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서울의 수지 1

2016.03.15

by VOGUE

    서울의 수지 1

    패션계에서 ‘사무라이 수지’로 불리는 저격의 평론가 수지 멘키스. 그녀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 난생처음 서울을 방문했다. 그녀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서울의 패션계부터 찬찬히 훑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가워한 수지 멘키스와 진태옥. 멘키스는 자신의 온라인 기사를 정리한 책자와 여성단체를 후원하는 팔찌를, 진태옥은 전통 소재로 만든 차 거름망을 선물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가워한 수지 멘키스와 진태옥. 멘키스는 자신의 온라인 기사를 정리한 책자와 여성단체를 후원하는 팔찌를, 진태옥은 전통 소재로 만든 차 거름망을 선물했다.

    청담사거리 프랑소와즈 매장에서 하얀 옷차림의 디자이너 진태옥은 쇼윈도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매장앞 넓은 도로 건너편의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커다랗게 뜬 눈은 상념에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단정하게 굽이치는 머리칼은 검정과 회색의 경계를 넘나들고 이제 누구든 그녀 앞에 서면 자연스레 두 손을 모으지만, 이 거장은 잔뜩 긴장한 소녀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젯밤에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그분이 날 기억할까요?” 진태옥은 1993년 처음 파리 프레타 포르테에 참가하던 때를 떠올렸다. “무대 뒤가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어요. 무슨 일인가 했더니 모델과 스태프들이 쇼장에 ‘수지 멘키스가 왔다’는 거예요. 당시만 해도 전 그분이 그렇게 유명한 분인 줄 몰랐답니다. 쇼가 끝나고 백스테이지로 온 그녀는 제게 농담조로 이렇게 말했죠, ‘너와 악수하기 위해 5분을 기다렸어’. 그분의 격려는 제가 낯선 파리에서 활동할 수 있는 희망과 용기였죠. 아직도 당시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어요.”

    당시 <헤럴드 트리뷴> 기자였던 수지 멘키스는 지금 <보그> 온라인의 인터내셔널 에디터로 서울에 막 도착했다. <헤럴드 트리뷴> 시절부터 주최하던 럭셔리 콘퍼런스를 올해 컨데나스트에서 재개했으며, 2016년 콘퍼런스가 열릴 장소로 서울을 택한 것. 이번이 그녀의 첫 서울 방문이며, 진태옥은 그녀가 서울에 도착한 직후 만나는 첫 디자이너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기분이에요!” 매장에 도착한 멘키스는 버선발로 달려 나온 진태옥과 어린 시절 단짝 친구를 만난 양 감회에 찬 정겨운 얼굴로 두 손을 맞잡았다. ”매장이 매우 아름다워요. 당신의 옷 또한. 섬세한 소재와 스포티한 요소를 믹스했는데, 이건 요즘 추세에 맞춘 새로운 디자인인가요?” “제가 늘 추구해온 디자인 컨셉입니다. 소재를 대할 때 이 소재와 좋은 궁합이 뭘까에 대해 늘 고민하거든요.” “매우 앞서가는군요!” 멘키스와 동행한 스태프 한 명이 진태옥의 작업실 한쪽에서 액자에 넣어둔 오래된 신문 기사를 발견하고 미소 지으며 멘키스에게 넘겨줬다. 멘키스는 20여 년 전, 자신이 쓴 진태옥 컬렉션을 포함한 컬렉션 리뷰 기사를 찬찬히 읽었다. “지금이야말로 ‘모던 월드’죠. 그리고 당신의 20년 전 컬렉션은 지금 봐도 매우 모던하군요. 이 기사 내용이 현실이 되고 있어요. 당시에도 아시아 디자이너들의 옷은 섹시하지 않고 노출이 많지 않았죠. 그리고 요즘은 모두가 점점 그런 식으로 옷을 입는 추세죠.”

    김영진은 다채로운 빛깔의 한복과 원단으로 한국의 전통미를 보여줬다

    김영진은 다채로운 빛깔의 한복과 원단으로 한국의 전통미를 보여줬다.

    정갈하고 로맨틱한 한국식 아방가르드를 둘러본 멘키스의 다음 목적지는 한남동 좁은 골목에 위치한 차이 김영진 매장. “한복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었는지 그 비밀이 궁금해요.” “저는 소재를 보고 디자인을 합니다. 이탈리아산 원단이나 프랑스산 레이스도 사용하지만 반드시 우리나라 비단과 함께 매치하죠. 그 대비와 충돌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최근 RTW 라인으로 패션 한복인 차이킴도 론칭했어요.” 김영진은 팝업 스토어 컨셉으로 팔도 전역을 돌아다니는 유랑 매장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패션이 매우 물질적이라는 데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며칠, 혹은 몇 달간 잠깐 매장을 열었다가 모든 걸 버리고 사라지는 컨셉이죠. 판소리, 가야금을 다루는 전통 예술가들과 함께 다니며 공연도 하죠. 저는 제 옷이 지극히 한국적이거나 서양적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저만의 언어로 제 옷을 만들고 싶어요.” 그녀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듣고 난 후 멘키스는 한마디-아마도 최고의 찬사라고 할 수 있는-를 남겼다. “당신은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하나요? 전 당신이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라고 생각되는군요.”

