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서핑의 계절

매일같이 바다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서핑을 했다. 다이어트는 실패했지만 삶은 전보다 가벼워졌다. 마침 동해에선 가을 서핑이 한창이다. 서핑의 계절이다.

자동차 / 올-뉴 지프 레니게이드 가방 / 투미 서프보드 / 채널 아일랜드.

자동차 / 올-뉴 지프 레니게이드 가방 / 투미 서프보드 / 채널 아일랜드.

“저걸 타면 사고력이 사라져버려!” 영화 <라이드>에서 뉴욕의 잘나가는 편집자 재키는 캘리포니아로 서핑 여행을떠난 작가 지망생 아들에게 독설을 날린다. 맞는 말이긴 하다. 발리에서 한 달을 보내는 동안 내 머릿속은 백지가 되어버렸다. 쉴 새 없이 파도에 부대껴야 하는 상황에선 2단 논법 이상의 고차원적 생각이란걸 할 만한 겨를이 없었다. 일단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파도를 잡아타는 것. 그것만으로도 벅차다. 거친 파도가 온갖 잡념을 휩쓸고 지나간 후, 어느새 잔잔해진 바다 위에 남는 건 포말처럼 흰 햇살과 물결의 일렁임, 그리고 붉게 익은 얼굴들 사이를 팔랑팔랑 오가는 한가로운 나비뿐이다. 미끄러지듯 물 위를 달릴 때의 그 기막힌 짜릿함은 또 어떤가! 거기엔 어떤 모호함도 없다. 완벽한 무아(無我)의 상태다.

서핑을 처음 접한 건 지난해 친구들과 함께 오키나와에서 겨울 휴가를 보낼 때였다. 딱히 목적은 없었다. 에어비앤비에서 찾아낸 요미탄 지역의 저렴한 숙소 주인장이 마침 전직 프로 서퍼였을 뿐. 30년간 서핑을 했다는 미국인 서퍼 대니는 크리스마스 아침이 밝자마자 우리를 방파제 옆 차가운 바닷물로 밀어 넣었다. 싱싱한 겨울 파도는 어찌나 성실하고 야무진지 스펀지 보드 위에서 허우적대는 신입들에게 단 1분의 쉴 틈도 주지 않았다. 살빠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게 딱 이런 거구나 싶을 때까지 일어서고 넘어지길 반복했다. 힘들고도 유쾌했던 크리스마스 이벤트가 일상이라는 실체가 되어 눈앞으로 밀려든 건 최근의 일이다. 직장 생활 12년 만에 얻은 긴 휴가를 즐기고자 발리행 티켓을 끊으며 서핑 캠프를 신청한 건 순전히 할 일이 없어서였다.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생활로 인해 엉망이 된 건강을 챙길 필요도 있었다. 내심 다이어트의 성공을 꿈꾸기도 했다.

초보자들을 위한 서핑 천국으로 유명한 꾸따에서의 내 하루 일과는 놀라울 만큼 단순하게 흘러갔다. 눈을 뜨자마자 바다로 나가 2시간 서핑을 하고, 늦은 아침을 먹은 후 수영장에서 1시간 정도 낮잠을 자는 식으로 하루의 절반을 뚝딱 비웠다. 그리고 다시 바다로 나가 2시간 서핑을 하고 또 밥을 먹으며 남은 해를 집어삼켰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로컬 서퍼들이 즐겨 찾는 싸구려 바에서 밥 말리와 비치 보이스의 지나간 음악을 안주 삼아 1,000원짜리 보드카를 마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핑은 다이어트에 그리 도움 되는 운동은 아니다. 체력 소모가 엄청나긴 하나 그만큼 먹는 양도 늘었다. 두 팔을 열심히 휘저어 패들링을 하고, 보드 위에서 벌떡 일어서는 테이크오프 자세만 해도 상당한 근력을 요한다. 처음엔 해변 근처에서 깨지는 거품을 탔는데, 그조차 쉬운 일이 아니어서 제대로 일어서기는커녕 고꾸라져 버둥거리기 일쑤였다. 하루 최소 4시간을 꼬박 물에서 보냈다. 극기 훈련이라도 온 것처럼. 그럼에도 보드 위에만 올라가면 그냥 웃음이 났다.

