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로드쇼

지금 거리에서 모델처럼 걷는 아가씨가 있다면 흉보지 말고 주의 깊게 살펴볼 것. 그녀는 지금 캣워킹 중이거나 촬영 중일지 모르니까. 보도블록 위에 펼쳐진 ‘열린’ 패션 로드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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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일정을 연장하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대림미술관 린다 맥카트니 사진전. 모르는 사람 빼고 세상이 다 아는 그녀의 일가족 모습만큼 눈에 띈 액자라면? 역시 비틀즈 멤버들이다. 특히 전설의 4인방이 앞 사람 꼬리를 물고 횡단보도를 일렬로 건너는 사진은 현대사진을 통틀어 인상적인 한 컷으로 꼽힐 만하다. 오죽 재미있는 광경이기에 여기저기서 수없이 풍자되고, 심지어 패션에서도 앤트워프 식스에 의해 재현됐겠나. 린다가 네 명을 비스듬하게 찍은 사진이 떠오른 건 뉴욕 첼시 화랑 거리에서 열린 구찌 2016 크루즈쇼에서였다. 도로를 양쪽에서 봉쇄하고 행인들을 통제한 뒤 무단횡단한 채 건너편으로 걸어온 모델들의 모습은 비틀즈 4인방의 워킹과 다름없었다. 이게 ‘쑈’인지 현실인지, 런웨이인지 ‘리얼웨이’인지 잠깐 혼란이 온 순간이었다.

 

 

구찌는 프리다 지아니니 시대 이후 혁신과 쇄신 과정에서 캣워크 구조도 거침없이 바꿨다.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데뷔작이었던 남성복 쇼는 도로 환기구 위를 걷는 듯 연출해 거리를 향한 애정의 시작을 보여줬다. 첫번째 여성복 무대는 뉴욕 지하철 타일 벽과 긴 통로를 응용해 모델들이 막 전철을 타고 내린 듯한 설정. 그 다음 리조트쇼에선 세트로 표현된 가짜가 아닌 ‘레알’ 길에서 쇼를 했다. 그의 두 번째 남성복 쇼가 열린 곳은 무솔리니 시대의 비행기 격납고(구찌가 밀라노에서 새로 이전한 본사 건물). 생중계로 쇼를 지켜본 사람들은 피날레 때 모델들이 건물 바깥을 끼고 돌아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짧은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바깥에서 기다리던 스트리트 사진가들은 재빨리 카메라와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한정된 관객들만 초대해 은밀하게 열던 패션쇼 런웨이에 실제 거리가 더해지자 가장 신난 건 역시 일반인들과 행인들. 뉴욕 머서 스트리트 매장에서 2016 리조트 컬렉션을 연 마크 제이콥스 역시 ‘열린 패션쇼’를 열었다. 매장에서 살롱 형태로 조촐하게 쇼를 열고 끝내는 게 못내 아쉬웠는지 모델들을 일렬로 몰고 나와 매장 바깥의 보도블록을 걷게 한 것. 덕분에 매장으로 초대받지 못한 팬들도 안전 펜스 너머 코앞에서 톱 모델들의 행진을 구경했다. 캣워크 노출은 피렌체에서도 있었다. 지난 피렌체 피티 우모에서 포츠 1961 쇼 역시 거리에서 쇼를 열었다. 밀란 부크미로빅은 포츠 1961 첫 번째 런웨이쇼를 위해 온니산티 광장에 캣워크 동선을 마련했다. 행인들과 관광객들에겐 더없이 좋은 구경거리!

