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터 이야기

패션의 조연에 불과하던 평범한 스웨터가 화려한 드레스 못지않게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장인들의 정교한 손길,극적인 커팅, 엉뚱한 믹스매치 등으로 매력 포텐을 터뜨린 스웨터 이야기.

오버사이즈 니트 드레스는 문희(Moonhee), 허리에 둘러 연출한 진회색 니트 스웨터는 올세인츠(AllSaints).

오버사이즈 니트 드레스는 문희(Moonhee), 허리에 둘러 연출한 진회색 니트 스웨터는 올세인츠(AllSaints).

패션 동네에 딱 이 시기만 되면 찾아오는 단어가 있다. 니트 스웨터! 달력의 숫자가 ‘9’를 가리키는 순간 우리 여자들은 기후와 상관없이 자동 반사적으로 니트 스웨터에 손을 댄다. 태양은 한반도 가까이에서 이글대지만 쇼윈도는 형형색색 가을 옷차림으로 변신 완료! 가을을 코앞에 두고 불볕더위 속에서 열린 브랜드 프레젠테이션에도 스웨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함은 물론이다.

요즘은 셀럽들이 ‘신상’을 먼저 ‘찜’하는 시대. 맨 먼저 간택된 스웨터가 있으니, 바로 엉성하게 짠 듯한 생로랑의 스트라이프 니트 스웨터다. 이 스웨터가 인기 폭발인 이유? 평범한 줄무늬 니트 스웨터 안에 망사 톱을 매치한 에디 슬리먼의 마법 같은 손기술 덕분이다. 여기에 지퍼로 쫙쫙 찢은 가죽 팬츠나 가죽 레깅스를 매치하면 매력적인 록 스피릿이 완성된다.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은 셀린의 여성스러운 스웨터. 피비 파일로가 선택한 니트는 역시나 좀더 여성스럽다. 소매가 꽃봉오리처럼 봉긋하게 부푼 니트 스웨터와 니트 브라를 덧붙인 터틀넥 스웨터는 78년에 나온 영화 <스웨터 걸>이 떠오르는 가슴을 강조한 스타일. 심지어 이 스웨터 걸은 어학 사전에 ‘젖가슴이 풍만한 소녀’라고 검색될 정도다. 다시 말해 스웨터가 몸매를 숨기는 역할이 아니라 오히려 섹시 아이템이었다는 결론이다. 그런가 하면 루이 비통의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가슴 선을 가로지르는 아찔한 절개에 밑단이 트럼펫처럼 펼쳐지는 스웨터를 선보였다. “니트 스웨터는 잘못 입으면 뚱뚱해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번에는 플리츠처럼 니트 원단을 쫀쫀하게 짜서 편안하고 날씬해 보이는 형태를 유지할 수 있어요. 여기에 가슴 선을 아찔하게 피해가는 절개로 섹시함이 더 강조되죠.” 쇼룸에서 만난 루이 비통 팀은 우리 여자들이 듣고 싶은 단어(편안하고, 날씬하고, 섹시하고!)들을 사용하며 설명했다.

이번 시즌 스웨터가 만년 조연에서 주연으로 급부상한 데는 구찌의 새로운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크게 한몫 거들었다. “섹시함보단 관능미!”라고 미켈레는 설명하며, 빈티지 스웨터에 살갗이 드러나는 여성스러운 레이스를 매치했다. 할머니 옷장에서 꺼낸 듯한 파랑 니트 스웨터는 화려한 자수와 비즈 장식으로 꾸며 엄청난 몸값으로 스웨터의 가치를 수직 상승시켰다(<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 문제의 파랑 스웨터를 기억한다면 더욱더). “800만원이 훌쩍 넘습니다. 웬만한 수트 가격보다 비싸죠. 한국에는 소량만 바잉했는데 고객이 원할 경우 추가 오더할 예정입니다.” 구찌 하우스에서는 촬영용 샘플 스웨터지만 비즈 하나하나, 자수 장식 한 올 한 올이 망가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었다.

옷감과 직조 방식에 따라 스웨터의 질감은 전혀 다른 모습을 띤다. 지금까지 도톰한 니트를 소개했다면 이번에는 시스루처럼 얇게 짠 로에베의 니트 스웨터를 만나볼 차례. 조나단 앤더슨은 런웨이에 등장한 35가지 룩에 반짝거리는 메탈사로 짠 터틀넥 스웨터를 매치했다. 가죽 재킷, 통 넓은 팬츠, 플리츠 라메 드레스, 오버사이즈 블라우스 등 어떤 룩에도 구애받지 않고 스웨터를 자유자재로 활용한 점이 인상적이다. “미래적이고 실험적인 유행에 관해 생각했습니다.” 그가 주제에 맞도록 스웨터를 활용한 방식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 원색의 에나멜 소재, 기하학적인 금속 주얼리, 실험실용 보안경 등이 툭툭 튀어나와도 실용적인 룩으로 보이는 결정적 이유가 됐다. 그나저나 스웨터가 아주 오래전부터 유행과 별 상관없이 여자들의 옷장을 떡하니 지키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패션 디자이너들이 이토록 애착을 보이는 이유는? 얼마 전 뉴욕에서 캡슐 컬렉션을 마치고 한국에 니트 전문 브랜드를 론칭한 디자이너 문희는 이렇게 설명한다. “자연스러움! 보는 사람도 편하고 입는 사람도 편하다는 것이야말로 스웨터의 매력입니다. 그리고 요즘엔 우븐처럼 얇게 짜이기 때문에 뚱뚱해 보일 염려도 전혀 없죠.”

달력을 넘기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가는 가을. 그 아쉬운 계절의 첫 선택은 뭐니 뭐니 해도 스웨터다. 주목받는 천재적 디자이너들이 선보인 더 고급스럽고 더 특별한 스웨터가 잔뜩 나온 이번 시즌에 더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