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RET GARDEN

비밀을 간직한 소녀, 아픔을 움켜쥔 남자가 영화 〈비밀〉에서 만난다. 김유정과 손호준은 지금껏 드러낸 적 없는 얼굴로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을 연기한다.

크림색 드레스는 비네트(Vignette), 링은 스톤헨지(Stonehenge).

크림색 드레스는 비네트(Vignette), 링은 스톤헨지(Stonehenge).

집에 TV가 있다면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이 남자를 만나게 된다. 월요일과 화요일은 강력계에서 입에 본드를 붙인 듯과묵하게 위압적인 눈빛을 뿜으며 범인을 잡고, 나머지 요일 대부분은 백선생네 스튜디오에서 요리 과외를 받거나 만재도에서 부지런히 삼시 세끼를 챙겨 먹는다. 틈틈이 학교도, 정글도, 라오스도 다녀왔다. 재방송이 반복되는 수백 개의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 보면 늘 손호준이 있다. 한마디로 손호준은 요즘 ‘대세’다. 예능도, 드라마도, 광고도 모두 그를 찾는다. 그의 이름 석 자보다 ‘호주니’가 더 친숙하다. 2년 동안 매일 만난 친구, 손호준을 향한 대중의 심리적 거리감은 TV와 거실 소파 사이 정도다.

크림색 튜닉은 이스트로그(Eastlogue), 반다나는 벨스타프(Belstaff), 체크 팬츠는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크림색 튜닉은 이스트로그(Eastlogue), 반다나는 벨스타프(Belstaff), 체크 팬츠는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김유정은 전 국민이 아는 그야말로 국민 여동생이다. 네 살 때 찍은 과자 CF로 우리 앞에 처음 어여쁜 모습을 드러내더니, 열일곱 살이 된 요즘은 더욱 예뻐졌다. 인터넷에선 실시간으로 김유정을 볼 수 있다. 한동안 포털 사이트 메인엔 김유정이 출연한 모 화장품 광고가 떠 있었다. 동영상을 무심코 누른 사람들은 흠칫 놀랐을 것이다. 잘 자라고 있는 우리 유정이가 늦잠 좀 잤다고 정창욱 셰프로 변해버리다니! 그러고도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김유정은 연신 핑크빛 미소를 날린다. 바로 아래 클릭 창에서는 750만 뷰라는 사상 초유의 재생 수를 기록한 웹 드라마 <연애세포>가 시즌 2 시작을 알린다. 천사 날개를 단 김유정이 구름 같은 웃음을 터뜨린다. 초록색 포털 사이트 하루 이용객 수를 떠올려봤을 때, 그날 하루만 대략 2,000만 명 정도가 김유정이 반달눈을 그리며 웃는 걸 봤다.

색깔로 표현한다면 무채색보다는 선명한 원색을 띠는 두 사람이 영화 <비밀>에 끌린 건, 공교롭게도 한없이 가라앉는 듯한 무게를 가진 시나리오 때문이었다. 살인자의 딸, 그녀를 키운 형사, 그리고 그들의 비밀을 쥐고 살인자의 딸 앞에 선생님으로 나타난 의문의 남자. 영화 <비밀>은 아픔을 품고 살던 세 사람이 10년 후 다시 만나며 벌어지는 일을 담은 미스터리 영화다. 박은경·이동하 공동 감독은 ‘긴 세월 동안 여진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 사건이 남긴 흉터가 어떻게 일상을 잠식하고 변화시키는가’를 그려보고 싶다고 말했다. <비밀>은 세상에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다.

블랙 컬러 원피스는 꼼데가르쏭(Comme des Garçons), 초커는 제이미앤벨(Jamie&Bell), 링은 러브캣 비쥬(Lovcat Bijoux), 스톤헨지(Stonehenge), 엠주(Mzuu), 팔찌는 스와로브스키(Swarovski).

블랙 컬러 원피스는 꼼데가르쏭(Comme des Garçons), 초커는 제이미앤벨(Jamie&Bell), 링은 러브캣 비쥬(Lovcat Bijoux), 스톤헨지(Stonehenge), 엠주(Mzuu), 팔찌는 스와로브스키(Swarovski).

김유정은 살인자의 딸 ‘정현’을 맡았고, 손호준은 10년 전 살인자에게 약혼자를 잃은 남자 ‘철웅’을 연기한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 살인자의 딸을 기른 형사는 성동일이다. 손호준은 주인공 세 명을 두고 모두 ‘아픈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아픔을 비밀로 간직해야 했기에 더 아팠던 사람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그 자리에서 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이었어요. 세 사람 사이의 얽히고설킨 상황과 감정이 놀라울 정도로 잘 짜여 있었죠. 감춰진 미묘한 감정선이 흥미진진했어요. 마지막에 비밀이 밝혀질 때 오는 희열도 있었고요.” 대중이 그에게 기대하는 이미지와 정반대 성향을 가진 인물이라서 손호준은 이 작품이 정말 해보고 싶었다. 손호준은 실제 자신의 성격도 어두운 편에 가깝다고 했다.