    멘키스는 김재현이 털어놓은 솔직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경청했다.

    멘키스는 김재현이 털어놓은 솔직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경청했다.

    원래 2016년 콘퍼런스 장소는 도쿄로 내정돼 있었다.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이 지금 가장 핫한 곳은 바로 서울이라고 멘키스를 설득했을 때,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 중 하나는 K-Pop, 아이돌, 그리고 패션의 연결 고리였을 것이다. 그녀는 동시대 젊은이들과 영감을 주고받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그들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다(“K-Pop 스타들이 당신의 옷을 입나요?” “어떻게 그들과 친해졌나요?” “그들은 한국 디자이너에게 관심이 많나요?” 등등). 젊은 한국 여자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디자이너 김재현은 롤모델이라는 관점을 제시했다. “제가 파리로 유학 갈 때만 해도 한국에는 옷을 살 만한 곳이 많지 않았고 세련미라는 것도 찾기 어려웠죠. 요즘 젊은이들은 패션에 아주 관심이 많아요. 아이돌이나 뮤지션, 여배우들이 그들의 스타일 롤모델이 되고 있고요. 그러나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아직까지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단계에는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멘키스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서울 젊은 세대의 문화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멘키스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서울 젊은 세대의 문화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스티브 J와 요니 P는 음악, 젊은 문화와 패션은 서로 엮여 있으며 자신들의 일상 또한 그렇다고 설명했다. “‘가짜 패션’이 아닙니다, 라이프스타일의 일부로 우리 작업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거죠. 우리가 한창 롱보드에 빠져 있을 무렵 패션쇼에도 롱보드와 힙합 음악을 사용했습니다. 롱보드를 즐기는 뮤지션 친구들과도 알게 됐고 그들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었죠. 요즘엔 분야를 막론하고 패션의 요소를 믹스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K-Pop 스타나 가수들도 스타일리스트가 주는 대로 입는 게 아니라 패션에 대해 스스로 연구하고 자신에게 맞는, 혹은 트렌디한 디자이너 의상을 입고 싶어 하죠.”

    멘키스는 정욱준에게 한국의 디자이너로서 어떻게 세계적인 입지를 다졌는지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멘키스는 정욱준에게 한국의 디자이너로서 어떻게 세계적인 입지를 다졌는지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멘키스는 한국 디자이너들이 국제적인 입지를 구축하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정욱준 작업실에서 오버사이즈 컷과 데님 소재로 구성된 2016 봄 시즌 준지 컬렉션을 아주 꼼꼼히 살펴봤다. “실루엣은 크지만 몸에 잘 맞는군요, 훌륭해요. 당신이 국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DNA라고 생각합니다. 준지의 DNA는 하나의 클래식한 아이템을 재해석하는 것이죠. 저도 처음파리에 갔을 때 준지 DNA가 그들에게 새로운 것일까라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꾸준히 일관성 있는 컨셉을 선보이면서 주목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성공의 비밀이 자신에게 내재된 한국의 전통에서 비롯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내가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적인 걸 보여줘야지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컬렉션을 발표하면 모두가 한국적이라고 하죠. 그것은 저한테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어떤 방식이 한국적이라는 건가요?” “예를들어 제 컬렉션에는 항상 올 화이트 룩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인이 백의민족이라고 불린 것과 연결 지을 수 있죠.” 정욱준은 지금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마주한 고민을 조심스레 털어놨다. “요즘 패션에서 정말 중요한 건 마케팅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도 스타 마케팅은 필수 불가결하다고 생각하나요?” “중요한 질문이에요. 물론 유명한 셀럽에게 옷을 입히면 당신의 이름과 브랜드를 순식간에 알릴 수 있겠죠. 그리고 몇몇 게으른 바이어들의 관심을 끄는 데도 성공할 거고.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사람들은 그 옷을 좋아하지 않으면 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수지 멘키스는 디자이너들과 만나는 동안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그들의 질문에는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실제로도 올바른) 정답만 제시했다. 그녀의 인스타그램은 생기 넘치는 서울을 만끽하는 듯한 분위기로 가득했지만 종종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긴 얼굴은 그녀가 서울이라는 또 다른 곳에서 유기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패션계에 대해 골몰하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

      에디터
      송보라
      포토그래퍼
      CHA HYE 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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