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패션 테라피

요즘 패션은 새로운 힐링을 원한다. 엄마 몰래 드나들던 동네 오락실, 필통과 노트를 꾸몄던 스티커와 종이접기 등 어린 시절 즐기던 놀이가 새로운 패션 테라피로 떠올랐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지난 2월 피터 필로토 가을 패션쇼장으로 돌아가보자. 피터 필로토 역사상 최고였다는 호평 아래 컬렉션에는 ‘커넥트포’ ‘루도’ ‘뱀과 사다리 게임’ 같은 어린 시절 즐겼던 게임 모티브가 한가득 등장했다. 보드게임 모티브는 코트 위에 색색의 프린트로 선보였다. 핀볼은 밀리터리 재킷의 단추 장식으로 쓰였고, 커넥트포(입체적인 오목 게임)는 레이스 펜슬 스커트에 수놓인 동그란 칩 장식으로 묘사됐다. 여기에 자동차 게임 트랙을 형상화한 울 코트와 터틀넥 니트, 보드게임 판처럼 꾸민 알록달록한 무대까지! 또 남아메리카 갱단의 촐라 걸(Chola Girl) 스타일과 어두운 빅토리안 시대에서 영감을 받은 지방시의 구불구불한 런웨이엔 고물 오락기들이 고장 난 TV 수상기와 빈티지 스테레오 라디오 등과 뒤죽박죽 쌓여 있었다.

옛날 옛적 오락기들이 왜 쇼에 등장했을까, 싶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얼마 전 밀라노에 새로 개관한 폰다치오네 프라다(프라다의 문화 예술 복합 공간)에서 인기 만점인 장소는 웨스 앤더슨 감독이 기획한 카페 ‘바 루체(Bar Luce)’다. 오래된 이탤리언 카페 분위기로 꾸며진 이곳에서 손님들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웨스턴 게임기들. 앤더슨의 영화 <카스텔로 카발칸티>와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에 등장했던 기기로 이곳을 위해 다시 복각됐다. “바 루체는 ‘리얼 라이프’를 위한 공간입니다. 먹고 마시고 얘기하고 읽을 수 있는 다용도 공간이죠. 느긋하게 오후를 보내고 싶은 장소를 상상하며 완성했어요.” 핀볼, 자동차 레일 게임, 주크박스 등이 있는 카페는 추억과 낭만을 꿈꾸는 손님들에게 단연 인기다.

이렇듯 어린 시절 깨알 같은 추억의 놀이들이 패션 울타리 안에서 자주 눈에 띄고 있다. 지난달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서 열린 루이 비통 크루즈 쇼의 애프터 파티 역시 마찬가지다. 8090세대들이 실컷 즐겼던 춤추는 게임기 DDR부터 루이 비통의 파우치들을 낚을 수 있는 뽑기 게임, 자동차 레이싱 게임, ‘붕붕카’로 불리는 범퍼카, 고고장을 연상시키는 댄스 플로어 등등. 전형적인 미국 놀이공원처럼 구색을 갖춘 이곳에서 한국 기자들은 월미도 놀이공원을 떠올릴 수밖에. “이번 크루즈 쇼가 열린 곳은 70년대에 지은 대저택이에요.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늘 그렇듯 미래적인 터치를 더해 컬렉션을 완성했지만 파티는 당시 놀이 문화 감성을 살렸죠.” 루이 비통 홍보 담당의 설명이다. “LVMH 그룹 회장 일가족들은 스티커 사진을 찍고, 루이 비통 디자인 팀은 댄스 플로어에서 신나게 춤을 췄고, 배두나는 뽑기 게임에 참여하는 등 다들 동심으로 돌아간 듯 신나게 즐겼어요.” 만약 이곳이 파리와 LA에서 가장 ‘힙’한 클럽 같은 분위기로 꾸며졌다면, 여러 세대가 가뿐한 마음으로 파티를 즐기기에 무리였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요즘 하이패션이 재미 들린 마케팅 중 하나는 스티커다. 최근 패션 행사장 여기저기서 심심찮게 발견되는 스티커는 편집부로 배달되는 보도 자료에도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다. 마르니 20주년을 맞아 밀라노 시내에 꽃시장을 열었던 콘수엘로 카스틸리오니는 마르니 특유의 꽃무늬와 동물 캐릭터 스티커를 기자들에게 선물했다. 샤넬 역시 새로운 파인 주얼리 ‘코코 크러쉬(Coco Crush)’ 론칭을 기념해 일러스트레이터 솔레다드 브라비와 함께 귀여운 스티커를 만들었다(인스타그램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광화문 D타워에 열렸던 <루이 비통 시리즈 2> 전에서는 관객들에게 큼지막한 스티커 12종 세트가 무료로 제공됐다. “60~70년대 팝아트에 많이 쓰였던 오브제였고, 이번 봄 컬렉션에 프린트로 사용된 모티브를 스티커로 제작했어요. 전시를 보는 것 이상의 ‘교감(Interaction)’이 가능하도록 기획한 서비스입니다.” 이 스티커들은 여행용 트렁크에 장식되면 딱이다. “여행과 트렁크라는 브랜드 DNA와 상징을 또다른 형태로 공유한 거죠. 스티커를 통해 지난봄 컬렉션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도 있죠.” 아닌 게 아니라 스티커 시리즈는 반응이 가히 폭발적이었다. “트렁크 외에 다이어리나 휴대폰, 심지어 클러치나 가방에도 다양하게 연출하더군요.” 이와 비슷한 아이디어는 가방 디자이너 안야 힌드마치의 이번 시즌 컬렉션에도 등장했다. 스티커를 잔뜩 붙인 듯한 가방디자인을 선보인 것. 가방이 히트 치자 힌드마치는 아예 가방에 부착할가죽 스티커까지 제작해 판매했다.

그나저나 늘 최신식, 최첨단, 미래에 집착하던 패션이 왜 갑자기 복고풍 오락 마케팅에 빠진 걸까? “루체 바는 집처럼 안락하면서도 재미있는상상력을 자극하는 곳입니다.” 프라다 하우스는 계속되는 불경기가 복고풍 오락실 같은 ‘펀(Fun)’한 컨셉을 낳았다고 전한다. “경기가 안 좋을수록 ‘향수’를 좇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대중의 그런 심리를 제대로 간파하죠. 이는 자연스럽게 키치 아이템에 열광하게 만듭니다. 디즈니와 반스의 협업을 보세요. 출시를 애타게 기다리는 건 패션 피플뿐만이 아닐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