서른여섯 해를 육지의 중력에 따라 움직여온 몸뚱이가 파업을 선언한 건 바다로 출근한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다. 온몸의 근육세포들이 일제히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야! 당장 멈춰. 서핑을 배우기엔 넌 너무 나이가 많다고!” 몸살이 나자 재미있기만 하던 서핑도 괴로워졌다. 엄청나게 큰 파도가 연일 계속되는 빅 스웰 주간까지 겹치면서 라인업(Line up)으로 나아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어딘가에서부터 날아온 보드에 머리를 얻어맞고, 여기저기 멍이 들거나 상처가 생겼다. 냉정한 파도에 따귀를 맞고 푹 잠겼다가 가까스로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또 다른 거대한 파도가 무시무시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돌진해왔다. 물이 깊어져 두 발이 땅에 닿지 않을 때는 그야말로 패닉이었다. 현지 인스트럭터들은 잔뜩 겁먹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그냥 물일 뿐이야. 즐기면 돼!” 이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어렵다. 긴장할수록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공포심이 만들어낸 최악의 상상은 눈 깜박하는 사이 현실이 되어 덮쳤다.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날씨나 조류 같은 건 스마트폰으로 해결 가능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그저 따르는 수밖에.

바다에 나가는 일이 다시 즐거워진 건 신기하게도 그때부터였다. 흐름을 따른다는 건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미리 겁먹지 않는것. 파도를 만나면 담대하게 맞서 나아가 그 파도를 넘어서면 되고, 감당하기 힘든 파도일 땐 잠시 물속에 몸을 숨기면 된다. 제아무리 큰 파도도 10초면 지나갔다. 어떤 오해나 편견 없이, 물은 그저 물일 뿐. 바다는 겁먹고 도망칠 만큼 무서운 것도, 만만하게 대할 만큼 우스운 것도 아니었다. 기다림 끝에 마침내 기분 좋은 파도가 오면 힘차게 패들링을 한 후, 파도가 나를 밀어줄 때 있는 힘껏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반드시 멀리 봐야 한다. 시선이 나아갈 방향 대신 발밑으로 향하는 순간 몸은 균형을 잃고 무너진다. 잊고 살아 그렇지 그건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타이밍을 놓치거나 제대로 라이딩을 하지 못했을 땐 다음 파도를 기다리면 된다. 오늘 안 되면 내일. 언젠가는 파도가 온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수영을 잘 못해도 상관없었다. 보드가 구명보트 역할을 해주니까. 앞서 언급한 영화 <라이드>에서 “주 3회 400m 수영을 하고, 롱아일랜드 해협에서도 헤엄쳐봤고, 배에 탄 채로 강에 떨어진 지갑을 주운 적도 있다”던 여주인공도 파도에 호되게 당했다. 바다가 그녀를 받아준 건 오만한 하이힐을 벗어 던지고 상처투성이 맨발을 드러낸 후였다. 한국 개봉 당시 ‘나에게로의 여행’이라는 손발이 오글거리는 부제를 달고 나왔다는 점만 빼면 서핑 초보자들에게 제법 도움이 되는 영화다.

발리에서 돌아온 후로 수영을 다니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발차기 단계만 수십 번 반복 중이지만 이번엔 욕심이 생긴다. 동해 서핑은 가을이 제철이다. 찬 바람이 불면 잔잔하던 바다의 높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수온은 제법 따뜻하다. 얼마 전 양양엔 국내 최초의 서핑 전용 해변까지 생겼다. 기사문 근처의 이 ‘서피비치(Surfyy Beach)’ 에선 추석을 앞두고 대규모 서핑 대회도 열린다. 벌써부터 마음은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닌다. 날이 선 파도에선 테이크오프조차 쉽지 않은 처지이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내일은 또 내일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파도의 경사면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물의 터널을 통과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모르긴 해도 엄청나게 즐거울 것이다. 앞으로의 삶이 지금까지와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만 모든 게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이다. 언젠가는 카이트 서핑에도 도전해보리라. 수년 전에 배워둔 패러글라이딩을 드디어 써먹을 수 있겠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바다를 떠나기 힘들 것 같다. 전설적인 서퍼 켈리 슬레이터도 말하지 않았던가. “서핑은 마피아 같은 거예요. 일단 들어오면 그걸로 끝입니다. 출구는 없어요.