 순하리 인기 이후 동종 업계의 유사품도 쏟아져 나왔다. 하이트진로, 롯데에 이어 주류업계 3위인 무학은 자사의 ‘좋은데이’에 블루베리, 석류, 유자를 섞어 각각 ‘블루, 레드, 옐로우’를 내놨고, 대구에 본사를 둔 금복주도 유자 향의 소주 ‘상콤달콤 순한참’을 출시했다. 지난 2월 발매됐다 별 반응을 얻지 못한 국순당의 ‘콤주’는 뒤늦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으며, 3년 전 ‘참이슬 애플’로 이미 과일 소주 시장에 뛰어든 하이트진로는 과일향 소주 제품의 출시를 다시 긍정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소주들이 일제히 독기를 빼고 달콤한 변신을 취하는 모양새다. 특히 순하리의 인기는 최근 하향세였던 소주 시장의 구세주가 되었다. 순하리의 판매 성장으로 롯데주류는 2002년 15%였던 소주 시장점유율을 올해 17%까지 올렸고, 2012년부터 매해 5% 안팎으로 감소하던 소주 판매량은 올해 2.8% 증가했다. SNS에선 순하리를 ‘소주계의 허니버터칩’이라 부르며 인증샷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연예인들도 팬들의 조공물로 이제는 허니버터칩이 아닌 순하리를 받았다며 자랑의 멘션을 올렸다. 올 초 허니버터칩의 열풍을 이어받을 다음 과자는 과연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그 주인공은 ‘수미칩 허니머스터드’도, ‘꿀먹은 감자칩’도, ‘허니버터 아몬드’도 아닌, 소주 ‘순하리’였던 것이다.

    리듬체조 선수 순하리가 매트 위에 등장한다. 핑크빛의 경기복, 화려한 메이크업은 보통시합 때와 다름없는데 양손엔 곤봉 대신 ‘순하리’를 들었다. 순하리 선수는 고난도의 팡셰,연속 피벗 동작을 마치더니 ‘순하리’ 두 병을 던져 한 바퀴 굴러 다시 잡는다. 그러곤 세계기록으로 우승. 세상에 이런 병맛 스포츠가 없다. 이 영상은 롯데주류가 ‘처음처럼’의 메인 모델 신민아 편과 별도로 제작한 CF 영상인데 ‘병맛 체조 영상’이라 불리며 업로드 3일 만에 50만 뷰를 찍었다. SNS 입소문을 통해 히트 상품이 된 ‘순하리’의 캐릭터를 그대로 반영한 광고인 거다. 사실 롯데주류는 발매 초기 저도주가 강세인 경남 지역의 테스트용으로 ‘순하리’ 판매를 부산, 경남으로만 제한했다. 하지만 그 전략이 ‘리미티드 소주 순하리’라는 의외의 이미지 효과를 가져왔고, 그 희소성이 SNS 유저들의 놀잇감이 되며 대박 상품으로 이어졌다. 그저 취하는 밤을 위해 마시던 소주가 이렇게 다양한 재미의 재료가 됐으니 병맛 즐기는 네티즌들이 반기지 않을 수 없다. 이젠 ‘SNS형 상품’ 개발에 나서는 제조업체가 나올지도 모를 분위기다. 인터넷상에서 사람들은 후발 주자인 ‘좋은데이’ 과일시리즈의 맛을 평가하며 ‘옐로우’는 그냥 ‘순하리’ 맛, ‘블루’는 풍선껌 맛, 그리고 ‘레드’는석류 시럽 맛이라며 놀고 있다. 다소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품절 마케팅, 그리고 대중적인 놀이 재료로서의 병맛 요소는 이제 히트 상품 제작의 공식 중 하나인 거다.

    근래 시장을 조금씩 넓혀온 위스키 업계와는 달리 소주는 최근 도수 빼기 추세였다. 2006년 롯데주류가 기존의 알코올 도수 21도보다 1도 낮은 20도의 ‘처음처럼’을 내놓은뒤 소주 업체들은 다들 조금 덜 독한, 부드러워 마시기 쉬운 소주를 마케팅으로 삼았다.하이트진로는 ‘참이슬’의 알코올을 17.8도로 내렸고, 롯데칠성은 두 차례에 걸쳐 ‘처음처럼’의 알코올을 17.5도에 맞췄다. 과일과 만난 소주들은 더 저알코올이다. 유자를 첨가한 ‘순하리’와 ‘상콤달콤 순한참’은 14도고, 유자, 자몽 등이 들어간 ‘콤주’는 9.5도며, 무학의 ‘좋은데이’ 과일 시리즈는 모두 13도다. CF 역시 부드럽고 달콤해졌다. ‘처음처럼’은 이제 고깃집에서 섹시한 여성을 내세워 연출하는 알싸한 술자리가 아닌 여자 동료들끼리 테라스에 둘러앉아 대화하며 즐기는 음주 문화를 배경으로 소주를 광고하고, ‘좋은데이’ 역시 먹방으로 주가를 높인 박수진을 내세워 털털한 여자의 술로 어필한다. 심지어 ‘순하리’ 광고 속 신민아는 소주를 온더록스로 마신다. 숙취 고약한 독주의 오명을 벗으려는 소주들의 새로운 트렌드. 꿀과 버터가 수놓던 과자 업계에 이어 각종 과일이 상륙한 반도의 주류시장에서 달콤함은 당분간 그 무엇보다 최적의 안주다.

    에디터
    정재혁
    포토그래퍼
    HWANG IN WOO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