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의 시계

이정현은 90년대부터 지금까지 늘 다른 걸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 마음 하나로 트렌드가 생기고, 세상에 없던 인물이 영화로 나왔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그녀는 또 한번 새롭다.

기하학적인 패턴의 드레스는 마르니(Marni).

기하학적인 패턴의 드레스는 마르니(Marni).

만날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 이정현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만난 건 박찬욱 감독의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칭찬에 신중한 박찬욱 감독 입에서 나온 말은 “근래 본 각본 중에서 최고야” 였고, 이정현은 순식간에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갔다. “여배우 캐릭터를 독특하게 끌어냈고 반전도 있었어요.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한 호흡으로 읽혀서 1시간 만에 다 읽었어요. 신인 감독인데 극을 너무 잘 써서 깜짝 놀랐어요.” 영화는 손재주가 좋고 성실함 하나로 중무장한 수남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그린다. 한 편의 드라마이지만 블랙코미디이기도 하고, 로맨스, 스릴러, 형사물 등이 뒤범벅되어 있다. 자유로운 상상력이 펼쳐지는 이 영화를 두고 이정현은 ‘잔혹동화’ 같았다고 말한다. 이 영화는 전적으로 이정현의 영화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 당시 이 역할을 연기할 다른 배우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정현이 두 번째로 단독 주연을 맡은 영화다. 첫 번째는 <꽃잎>이었다. 19년 가까이 지났지만 대중은 여전히 이정현을 두고 <꽃잎> 얘길 한다. 신들린 연기, 미친 연기라는 수식어가 줄곧 그녀를 따라 다녔다. “<꽃잎>은 이제 그만 버리고 싶어요. 너무 좋지만 너무 오래됐어요. 유일한 작품이 아니라 나중에 함께 거론되는 작품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열여섯 살 데뷔작’ ‘3000:1 경쟁률’ 과 같은 숫자는 <꽃잎>에서 이정현을 반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녀가 연기한 광주 학살을 목격하고 미쳐버린 소녀는 그 자체로 역사이자 꽃잎이었다. 정식으로 연기를 배운 적 없는 열여섯 살 소녀가 선보인 연기는 이론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정현이 부른 김추자의 ‘꽃잎’은 참 아팠다. 괴물 같은 여배우의 등장에영화계는 대종상영화제,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을 안겼다. 이후 공포영화 <하피> 등 작품 출연을 이어갔지만 이정현의 활동엔 가수의 비중이 더 커져갔다. 필모그래피는 2000년부터 10여 년간 뚝 끊겨 있었다. 앨범을 세 장 더 냈지만 국내 활동 기간이 짧았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부각될 여지도 없었다. 당시만 해도 토크 중심 예능이었고, 이정현은 토크쇼 체질이 아니었다. 그 시간 동안 이정현의 무대는 중국이었다. ‘3대 기획사 총수입보다 출연료가 높다’ ‘체육관으로는 부족해 평야에서 콘서트를 했다’ ‘국가주석이 초대했다’는 등 풍문만 들려왔다. “한동안 공포영화나 신들린 역할만 들어왔어요. 그런 이미지로 굳어지는 게 싫었어요. 국내 음반 시장이 안 좋다 보니 중국 활동을 하게 되더라고요. 전 시나리오를 많이 까다롭게 보는 편이에요. 뭔가 독특한 게 있다거나 저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게 되는 거 같아요. 아무리 연기가 하고 싶다고 아무 작품이나 할 순 없잖아요. 여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지만요.(웃음)”

작품에 대한 목마름의 시간을 깨워준 사람은 박찬욱 감독이었다. “너 배운데, 왜 연기 안 하냐고 화내셨어요. 뭔가를 많이 깨우쳐주셨어요. 너 배우야, 작품 해야 해, 하고 늘 말씀하세요. 저의 멘토예요. 지금도 작품 들어가기 전에 감독님께 여쭤봐요. 작품에 대한 마음이 잘 맞아요.” 박찬욱·박찬경 감독에 대한 믿음으로 아이폰 영화 <파란만장>에 출연했고, 이는 배우로서 2막을 열어주는 작품이 됐다. <파란만장>을 본강이관 감독은 <범죄소년>에서 17세에 아기를 낳은 미혼모 역을 제안했고, 김한민 감독은 <명량>의 정씨 여인에 이정현을 떠올렸다. <범죄소년>은 노 개런티 출연이었고, <명량>은 천만 영화가 됐다. 이정현은 두 작품에서 모두 지독하게 섬세한 연기를 선보였다. 전보다 다양한 기회가 열렸지만 이정현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로 한결같은 선택을 했다. “노 개런티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100년에 몇 작품 나올까 말까 한 여배우 캐릭터였는걸요. 배우니까 좋은 영화를 촬영할 때 가장 행복해요. 영화가 주는 감정을 사람들이 오랜 시간 간직한다는 점이 너무 좋아요. 그게 에너지가 되는 거 같아요.”

