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밀리가 떴다

할아버지부터 손녀까지 모두 가업에 참여하는 전통적인 패션 가문의 시대는 갔다. 디자이너를 중심으로 뮤즈와 아티스트들이 뭉친 새 가족의 탄생, 새 시대의 패션 패밀리가 떴다!

 

지난 5월 초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는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 장을 올렸다. “궁극의 아이콘인 도나텔라 베르사체를 소개하게 돼 매우 자랑스럽고 영광스럽습니다.” 흑백사진 속에서 도나텔라와 리카르도는 몸을 포개듯 다정한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이어진 설명. “F/W 2015 지방시 패밀리 캠페인 모어 투 컴 순!” 밀라노 패션 가문의 여제가 파리 꾸뛰르 명문가의 광고 모델로 활약하게 된 파격적 사건이다. 이 도발이 가능했던 건 디자이너들이 스스로를 ‘패밀리’라고 지칭했기 때문이다. 티시는 꽤 오래전부터 자신의 곁을 지키는 친구들을 ‘패밀리’로 부르며 애정을 쏟았다. 그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사진 대부분에는 ‘#FAMILY’ , 혹은 ‘#GANG’이라는 해시태그가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이 해시태그가 달린 사진 속 인물은 가족이나 다름없다는 얘기. 이른바 한 패션 대가족을 이끄는 가장이 바로 티시라는 것.

“저의 가장 큰 힘은 가족에게서 비롯됩니다.” 3년 전 <인터뷰> 매거진에서 도나텔라와의 대화를 통해 티시는 가족의 힘에 대해 설명했다. “저에게 가족이란 단순히 DNA 구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가족이란 형제의 느낌이죠.” 8명의 누나 밑에서 자란 그는 패션계에서 새로운 누나들을 찾았고, 이를 자신의 패션 가족으로 명명하는 중. 그렇다면 그의 가족 구성원들은 또 누구일까? 무명 시절부터 함께한 모델 마리아칼라 보스코노, 지방시 초기부터 그를 지지해온 카린 로이펠트, 뉴욕 아파트를 공동 구입해 함께 살고 있는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 비치 등등. 이 외에도 마돈나, 줄리안 무어, 루니 마라, 비욘세, 나오미 캠벨, 아만다 사이프리드, 제시카 채스테인, 리브 타일러 등이 대표적인 티시 패밀리다.

 

 

티시 가문에 필적할 만한 패션 가문은 칼 라거펠트 가문이다. 뮤즈이자 스타일리스트 아만다 할레치, 프랑스 여배우 안나 무글라리스와 바네사 파라디 등이 라거펠트 가문의 여인들. 아울러 젊고 잘생긴 청년들도 라거펠트 가문에 입양되곤 한다. 보디가드 세바스티앙 종두, 라거펠트의 성은을 입은 뒤 무명 모델에서 가수로 데뷔한 밥티스트 지아비코니가 럭키 보이들이다. 모델 브래드 크뢰닉과 그의 아들 허드슨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운 라거펠트의 ‘자식’. 특히 꼬맹이 허드슨에 대한 칼의 애정은 외손주를 향한 할아버지의 마음 그 이상이다.

여기에 어느새 막내딸로 자리 잡은 고양이 슈페트까지. 얼마 전 <뉴욕 타임스>를 통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가족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아들이 일으키곤 하는 문제 없이 아들을 거느리는 지금이 좋습니다.” 그는 스스로 내린 가족의 정의에 대해 덧붙였다. “이건 제 선택입니다. 의무감에 의한 일이 전혀 아니죠. 이것이 바로 큰 차이점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태리 디자이너들이야말로 패션 일가를 이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얼마 전 게이 부부의 대리모 문제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돌체앤가바나의 스테파노 가바나는 지독한 가족 사랑의 주인공이다. 인스타홀릭인 그는 하루라도 ‘#DGFamily’ 해시태그를 빠트리지 않는다. 비앙카 발티, 모니카 벨루치 등 이태리 스타들의 사진에는 자신의 가족임을 증명하는 해시태그 도장을 찍는다. 또, 이번 가을 남성복 컬렉션 주제는 가족, 여성복 컬렉션의 주제는 바로 어머니였다.

이 외에도 패션 패밀리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인물들은 꽤 많다. 남성복 브랜드 아미(Ami)의 디자이너 알렉산드르 마티우시는 친한 친구들 사진에 ‘#F.AMI.LY’라는 해시태그를 더하고, 사진가 머트앤마커스 듀오는 케이트 모스 등 절친 스타들과의 여행에 ‘Family Trip’이라고 이름 붙인다. 한편, 발맹의 올리비에 루스테잉은 가족이라는 말 대신 ‘#BALMAINARMY’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가족애 대신 패션 전우애를 자극한다.

이제까지 패션 패밀리라는 용어는 일가족이 패션에 종사하는 전통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손녀딸까지 모두 함께 일하는 펜디, 미쏘니, 에트로, 페라가모 같은 이태리 브랜드가 대표적인 예다. 또 파리의 LVMH 가문과 케어링 가문 같은 대기업도 빼놓을 수 없는 패션 명문가다. 또 최근엔 패션에 푹 빠진 셀러브리티 가족들도 패션계의 퍼스트 패밀리 자리에 오르고 있다. 킴 카다시안과 칸예 웨스트를 중심으로 한 카다시안 패밀리, 그리고 빅토리아와 데이비드 베컴 가족 말이다. 물론 현재 주목받는 패션 패밀리에는 혈연관계가 없다. 그러나 패션에 대한 애정과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똘똘 뭉쳐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패션은 피보다 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