김유정에게 시나리오는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시커먼 물 같았다. 정현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모습과 실제 내면이 많이 다른 아이였다. 김유정과 똑같은 10대라는 나이, 고등학생. 겉으로는 밝은 척, 당당한 척, 활발한 척하지만 외면과 내면이 부딪치면서 조금씩 섞여가는 모습에 마음이 끌렸다. 지금까지 만난 어떤 캐릭터보다 무겁기도 했다. “평소의 저도 사람들 앞에서는 밝고 활발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우울하고 어두운 모습도 있거든요. 그런 어두운 분위기를 밖으로 내보내고 싶을 때도 있는데 이 영화로 해소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저, 그동안 캔디 같은 역할만 맡았잖아요.” 김유정은 정현이를 받아들이며 혼자 있는 시간을 더 오래 가지려고 애썼다. 엄마도 없고, 형제도 없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정현이에게는 혼자만의 감정이 더 많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려고 한 노력은 벗어나기 힘들 정도로 깊은 몰입을 가져왔다. “캐릭터에서 빠져나오는 게 어려웠어요. 영화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방 안에서 혼자 있곤 했어요.” <우아한 거짓말>에서도, <앵그리맘>에서도 김유정은 애정을 갈구하는 10대의 지독한 외로움을 안 그런 척 담아냈다. 사랑스러운 얼굴에 일그러진 결핍이 새겨졌다. 캔디는 슬픔을 느낄 줄 몰랐던게 아니다. 참고 또 참았을 뿐이다. 캔디는 항상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웃었다.

손호준이 입은 플라워 프린트 퀼팅 셔츠와 코듀로이 팬츠는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김유정이 입은 플라워 프린트 원피스는 바네사 브루노(Vanessa Bruno), 링은 러브캣 비쥬(Lovcat Bijoux), 팔찌는 스톤헨지(Stonehenge).

손호준이 입은 플라워 프린트 퀼팅 셔츠와 코듀로이 팬츠는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김유정이 입은 플라워 프린트 원피스는 바네사 브루노(Vanessa Bruno), 링은 러브캣 비쥬(Lovcat Bijoux), 팔찌는 스톤헨지(Stonehenge).

손호준은 상대역이 김유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저 귀엽게만 느껴졌다. 김유정이 보여온 상냥하고 귀여운 얼굴, 그리고 (촬영 당시) 중 3이라는 나이. 하지만 막상 손호준은 김유정을 만났을 때 말문이 막혔다. “성동일 선생님하고 먼저 만나서 얘길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유정이가 걸어왔어요. 그런데 중학생이 아니라 여자인 거예요. 저도 모르게 ‘…안녕하세요?’ 높임말이 나오더라고요. 하하하” <비밀>에서 손호준은 열다섯살 차이 나는 꼬맹이(손호준은 김유정을 이제야 꼬맹이라고 부른다)로부터 연기 시작점을 잡았다. 촬영에 늦게 들어간 손호준에게 이미 그 상황에 흠뻑 빠져 있던 파트너 연기자의 감정은 그 상황이 진짜라고 믿게 해줬다. “전 아직 많은 걸 보여드리지 못했어요. 지금은 철저하게 캐릭터에 빠진다기보다는 그냥 상황에 집중하는 거 같아요. 그 상황에서 갖는 감정을 표현해내는 거죠.” 손호준은 박은경·이동하 감독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다. 비슷한 경험을 가진 지인 이야기, 친누나 이야기. 함께 울고 웃으며 한 걸음씩 철웅에게 다가갔다.

손호준이 입은 카푸치노 컬러 셔츠와 트렌치 코트, 블랙 트라우저, 레이스업 슈즈는 모두 프라다(Prada). 김유정이 입은 원피스는 오브제(Obzéé), 슈즈는 스튜어트 와이츠먼(Stuart Weitzman), 링은 제이미앤벨(Jamie&Bell), 팔찌는 베켓(Becket).

손호준이 입은 카푸치노 컬러 셔츠와 트렌치 코트, 블랙 트라우저, 레이스업 슈즈는 모두 프라다(Prada). 김유정이 입은 원피스는 오브제(Obzéé), 슈즈는 스튜어트 와이츠먼(Stuart Weitzman), 링은 제이미앤벨(Jamie&Bell), 팔찌는 베켓(Becket).