이정현의 눈에 비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수남은 ‘너무나 맑고 순수한 여자, 그리고 로맨틱한 여자’다. “시나리오에는 정상적인 여자로 나왔지만 일부러 ‘유아틱’하게 연기했어요. 순수함이 가장 크게 보였거든요. 순수한데 강해서 좋았어요. 표정도, 말투도 유아틱하게 갔죠. 감독님이 좋아하셨어요.” 그녀가 캐릭터로 들어가기 위해 가장 많이 던지는 건 ‘질문’이다.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이런 장면에서는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해요?’라고 묻는 게 아니라 상황에 대한 질문을 던져요. ‘이 말을 왜 해요?’ ‘그런데 남편은 왜 저기 있어요?’ 같은 질문들이오. 상황만 인지하고 있다가 슛 들어가면 탁 빠져요.” 예전에는 촬영 들어가기 한두 달 전부터 그 캐릭터만 생각했다. <명량> 출연 당시 전쟁통에 있는 정씨 여인을 표현하기 위해 마른 몸에 몸무게도 더 뺐다. 배고픈 감정을 더하기 위함이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준비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걱정을 많이 했지만 막상 현장에 가니 바로 집중이 가능했다. “상황에 빠질 수 있는 연습이 많이 된 거 같아요. 어느새 그런 노하우가 쌓인 듯해요.”

슬리브리스 드레스는 산드로(Sandro), 반지는 엠주(Mzuu), 스웨이드 소재 스트랩 힐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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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에 비해 너무 예쁜 의상, 현실감 없이 똑 떨어지는 사이즈, 새것 느낌이 나던 스쿠터 등은 이정현의 제안으로 현장에서 바로 낡고 오래된 것으로 교체됐다. 신인 안국진 감독은 이정현이 이런 디테일을 잡아낼 때마다 입이 귀에 걸렸다. 리허설 없이 가도 배우들 간 호흡이 잘 맞았고, 스태프들과 호흡도 좋았다. 안국진 감독, 촬영 감독, 조명 감독 모두 이정현과 동갑. 나중에는 친구처럼 편하고 재미있게 촬영했다. 여유롭고 풍족한 촬영 환경은 아니었다. 이정현은 먹는 데 있어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려서는 안 된다며, 사비를 털어 간식이며, 식사를 푸짐하게 내놨다.

이정현은 타고난 기획자이기도 하다. 마돈나와 마이클 잭슨의 광팬으로 네 살 때부터 문워크를 췄다는 싹수 있던 아이 이정현은 프로듀서 실력까지 갖춘 아티스트로 자랐다. 대한민국에 테크노 열풍을 몰고 왔던 1집 수록곡 ‘와’가 센세이션까지 일으킨 건 비주얼 컨셉 때문이었다. 당시 엄정화의 ‘몰라’가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고, 테크노 음악에 사이버 컨셉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정현은 반대로 갔다. 다들 첨단으로 간다면 동양적으로 간다! 부채, 비녀, 중국풍 의상을 입었고, 새끼손가락에 마이크를 달았다. 결과는 대단했다. 첩첩산중 두메산골까지 이정현의 노래가 울려 퍼졌고, 여자들은 머리가 길든 짧든 비녀를 하나씩 꽂고 다녔다. 시대를 앞서간, 퍼포먼스 여왕의 탄생이었다. ‘바꿔’에서는 사이버 여전사로, 평소 마론 인형을 수집하던 취미는 ‘줄래’의 컨셉으로 재탄생했고, ‘미쳐’에서는 마술사로 변신했다. 매니지먼트에 의해 완벽히 기획되는 지금의 무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아이디어를 내고, 관계자들의 반대에도 뚝심 있게 밀고 나가며, 무대며 소품을 직접 챙겼다. <무한도전> ‘토토가’ 무대를 준비하며 나뭇가지를 주워 밤새 비녀를 깎고, 인형 가면을 칠하는 모습이 방송된 후엔 ‘무대 장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보그> 촬영일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보그> 팀이 준비한 시계를 보더니, “저기… 집에 이 컨셉과 딱 맞는 시계 있는데 가져올까요? 촬영 시안 보고 가져오려다가 첫 촬영인데 너무 오버인 거 같아서 안 챙겼어요. 15분이면 가져올 수 있어요. 저희 잠깐만 쉬었다가 해요!”라고 했던 것. 완벽주의는 아니라고 했다. 자신이 뭔가 좋은 기운을 얹어주면 좋은 거 같다고 했다. 하나의 공동 작업물을 내기 위해 이정현의 회로는 끊임없이 기분 좋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정현은 일하지 않을 때는 영화를 본다. 혼자 살며 취미 붙인 요리(이정현의 인스타그램에는 요리 게시물이 가득하다. 잡지에 실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플레이팅까지 완벽하다)를 할 때 빼고는 영화를 본다. “한국에 개봉하는 영화는 전부 다 봐요.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도 찾아보죠. 해외 영화제에서 상 받은 작품 찾아보면서 저 혼자 채점도 해요. 참, 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심사위원도 해요. 출품작을 다 본다는 생각에 지금 너무 신나 있어요. 그리고 또…” 이정현은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그녀가 비워둔 10여 년의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는 건, 영화에 대한 두근거림을 한시도 멈추지 않은 덕분일 거다. 이정현은 90년대부터 지금까지 늘 다른 걸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 마음 하나로 트렌드가 생기고, 세상에 없던 인물이 영화로 나왔다. “그냥 그런 게 있는 거 같아요. 남들이 다 하는 걸 제가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회사에선 싫어해요.(웃음)” 옛날 얘길 자꾸 해서 미안하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세상을 다 바꾸겠다던 노래가 들린다. 지금까지 이토록 새롭고 열정적인 앨리스는 없었기 때문이다. 강산이 바뀐다는 시간도 이정현의 시계에선 찰나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