그러고 보니 오프닝 세리머니의 커플은 작년에 리조트 컬렉션을 선보이기 위해 뉴욕 시가지에서 남녀 모델들의 일렬종대 행진을 감행한 데 이어 그 장면을 드론으로 촬영해 영상 서비스했었다. 그야말로 뉴욕이라는 콘크리트 정글 탐험(시내 행진 뒤 프레젠테이션 현장으로 들어오게 각본을 짰다)! 그랑 팔레 안에 뭐든지 뚝딱 세트로 만들어내는 샤넬 하우스는 실제 크기와 똑같은 거리를 재현했다(영화 세트장 저리 가라다!). 실제 사이즈 방돔 광장과 깡봉가 샤넬 매장을 고스란히 옮겨 짓고 도로까지 마련해 캣워크로 이용했으니까. 그런가 하면 얼마 전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리조트쇼를 연 어느 프렌치 브랜드의 경우, 원래 LA의 터널 하나를 막고 리조트 패션쇼를 열 뻔했다는 후문. 사실 패션쇼 좀 봤던 사람이라면 쭉 뻗은 복도나 보도블록, 혹은 아스팔트나 고속도로 앞에서 패션쇼를 하면 얼마나 근사할까, 한번쯤 상상해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실제 길을 런웨이로 활용한 패션쇼들이 보시다시피 늘고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스튜디오나 자연에서 벗어나 대도시 거리로 뛰쳐나간 가을 광고들을 구경해보자. 거리 신드롬의 주동자 미켈레는 구찌의 프리폴 광고를 위해선 소박한 거실에서 비주얼을 완성했지만, 본격적인 가을 시즌 캠페인에서는 뉴욕 한복판으로 모델들을 끌고 나갔다. “저는 꾸뛰르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거리도 사랑하죠. 두 가지를 혼합하면 새로움이 창조될 거라고 여겼어요.” 광고에는 전철을 기다리는 숙녀도 포함됐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꽃무늬 바지 정장 차림의 아가씨, 신호등 앞에서 핸드백을 뒤지는 처녀, 호텔 정문 앞에서 서성대는 청년 등이 자연스럽게 포착됐다(사진가 글렌 러치포드는 전 세계 <보그>를 통해 길거리 패션 화보를 자주 찍고 있다. 작년 12월호 본지에 실린, 꾸뛰르 드레스 차림의 슈퍼모델 사샤를 뉴욕 뒷골목에서 촬영한 인물도 그다). 정숙한 미우미우 소녀들도 방문과 현관문을 열고 가방을 챙겨 든 다음 거리로 우르르 몰려 나갔다. 뉴욕 이스트 빌리지를 비롯해 버스 정류장이나 공사판 옆 도로, 퇴근길 등에서 모델들은 실제인 듯 실제가 아닌 곳에서 실제 상황을 연출했다. “‘Subjective Reality’, 그러니까 심리학에서 쓰는 이론인 ‘주관적 현실’이 이번 캠페인 주제입니다.” 스트리트 사진인 척 하지만, 실은 실제 상황이 아니고 치밀한 계획 아래 ‘스트리트 상황인 척’ 하는 게 컨셉이라고 미우미우 하우스는 전한다. 버버리 프로섬 역시 가을 광고를 위해 젊은 예술가 12인을 런던 세인트 제임스 파크로 내보냈다. 그야말로 도시 방목! “런던을 대표하는 상징적 거리에서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은 런던의 활기찬 에너지와 위대한 전통이 연결되는 모습을 암시합니다.” 버버리 크리에이티브 총괄 책임자 겸 CEO 크리스토퍼 베일리의 설명이다.

 

 

사실 하이패션의 바깥 출입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디자인 측면에서 볼 때 길거리 요소에서 힌트를 얻어 옷을 장식하는 꾸뛰리에는 요새 흔하디 흔하다. 그렇다면 패션쇼가 런웨이를 거리로 길게 쫙 연장하고, 패션 광고 배경으로 대도시 한복판이 쓰이는 이유는? 쉽게 말해 스트리트 패션 사진의 엄청난 영향력이자 요즘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된 현실감으로 고객을 설득하려는 하이패션의 자세다. “스트리트 사진은 좀더 즉각적이고 매력적이며 살아 있는 예술을 대표합니다.” 스티븐 마이젤과 함께 뉴욕 곳곳을 헤집고 다닌 미우미우 하우스의 얘기다. 바야흐로 빌 커닝햄, 스콧 슈만 등의 스트리트 사진이 하이패션 세계에 예술적이며 실질적 영감을 제공한 셈.

커닝햄과 슈만의 뒤를 이어 전 세계 대도시 패션 거리의 인물들을 촬영하며 스트리트 사진에 가치를 부여한 사진가 남현범은 스트리트 사진이 하이패션에 거창하게 영감을 줬다기 보다는, 스트리트라는 패션 무대 자체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 같다고 전한다. “몇 년간 패션계 거물들조차 스트리트 패션을 제법 즐겼습니다. 매체에서도 꽤 비중 있게 다루다보니 쇼장 안팎의 경계가 모호해질 수밖에요.” 그는 스트리트가 워낙 재미있는 요소가 가득한 데다 의도치 않게 이뤄지는 찰나의 순간이 많다고 덧붙인다. “빈틈없이 계산적으로 완성된 이미지보다 의외성과 현실성을 담고 있는 스트리트 사진이 주목받는 건 당연합니다.”

<보그> 같은 패션지들은 캣워크 의상을 여자들이 일상에서도 무리 없이 쉽게 입을 수 있도록 ‘런웨이 to 리얼리티’ 혹은 ‘런웨이 to 리얼웨이’류의 기획을 종종 선보여왔다. 그건 고객과 독자들을 위한 실용적인 배려였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뒤집어졌다. ‘리얼웨이 to 런웨이’가 된 것. 다시 말해 패션 창조자들을 위한 현실 속 여자들의 배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