하지만 <더 테러 라이브> 공동 각색에 이어 <비밀>로 또 한 번 호흡을 맞추는 두 감독은 모든 배우에게 대화를 통해 상황을 설득시키는 타입은 아녔던 거 같다. “감독님들이 오빠랑은 계속 얘길 하시면서 저한테는 ‘괜찮아~’라고만 하셔서 서운했어요.” 김유정의 투정에 손호준은 너무 완벽해서라고 직진하는 칭찬을 건넸다. “네가 너무 잘하니까 그렇지. 연기의 신이에요. 영화 보시면 정말 깜짝 놀랄 거예요. 유정이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촬영 현장에는 든든한 아버지 성동일도 있었다. <응답하라 1994>에서 손호준은 이미 6개월간 신촌하숙에 신세를 진 과거가 있다. 그때부터 성동일은 손호준에게 아버지였다.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도 계속 아버지라고 불렀죠. 아버지, 아버지 부르다가 슛 들어가면 멱살 잡고 죽이네 살리네 하고 막. 끝나면 ‘아버지, 어디 안 다치셨어요?’ 그러고요.(웃음)” ‘이 장면에서는 나보다 같이 걸리는 네가 더 돋보여야 한다.’ 성동일이 아들 손호준에게 촬영 내내 들려준 얘기다. 감정을 폭발시켜야 하는 장면이 많던 이번 영화에서 성동일은 아들딸이 감정을 끌어모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뒷받침해줬다. 아버지 덕분에 손호준은 고깃집에서 상을 엎고,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흘릴 때도 극한 감정을 여러 번 뽑아 올릴 수 있었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성동일에게 많이 의지했고, 덕분에 많이 웃었다.

집업 셔츠와 트라우저, 서스펜더와 타이는 모두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첼시 부츠는 까르미나(Carmina at Unipair).

집업 셔츠와 트라우저, 서스펜더와 타이는 모두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첼시 부츠는 까르미나(Carmina at Unipair).

나영석 PD는 손호준 캐스팅 이유를 그의 ‘일관됨’으로 꼽은 적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그는 천운의 <응답하라 1994>해태 역 이후, 배우들과 어우러짐이 좋은 작품을 해왔다. 물론 정우와 함께 담배 맛의 진수를 보여줬던 영화 <바람>이 2년 동안 그에게 불어온 순풍의 시초였다. <태양은 가득히> <트로트의 연인> <쓰리 썸머 나잇> <미세스 캅>까지 크든 작든 손호준의 자리는 극에서 쫄깃한 맛을 만들어냈다. 여전히 그는 “운이 좋아서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운은 한 번은 찾아올 수 있지만 연속해서 찾아오진 않는다. 힘들고 길던 무명 시절, 1년에 오직 일주일간 연기하더라도 그 시간으로 나머지 시간을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느끼는 ‘좋아하는 마음’이 불러온 결과일 것이다. 손호준의 인생 목표는 ‘재미’다. 스스로 재미있어야 하고 재밌게 살아야 하고 행복해야 하고 그게 최종 목표다.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는 걸 쑥스러워하는 남자가 그동안 배우라는 직업을 놓지 않은 건, 연기가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배워가고 있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대선배님들도 여전히 배우고 있다고 말씀하세요. 연기가 뭔지 설명을 못하겠다고 하시고요. 하물며 저는 한참 배워야죠. 어떤 사람을 봐도 배울 점이 있어요. 저는 연기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믿음이라고 생각해요. 아역 배우들은 엄마가 죽었다고 하면 그걸 믿고 펑펑 울잖아요. 나이 먹어가면서 그 믿음을 자꾸 의심하게 돼요. 그 상황을 믿어야 하는데 못 믿게 되는 거예요. 아역 배우들을 보면서는 순수함을 배워요.”

열일곱이 된 김유정에게 영화 ‘비밀’은 여러 가지로 첫 번째 의미를 갖는다. 아역으로 시작한 김유정에게 처음으로 아역이 생겼고, 작품을 선택하는 데 자신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반영되었다. 10년 전 그날을 연기하는 김유정의 아역은 헤어스타일까지 유정의 어릴 적 모습을 쏙 빼닮아 아버지조차 깜짝 놀랐다고 한다. <우아한 거짓말>에서 김유정이 한 인물을 홀로 힘 있게 이끌어가는 단계를 넘어섰다면, 이번 영화는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김유정은 해보지 못한 분야에 자기 자신을 두는 방식으로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다. 생각을 표현하고 싶어 쓰기 시작한 시나리오도 서너 편 된다. 김유정은 자신의 성장 속도와 꼭 맞게, 인간이 성장해가며 가지는 감정의 폭을 키워왔다. <비밀>은 열일곱 살 김유정이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꺼내지 않던 감정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모습일 거라는 것만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